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구름 위에서
가을은 하룻밤 사이에 더욱 짙어져 있었다.
사근사근.
빛바랜 나뭇잎은 나부끼는 바람 앞에 몸서리치고,
지근지근.
그 특유의 공허한 냄새에 머릿속이 아려오고 나면,
그래 나도 가을에 물들고 있구나.
한창 눈만 뜬 채 감상에 젖었던 난,
슬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얼음장처럼 단단하게 식어버린 손으로 천막을 걷어 나섰다.
그러자 별안간 시끄러운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아니, 포키스! 그쪽을 좀 더 당겨야 해.”
“당기고 자시고 네가 밀어 봐 좀!”
낡은 마차에 으리으리한 천과 가죽을 덧씌우는 엔제이와 포키스의 실랑이.
“케니, 혹시 모르니까 여벌 옷도 가져오렴. 미리 다 다리게.”
“네, 안나.”
앞선 그들과 달리 차분하게 치장된 마차에 물건을 싣는 안나, 케니.
그리고 거대한 천막 앞, 기둥에 나란히 기댄 채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몬과 매튜.
일전에 처음으로 마을에 내려가기 전 봤던 남자도 저 멀리 보인다.
이름이 ‘버드’였었지 아마?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일거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어났냐, 이것 좀 들어.”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촙이 대뜸 내게 거대한 가죽 가방을 건넸다.
“이게 뭐야?”
“연극에 필요한 장치라고나 할까?”
그렇게 촙을 따라 치장된 마차에 짐을 싣기 무섭게, 이번엔 안나 아주머니가 불쑥 내게 다가왔다.
“디안? 입을 벌리렴.”
“예?”
그 말에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기 무섭게,
그녀는 내 입안에 이름 모를 말캉한 것을 집어넣었다.
그것은 겉에 단단한 돌기가 빼곡하게 나 있었는데,
그 맛이 굉장히 썼다.
“입안 구석구석 씹고 배어 나온 즙과 함께 뱉으렴, 촙 너도 입 벌려.”
“저까지 해야 해요?”
“못 들었니? 너도 구름에 탈 거란다.”
안나 아주머니의 말에 눈을 번뜩인 촙은 망설임 없이 입을 쩍 벌렸다.
“꼭 구석구석 잘 씹고 뱉어야 해, 대충하지 말고. 매튜 성격 알지?”
그렇게 자기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그녀가 획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촙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뭐야?”
“카카투스 열매, 이 닦을 때 쓰는 거야.”
“너무 쓰고 역한데…?”
“뱉고 나면 향긋하게 바뀌니까 참아.”
촙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렇게 그와 나란히 서서 입안에 든 것을 오물오물 정성껏 씹었다.
이내 한참을 촙의 눈치를 보다가,
“퉤.”
입안에 있던 것을 뱉은 그를 따라,
“붸….”
나도 서둘러 토해내듯 그것을 뱉어내었다.
그러자 제법,
입안이 개운하고 상쾌하다.
이어서 말없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는 촙을 졸졸 따라가려는데, 그가 불쑥 몸을 돌려 나를 막아 세웠다.
“디안, 넌 네 할 일을 하러 가야지. 무대에 설 주연이 짐이나 옮겨서 뭐하게?!”
“같이 도우면서 해야지, 가족이잖아.”
“각자 맡은 일을 하며 신뢰해야지, 그게 가족이잖아.”
촙의 말에 난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케니에게 가 봐.”
“그래, 이따 봐 촙.”
내 멋쩍은 표정을 봤는지, 그는 제법 누그러진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따 보자, 디안.”
계속되는 맥레인과의 훈련 탓일까.
아침마다 바뀌어 있는 조직 내 기류에 잘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이 팍 든다.
그리고 그 기분이 끝나니까,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게 건 신뢰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해서 의심이 생긴다.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니 의심보단 확신이 먼저다.
난 잘해 낼 수 있다.
그들의 신뢰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 * *
“디안!”
날 발견하기 무섭게 엄청난 기세로 달려드는 케니.
