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본격적으로 (4)
“무슨 문제 있어, 안나?”
이제 막 끄트머리만 남은 연초를 내던진 맥레인이 물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모닥불 맡에 앉아 잘 짜인 옷감을 만지작거리던 안나가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디안의 몸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거든, 덕분에 매일매일 옷을 새로 만드는 기분이야.”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맥레인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
“그냥 대충 큼지막하게 만들면 안 되는 거야?”
“왜, 아주 앤서니를 털어먹으러 왔다 광고라도 하려고?”
“뭐가 문젠데?”
“그 대단한 다르마야 가문의 자식이 공석에서 맞춤옷을 안 입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 빈센인지 뭔지 하는 놈이 그렇게 망나니 새끼라며?”
“망나니라도 다 같다고 생각하지 마.”
“개차반인 건 매한가지지.”
“그냥 좀 닥쳐줄래?”
안나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고야 맥레인은 껄껄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늘도 디안을 두들겨 팰 셈이야?”
그런 그의 뒷모습에 대고 안나가 쏘아붙이자,
맥레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두들겨 팰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 * *
매일 눈을 뜰 때마다 마주하는 기이한 감각.
어제의 모든 얼룩이 희미해지는 그 느낌은 허탈하면서도 개운했고, 찜찜하면서도 안도감이 들었지만.
딱 거기까지다.
더 이상의 감정을 매몰시키는 건 이제 낭비야.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선택과 집중이 필수다, 그리고 그 선택과 집중을 통해 유의미한 결실에 도달했을 때.
어쩌면 내 삶에 여유라는 게 생기지 않겠어?
그럼 그 여유를 시작으로 파고들면 될 뿐이다.
지금은 내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자.
수천, 수만의 별자리를 외워야 했던 그때 그 시절처럼.
잡생각은 그만하고 내가 도달한 결실을 되뇌어보자.
고통을 각인시킬 순 없었지만,
상기할 순 있었다.
그 의미까지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어.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도.
이제 문제는 이다음이야.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미리 도착해 있었군.”
저 멀리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맥레인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어제 내가 정성껏 박살 낸 코가 어째 더 예리해진 것 같은데.”
살벌한 비아냥과 함께.
그는 말없이 내 앞에까지 다가와 한참을 내 신체 곳곳을 살피다가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설픈 주먹질과 발길질로는 널 때리기조차 힘들겠지.”
이로써 확실해졌다.
맥레인은 드러난 성과에 대해 구태여 다시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을.
성과가 드러나면,
바로 다음 단계로 향한다.
어쩌면 내 신체적 특징을 생각한 그의 배려일지도.
“멍때리지 마, 뒤지고 싶지 않으면.”
배려가 아닐지도…?
이윽고 그는 그루터기 한쪽에 박혀 있던 녹슨 검을 뽑아 던지며 경고하듯 말했다.
“오늘부턴 집중의 끈을 잠시라도 놓으면 죽는단 각오로 해야 할 거다.”
그 무시무시한 경고에,
난 말 없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주워들었고,
그와 동시에,
팍!
내 앞에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폭력적인 바람 소리가 들이닥쳤다.
거의 초 사이에 해당하는 찰나의 시간이었을 거다.
보이지 않는 그 폭음을 품은 바람이 내게 오고 있다는 본능적인 직감.
그리고 그 바람이 내게 닿는 순간 죽고 말 거라는 확신.
그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린 내 신경은 우악스럽게 상체 전반을 뒤로 잡아당긴다.
이성을 품은 정신은 신체가 움직이고 난 이후에야 뒤따라와 상황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방금 그 바람은!
끝내 정신을 차리고 정면을 보니,
모자를 깊게 눌러쓴 맥레인이 손에 검을 쥔 채 날 노려보고 있었다.
두근,
두근두근두근.
급격하게 뛰는 심장, 그리고 그 심장 소리를 놓치지 않은 맥레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그 모습에 소름이 끼쳐 나도 모르게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가 말했지, 집중의 끈을 잠시라도 놓으면 죽는다고. 이번엔 운이 좋게 발휘된 네 본능이 동아줄이 되어줬겠지만, 그다음은 없을 거다.”
“헉…. 헉….”
심장 고동이 밀어내는 숨이 자연스레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뛰쳐나온다.
