22화. 본격적으로 (3)
“오늘도 널 두들겨 팰 거다, 근데 이번엔 너에게 기회를 하나 주려고 해.”
맥레인이 양 주먹에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보기만 해도 지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표정과 함께.
그 광경에 몸 이곳저곳이 쿡쿡 쑤셔왔다.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거죠?”
“덜 처맞을 기회.”
이야,
진짜 대단한 기회네.
“맞는 것보단 덜 맞는 게 낫고, 덜 맞는 것보단 안 맞는 게 낫지. 근데 그것보다 더 나은 게 뭔지 알아?”
“뭐죠?”
“예전에 아주 대단한 창술가 하나가 있었어, ‘아크리유’라는 대단한 여전사였지. 그 재능이 정말 무시무시해서 그녀를 상대해서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
맥레인은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점점 내게 다가오면서.
“그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숱한 전쟁터를 누비면서 상처는커녕 쓰고 있던 투구의 깃조차 헤지는 법이 없었지 뭐야? 그런데 말이야.”
맥레인이 이내 내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차가운 표정으로 내게 쏘아붙였다.
“그런 대단한 전사가 어느 날 갑자기 맥없이 죽어버렸어, 이유가 뭘까?”
“더 대단한 상대를 만났겠지요.”
“아니, 애석하게도 그리 대단한 상대도 아니었어.”
이윽고 맥레인은 섬뜩한 얼굴로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딱 한 번, 요행에 가까운 상대의 공격이 그녀의 허벅지를 스친 거야.”
“무기에 독이라도 바른 겁니까?”
“전혀.”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죽은 거죠?”
“몰랐거든, 칼에 맞았을 때 느껴지는 고통을.”
“허….”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혼이 빠져버린 거야. 그녀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순간이었지.”
“입술의 그 흉터는 그때 생긴 겁니까?”
“뭐?”
내 말에 맥레인이 흠칫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확히 말씀하셨잖아요, ‘칼’에 맞았을 때 느껴지는 고통이라고.”
그는 곧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때 얻은 흉터다.”
잠시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듯,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던 맥레인은 이내 내게 다시 집중했다.
“어쨌든 이 이야기의 요지는 안 맞는 것보다 ‘알았으니까 안 맞으려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야.”
“그래서 제게 준다는 기회라는 게….”
“맞아, 맞고 싶지 않으면 몸부림이라도 치라는 소리다. 넌 알잖아? 내 주먹에 맞으면 지랄 맞게 아프다는 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주먹이 정확히 내 명치에 꽂혔다.
“끅…!”
“이렇게!”
어제와는 비교도 안 될 완력.
나도 모르게 작은 비명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다.
그 무시무시한 주먹은 그대로 날 땅에 처박아버렸다.
고통에 얼룩진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이걸 뱉지 않으면 그대로 가슴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아.
“커헉…헉…!”
겨우 토악질을 하듯 내뱉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맥레인은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고.
빡!
난 그 찰나에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움직임으로 그의 주먹을 막았다.
하지만 막은 것이 실수였다.
“끽…!”
두 팔을 교차해 주먹을 막은 것까진 좋은데, 그 반동으로 짓눌려진 팔이 내 코를 부러트린 거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하얀 얼룩이 지고, 혀 깊숙한 곳엔 단내가 우러나온다.
두 귀 가득 찬 이명에 몸에 퍼져 있단 균형 감각 역시 진창.
그러는 와중에 맥레인의 주먹이 다시 한번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든다.
이건 정말 맞으면 죽는다,
막아도 죽는다.
“으…익…. 씨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덕분에 온 힘을 짜내 바닥을 구를 수 있었고 간발의 차로 그의 주먹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성공은 거기까지의 이야기.
땅에 주먹을 내지른 맥레인은 인간 그 이상의 몸놀림으로 자세를 회복해 바닥을 구르던 날 걷어 차버렸다.
“흐…학…!”
허공에 몇 초를 체류하다 어느 나무에 들이박혀 떨어진다.
그러나 그 경악할 만한 고통에 감상평을 내릴 시간 따윈 없다.
이제 막 땅에 두 발이 닿은 내 앞으로 맥레인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살려줘요.
난 짐승의 것과 비슷한 본능으로 네발로 기었다.
그리고 그 눈물겨운 움직임은 제법 잘 통했다.
한참을 기고 굴러 두세 번의 공격을 피한 나는 그제야 한숨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헉…. 헉…!”
익숙해지기는커녕 정말 날 죽일 작정인가?
어제보다 그 강도가 갑자기 수십 배는 늘어나 버린 것 같다.