늘 그랬던 것처럼 양팔을 벌려 내 목에 감으려 했던 그녀는 곧 놀란 표정으로 내 바로 앞에 우뚝 섰다.
“디안?”
“응, 케니.”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어깨가 더 넓어진 것 같아. 키도 조금이지만 더 큰 것 같고.”
“난 잘 모르겠는데.”
“과일은 자기가 언제 낙과할지를 모르는 법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변화란 남들에겐 찾기 쉬운 것이지만 스스로는 찾기 힘들다는 소리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금발을 찰랑거리며 튀어 오른 그녀는 기어이 내 목에 팔을 휘감아왔다.
“준비됐어, 디안?”
“무엇을?”
“크리티야 대륙 최고의 갑부가 될 준비.”
그녀의 말에 난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밤하늘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모습으로는 그를 투영할 수 있단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비질라가 일러준 물건들을 구하느라 진땀을 뺐지.”
이윽고 내게서 떨어진 케니는 바닥에 놓여있던 상자를 들어 보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에 그 고갯짓에 따라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녀는 상자를 열고서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다르마야 가문은 아침에 일어나면 눈가에 진주를 빻아 눈가에 바른데, 그래서 가문의 일원들 모두가 그렇게 눈가가 반짝거린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곤 작은 통을 열어젖혀 그 내용물을 내 눈가에 바르기 시작하는 케니.
“아쉽지만 진짜 진주 가루는 너무 비싸서 구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디안 너의 백옥같이 맑고 투명한 피부라면 이 햇빛 가루로도 충분히 그 반짝임을 낼 수 있지.”
“햇빛 가루?”
“날씨 파편을 수집하는 연금술사에게서 산 거야.”
간질간질.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지긋이 매만지던 그녀가 곧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이어서 큰 통에 담긴 내용물을 두 손에 적시고서,
그대로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잡는 케니.
“케니?!”
“어쨌든 모임의 성격이 사교 쪽이니까 머리 모양도 거기에 맞춰야 해.”
차곡차곡, 유려한 손길로 내 더벅머리를 정돈하기 시작한 그녀가 잠시 후 놀란 눈으로 날 응시한다.
“빈센 다르마야고 뭐고, 어디 별에서 떨어진 사람 같다 정말. 만약 빈센이 이런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숙적인 가문들조차 결국 그를 사랑했을 거야.”
케니의 말에 괜히 부끄러워진 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케니.”
“천만에, 꼭 몸 조심히 돌아와야 해. 매튜 아저씨, 맥레인, 엔제이, 시몬. 촙과 안드레도.”
“꼭 그럴 거야.”
그렇게 그녀에게 한껏 다듬어진 나는 괜히 걸음걸이도 우아하고 기품있게 바꿔보며 안나 아주머니께로 향했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얇은 비단에 포개어져 있던 옷가지들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들은 실과 바늘로 꿰어 이루어졌다기보다,
기품과 따듯함이 꿰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건 대외활동을 할 때 입는 옷이야, 이 조끼는 빈센이 기분이 좋아지면 입는 거고, 또 이건 파티에 입을 정복. 구두는 낡았지만 전부 명품이라 구름 위에서도 의심받지 않을 거란다. 지금부터는 옷마다 입는 법과 매무새 정리를 간략하게 알려줄게, 잘 보고 기억해야 한다. 알겠지?”
암기하는 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는 걸요.
아침 하늘에 별자리를 다그려 넣을 수 있을 정도니까요.
입 밖으로 의기양양하게 내뱉고 싶었지만, 잃어버렸던 기억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내 모습 그 자체가 궤변이라 마른침만 꿀꺽 삼킨다.
그렇게 간략하게 옷과 관련된 것들도 모두 숙지한 나는 잔뜩 달아오른 긴장감을 유지한 채,
매튜 아저씨께 향했다.
“디안, 아니 디안 공이라 불러야 할까?”
내 모습을 본 아저씨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단다, 네 주변엔 언제나 우리가 붙어 다닐 거야. 또 표면적으로 우리는 수행원으로서 동행하는 거니까 가로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우리에게 도움을 구하면 돼.”
“알겠어요, 아저씨.”