그런 내 상황과는 대비되는 여유로움으로 무장한 맥레인은 손목으로 검을 두어 바퀴 놀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배우게 될 검의 근본부터 알려주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을 치켜세운 그가 내 바로 앞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내리쳤다.
그 일련의 동작만으로도 경이로움에 몸이 떨릴 정도였지만,
파악!
한 박자 늦게 그의 주변에서 터지는 바람결은 내게 충격을 선사해주었다.
“직선.”
이어서 그는 검을 잡은 손을 비틀어 그대로 대각선을 그리며 베어 올렸다.
“사선.”
직후 몸을 한 바퀴 돌려 손에 들린 검을 유려하게 흔들다 멈춘 그가 날 보며 씩 웃는다.
“곡선.”
그렇게,
그가 내 쪽을 향해 맹렬히 검을 찌르듯 내민다.
“점.”
솔직히 말해서,
황홀했다.
가슴 속에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
귓가에 눈 결정만 한 불씨가 내려앉은 듯 뜨거워져 온다.
“이것들이 바로 검의 근본이다. 그리고 이 근본의 뿌리는 신체의 ‘탄력’으로부터 시작되지.”
그래서 내게 뜀박질을 시켰을 때부터,
그는 검을 배우고 있는 거라 말했던 거구나.
“해서 탄력으로 뿜어낸 근본은 곧 유연함이 되고, 그 유연함은 곧 검술의 뼈대가 된다. 넌 지금부터 그 유연함이 나올 때까지 내 검을 받아내야 할 거다.”
방금 그걸 받아내란 말인가?
“대체 어떻게….”
“내 친절하게도 어떻게 휘두를지 말은 해주지.”
어떻게 죽일지 알려준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직선.”
허둥지둥하는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맥레인은 대뜸 다가와 내게 인정사정없이 검을 내리쳤다.
* * *
그 기골이 하루가 다르게 장성하여,
그 모습이 진정 아름다울 지경이고.
어제의 끔찍한 얼룩은,
오늘의 훌륭한 무늬가 된다.
그런 경이로운 신체가,
아직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저주라며 주저앉을까.
축복이라며 과신할까.
끝내 그 신체적 능력의 기반이 드러났을 때 주저앉지 않도록, 과신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터.
해서 거의 때려 넣는 식으로,
그의 본능에 새길 것이다.
검의 기반을.
모든 중심이 육신이 아닌,
그에게 깃든 이성과 정신이 되도록.
소중한 것을 자기 손으로 잃어버려야 하는 고통을 알고 있었지, 그는.
그런 그가 내게 다가와 은화 하나를 내밀었을 땐 아차 싶었다.
괜히 그에게 호승심을 부리게 만든 건 아닌가 하고.
근데 그게 지금 와서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난 바보같이 그가 던진 은화를 받아들었고,
지금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그 바탕엔 아마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동질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 *
“맥레인! 정말 디안을 죽일 셈이야?!”
매튜 아저씨가 다그치듯 맥레인을 쏘아붙였다.
“보세요, 다 얕은 상처뿐이라고요?”
“근데 그 상처가 적어도 수십은 되잖아!”
“그러게나 말이에요, 저도 놀랐거든요. 겨우 수십에 그칠 줄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
“전 그가 지불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에요.”
천막 안에서 이어지는 그들의 논쟁에,
나는 조심스레 깊게 잠긴 목을 열었다.
“전 괜찮아요.”
“봐요, 괜찮다잖아요.”
“조용히 해, 맥레인!”
매튜 아저씨의 엄포에 맥레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디안,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무법자의 삶이라고 꼭 이럴 필욘 없어. 무법자도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우수에 젖을 수 있고, 한줄기 석양빛 아래에서 시를 읊을 수 있다고.”
그러나 매튜 아저씨의 설득에,
기어이 맥레인이 사족을 붙였다.
“그리고 이틀 뒤엔 기업가를 털러 가죠.”
“맥레인!”
그들의 언쟁이 한창일 때,
뒤이어 시몬이 불쑥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소란이야?”
“시몬, 맥레인이 디안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놨어. 주먹까지는 어떻게 참아보겠는데, 검이라니!”
그 말에 시몬은 담담히 담요 위에 누워있는 날 살펴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나, 디안?”