이마저도 그의 의도일까?
“어제 보여줬던 집중력은 다 어디 갔냐?”
목을 까딱거리던 맥레인이 내게 비아냥댔다.
“넌 분명히 어제 내가 내지르는 주먹을 두 눈으로 끝까지 쫓았어.”
그랬지, 그런데 이건 차원이 달라!
내 생각을 꿰뚫어 보듯, 맥레인이 보란 듯이 큰소리로 으름장을 놓는다.
“달라진 건 네가 느끼는 고통뿐이야! 어제보다 강도가 조금 더 세질 줄 알았나? 천만에, 세상은 널 위한 계단을 만들어주지 않아.”
이내 맥레인이 다시 천천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에 막연한 공포감에 지배당한 나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안 움직여지나? 그렇겠지. 자신이 받을 고통을 예상한 네 알량한 오만의 대가다. 그리고 그걸 바꿔 말하면 고통에 무뎌졌다 표현하지.”
그는 냉정한 어조로 말을 이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고통에 무뎌졌다는 건, 고통을 처음 겪는 것과 똑같은 말이야. 방금 내가 네게 해줬던 이야기처럼.”
뼈저리게,
느껴져.
그의 말 대로야.
고통은 정도가 없다, 날 위한 계단 따위가 될 수 없어.
이미 세공소에서 겪을 대로 겪어봤잖아.
디안, 이 병신새끼 같으니!
첫날 맥레인의 주먹과,
셋째 날인 오늘 맥레인의 주먹은 모두 같은 의미를 품고 있었던 거야.
그저 그 성격이 달랐을 뿐.
첫날은 내게 상기시켜 주었고,
둘째 날은 내게 익숙함을 주었고,
셋째 날은 내게 깨달음을 줌으로써,
무뎌짐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그 의미를 지금 내게 알려주고 있는 거다.
침착해,
차분하게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때를 생각하며.
그런 내 모습을 기다렸다는 듯,
맥레인은 거센 바람처럼 내게 달려와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난 그 주먹을,
마치 다 외고 있는 별자리처럼.
* * *
피했다?
눈빛이 돌변한 녀석이 제법 세게 내지른 내 주먹을 간단히 피했다.
고통의 격차로 녀석의 사고를 의도적으로 뭉개놨는데,
제법 잘 헤쳐나왔구나.
둘째 날의 집중력이 셋째 날, 고통의 격차를 이해한 순간이다.
더딤 없는 육체와 그에 상응하는 정신력.
부정하진 않겠다,
놈은 정말 ‘보석’이야.
사실 놈의 육체에 고통의 기억을 각인시키는 건 흐르는 물에 글귀를 새겨넣는 것처럼 한없이 의미 없는 짓에 불가해.
그래서 놈이 달리기를 제법 잘하게 되었을 때부터 생각했다.
육체가 아닌,
놈의 정신, 사고에 그것을 새겨야겠다고.
근데 그걸 사흘 만에 해낼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쯤 되니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놈이 쌓아갈 탑의 높이가 과연 어디까지 일지.
좀 더 빠르게 주먹을 휘두른다,
첫 주먹은 그의 어깨를 스쳤다.
그 기세에 살갗이 찢겨 나갔지만, 놈은 둘째 날의 그 차분한 표정으로 다음 주먹을 완벽히 피해냈다.
이제 내가 한없이 약한 주먹을 휘두르든,
진짜 죽일 기세로 전신의 힘을 다해 휘두르든.
그는 똑같이 날 선 반응으로 마주할 것이다.
* * *
“거의 다 됐어, 조금만 참아라.”
매튜 아저씨가 예리한 눈빛으로 내 코를 매만졌다.
한 번씩 어긋난 뼈가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림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전율시켰다.
이후론 주르륵 흘러내리는 코피와 그 비린내가 미간에서부터 걸쳐 내려온다.
으득.
“어흑…!”
매튜가 단번에 어긋난 코뼈를 돌려놓았다.
“아주 정확하게 맞춘 건 아니야, 일단 숨이라도 편하게 쉬어야 할 것 아니냐? 얼른 밤이 되어 네가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했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매튜 아저씨 덕분에 막혔던 숨통이 트였다.
“그나저나 디안, 제법 달라졌구나?”
“네?”
그가 날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어제보다 더 심하게 구른 것 같은데 표정은 제법 좋아 보여서.”
“그런가요.”
사실 뭔갈 하나 배운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진 말하기 힘든.
그 어중간한 선에 걸쳐 은은하고 소소한 기쁨만이 감돌고 있을 뿐.