그러고 보니 매튜 아저씨,
한껏 말끔한 모습으로 차려입은 모습이다.
원래도 아저씨에게서 깊은 중후함이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그 중후함이 아예 뚝뚝 흘러넘친다.
그런 매튜 아저씨 뒤로는,
이제 막 꾸밈을 마친 시몬이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부진 풍채, 짧고 점잖은 수염.
걸을 때마다 허벅지 위로 찰랑거리는 은시계 줄의 빛깔만큼이나 정력적인 안색.
만약 내게 막연히 인기 많은 정치가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한다면,
난 두말없이 그의 모습을 떠올릴 거다.
“얼추 준비는 끝난 것 같군.”
시몬은 나와 매튜를 번갈아 보다가 곧 손가락을 튕기며 주위 시선을 집중시켰다.
“모두 모여!”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던 일을 바로 멈추고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중엔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모를 맥레인도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금세 집중하게 만드는 목소리로 한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말을 이어가는 시몬.
“우린 주변 숲을 서너 시간 정도 배회하다 동쪽 국경을 통과할 거야. 아마 거기에 주둔한 수비병들은 트와드의 입김에 매우 느슨해져 있을 테지. 우린 어렵지 않게 그곳을 통과해 인근 도시에서 하룻밤을 묶는다.”
그리곤 남루한 복장의 엔제이와 맥레인을 가리킨 시몬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설명을 시작했다.
“맥레인은 ‘맥’이다, 엔제이는 ‘엔’이고. 이 둘은 네가 고용한 용병들이야. 신분상 굉장히 천한 수준이라 빈센과 그렇게 밀접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아, 그러니 디안은 공석에서 이 둘에게 신경을 아예 끄도록 해.”
“네, 보스.”
“그리고 매튜는 ‘맷’이다. 너의 집사지. 큰 거 한 방을 하는 동안엔 너에게 오가는 모든 말은 ‘맷’을 통해야 해. 귀족들은 두 귀가 버젓이 열려 있으면서도 듣는 것조차 타인의 노동력을 위시해야만 하지, 그걸 바꿔 말하면 ‘권력’이라고 해.”
“이해했습니다.”
“난 시온이다, 너의 자산관리사고. 너도 알다시피 빈센은 낭비벽이 심해서 아비가 보낸 자산관리사와 동행하는 신세야. 너와 나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갈등을 겪어야만 해. 인위적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웬만하면 디안 네가 먼저 치고 들어오면 내가 알아서 잘 받아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촙은 ‘칩’이다, 안드레는 ‘안’이고. 얘네들은 네가 중립지역을 경유 하면서 새로운 수행원으로 고용한 자들이야. 빈센의 성격에 걸맞게 ‘지랄 맞은’ 놈들이지.”
이에 엔제이가 복슬복슬한 수염을 씰룩이며 사족을 붙였다.
“가장 쉽네, 평소의 촙과 안드레처럼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
촙과 안드레는 그런 엔제이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지만 차마 시몬 앞에서 입을 열진 못했다.
“나머지는 매튜, 자네가 설명하는 게 좋겠군.”
이야기를 마친 시몬에 이어,
이번엔 매튜가 좀 더 자상한 말투로 주위 모두와 눈을 마주쳐가며 운을 뗐다.
“일정이 급격하게 당겨져서 급한 감이 없잖아 있어, 제법 시작이 좋지 않다는 소리야. 하지만 우린 충분히 잘 대처했고 준비까지 수월하게 끝마쳤어. 그 말은 좋지 않았던 시작을 좋게 만들었단 말이지.”
이어 양팔을 벌린 채 특유의 인자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매튜.
“딱 지금처럼만 하자고, 큰 거 한 방이 벌어지는 그 과정에서 뭐가 당겨지고 밀려나도 잘 대처해서 우리가 원하는 결론에 도달하자. 잘 들어, 시몬 바스티유에 낙오자는 없다.”
그의 진지한 말에 껄렁하게 있던 맥레인도 똑바로 서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화려하게 꾸며진 마차의 행렬이 캠프를 떠나,
덜커덕덜커덕.
숲길을 할퀴며 떠난다.
구름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