“전 정말 괜찮아요.”
계속되는 내 괜찮다는 대답에 매튜 아저씨는 진절머리가 났는지 머리를 싸매며 맥레인에게 끊임없이 핀잔을 주었다.
“상대는 아직 학대에서 갓 벗어난 소년이야, 그런 소년에게 ‘태풍’이었단 놈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러?!”
“매튜! 그 단어는 우리끼리 있을 때만 쓰기로 했을 텐데!”
태풍이란 단어가 입에 담기기 무섭게 보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태풍’이 의미하는 게 뭐길래?
맥레인 역시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픽 내쉬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주먹질했을 때의 강도를 넘어선 일은 없었어요. 매튜, 저는…. 더는 실수하지 않기로 맹세했어요, 더 잘 알잖아요.”
그 말에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매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맥레인의 말이 맞아, 그리고 이건 디안의 결정이기도 해 매튜, 우린 그저 가족으로서 응원해주는 게 도리야.”
그렇게 시몬의 설득 끝에야 매튜 아저씨는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직 떨리는 손으로 쓰고 있던 단 안경을 고쳐 쓰고 계셨지만.
* * *
날이 저물고 여기저기서 밤을 노래하는 곤충들의 노랫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질 때쯤.
부스럭부스럭.
내가 누워있는 천막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휙 천막을 걷고 씩씩하게 들어오는,
비질라.
“안녕, 비질라.”
“괜찮아?”
“괜찮고말고.”
“오늘은 연습하기 글렀으니,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줄게. 오늘 아침에 조이 아저씨가 보낸 책이 왔거든.”
쑥스러운 듯 미소 지은 비질라는 얼굴의 흉터가 무색하게 제법 새침한 얼굴로 내 머리맡에 앉아 두꺼운 책을 펼쳤다.
“앤서니 가문은 예로부터 술과 지독한 악연이 있는 가문이야, 초대 가주를 포함한 여덟 명의 가주가 술병으로 목숨을 잃었거든. 그래서 트와드는 술을 지독히 꺼려.”
“그 앞에선 아무리 망나니라도 술 얘긴 쉽게 꺼내면 안 되겠네.”
“응, 근데 트와드의 장녀가 사교계에서 굉장히 대단한 사람인가 봐. 특히 ‘주연’ 쪽으로.”
“사교계에서 술자리라,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네.”
“라이튼 쪽 왕가 사람들과도 친밀을 유지할 정도라니까.”
세공소에서 배우길, 사교는 암묵의 전쟁터라 했다.
함부로 내세우면 가문의 깃발에 오물이 묻고,
너무 꺼리면 가문의 깃대가 한없이 낮아지는.
그런 전쟁터.
“빈센 다르마야도 술 쪽으론 제법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터라 구름 위에서 장녀와 접점이 있을 수도 있어.”
“어쩌면 그녀를 통해서 어떤 활로를 열 수도 있겠네.”
“디안이라면 어렵지 않게 할 거야.”
비질라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두 뺨을 붉힌 채 말했다.
“참, 비질라.”
그러고 보니 생각 난 김에 한번 물어나 봐야겠다.
“응?”
“태풍이 뭔지 알고 있어?”
내 말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태풍이 뭔지 몰라? 용의 시대 때 나타났다던 날씨잖아.”
“응, 그건 알고 있는데. 뭐랄까 누군가를 태풍으로 지칭했을 때, 그 의미를 알고 싶어.”
내 말에,
비질라는 펼쳤던 책을 살포시 덮어놓고 제법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야. 그 자체가 ‘태풍’인 자들. 용의 시대 때 사라진 그 파멸적인 날씨와 필적하는,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들을 태풍이라 불러.”
그런가,
맥레인이란 사람은 어쩌면.
내가 상상했던 것 그 아득한 이상으로.
엄청난 사람일지도.
“근데 나도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 그러니까 대략적인 개념이라고나 할까? 그런 거. 여러 책을 읽어봤지만 그걸 자세히 설명하는 책은 못 읽어봤거든.”
“아냐, 충분히 도움이 됐어. 고마워 비질라.”
“참, 그리고 빈센 다르마야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서 말인데.”
그 말을 끝으로, 비질라는 한동안 내 머리맡에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