그래도 어렴풋이 그에게 내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다.
“고통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거 다행이구나.”
그래, 다행이죠.
더딤 없는 육체를 가진 나에게 꼭 필요한, 그런 이해.
이어서 매튜 아저씨가 걱정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맥레인이 밉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확실히 그가 미울 때도 있지만, 그 반대의 감정이 더 크다.
당장 지금은,
“고마운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 그렇다.
내 대답에 매튜 아저씨는 들고 있던 솜뭉치를 내 코에 쑤셔 넣은 뒤 호쾌하게 웃으셨다.
* * *
어스름이 내려앉은 밤.
캠프 한구석에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아티잔 가문을 어떻게 생각해?”
비질라가 예리한 톤으로 내게 묻는다.
“아티잔 놈들은 햇살보다 금의 반짝임을 더 귀히 여기는 족속들이지.”
그 물음에 난 껄렁하지만 정돈된 목소리와 느긋한 제스처로 대답했다.
“그건 너네 다르마야도 마찬가지 아냐?”
이어지는 비질라의 물음에 난 자연스레 표정을 있는 그대로 구겼다.
“천만에, 우린 금을 철저히 상품으로 취급해. 황금의 녹진한 빛깔보다 아이의 웃음이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상식인이라 할 수 있지.”
덧붙여 특유의 능글맞은 넉살을 부린다.
“물론 리시론 출신 미녀들이 보여주는 웃음이 좀 더 가치가 있겠지만 말이야.”
“그런 상식인이 앤서니 트와드가 주최하는 경매에 온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애석하게도, 난 그 상식인에서 아주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유복한 자의 덕목 중 하나가 뭔지 알아? 바로 ‘융통성’야. 사람들은 이 융통성에 환장을 하거든.”
비질라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난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뜨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융통성을 발휘하면 조금의 불편도 감수할 자들이 수두룩하지. 더 정확히 말하면 융통성으로 그들의 불편을 산다고 해야 할까?”
“결국은 모든 게 재물로 해결된다는 소리네.”
“그게 다르마야니까.”
넌지시,
날 지켜보던 비질라는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서 이내 환하게 웃었다.
“진짜 놀랐어, 디안 오빠.”
이에 나도 뻣뻣하게 유지하고 있던 표정을 겨우 풀었다.
“아직 좀 부족한 것 같은데.”
“귀족이나 기업가들을 빼곤 빈센 다르마야와 눈 마주칠 사람은 하나도 없을 테니 안심해. 그리고 내가 봤을 땐 정말 완벽했어!”
“그들 중 빈센 다르마야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가 있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그럴 일은 없어, 후계자 서열 중 꼴찌 싸움하는 신세에다가 앤서니와 다르마야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으니까. 되려 새로운 접점이 생기는 쪽인 앤서니가 오빠를 환대할걸?”
말을 마친 비질라는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얼굴을 훑었다.
“물론…. 때가 됐을 땐 오빠 얼굴이 좀 멀쩡해야겠지.”
솜으로 콧구멍을 틀어막고, 여기저기 퉁퉁 부은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그녀는 곧장 울상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그땐 이렇지 않을 테니까.”
내 다짐 섞인 말에 비질라는 금세 표정을 풀고서 내가 숙지할 것들을 차곡차곡 보강해주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비질라에게 책을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사람이 바로 포키스였다는 사실이었다.
더 의외인 것은,
간혹 엔제이도 그녀를 위해 책을 가져와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창 그녀와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와중에,
이제 막 밖에서 돌아온 재키가 말에서 내림과 동시에 큰 목소리로 외쳤다.
“보스!”
그 말에 불쑥, 거대한 천막 안에서 보스와 매튜 아저씨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숨을 고른 재키가 말을 이었다.
“조이가 보낸 연락책과 만나고 오는 길이야. 정확한 날짜가 나왔어. 나흘 뒤, 엠바그 폭포에서 구름이 출발해.”
이에 매튜가 크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갑자기 그렇게 빨리? 대체 무슨 일이야?!”
“조이가 앤서니 쪽으로 빈센 다르마야가 경매에 참여한다는 말을 찔러넣기 무섭게, 그쪽에서 경매 일자를 앞당겼데.”
잠자코 듣고 있던 시몬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예상에 없던 큰 거물과의 접점이 생겼으니 기다릴 수 없다는 거겠지. 다르마야와 마주친 적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그리곤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에 담담한 카리스마를 표출한다.
“나흘 뒤, 우린 구름을 탄다. 준비 단단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