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구름 위에서 (2)
캠프를 중심으로 깊은 숲길을 빙 둘러 가길 한참.
매튜 아저씨는 앞으로 두 시간은 더 숲을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동선을 낭비하며 움직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는 ‘시간’의 개연성.
중립지역을 관통하여 보채지 않고 느긋하게 여행길을 즐기는, 빈센 다르마야의 시간을 흉내 내기 위함이다.
둘째는 ‘피로’의 당위성.
계속된 이동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배인 숲과 진흙의 냄새, 그리고 점점 지쳐가는 말들의 행색.
또 오랜 이동으로 우리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피로까지.
그 모든 것들이 국경 수비대를 마주한 이후 우리가 취하는 동선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마지막 셋째는 ‘앤서니 트와드’
본디 한참 후에나 떴어야 할 구름은 빈센의 등장으로 급격히 앞당겨졌다.
덕분에 시작부터 미지한 불안감을 안고 가야 했지만 반대로 우리는 트와드의 애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바꿔 말하면,
그가 빈센의 일정을 수정하게 만들면서까지 무리하게 일정을 앞당겼으니 트와드는 시작부터 우리에게 책을 잡혔다는 소리다.
해서 그 점을 꼬집듯 우리는 시간상 아슬아슬한 늦은 저녁쯤 도시에 입성해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를 보낸다.
그럼 그 상황에 트와드가 가만있을까?
매튜 아저씨는 분명 트와드 쪽에서 우리에게 먼저 접근해 올 것이라 했다.
미안함과 기대감에 뒤섞여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그 모든 설명을 듣고 나니,
매튜 아저씨는 정말 탁월한 수완가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유순하고 점잖은 인상 속에 숨겨진 이지적인 냉철함이라…. 어떻게 보면 맥레인보다 더 무서운 과에 속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족이 아닌 자들에겐 말이지.
그는 조직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아끼니까.
그렇게 삼십 분이 더 흘렀나,
달그락달그락.
한창 바퀴 구르는 소리를 배경 삼아 비질라가 일러준 것들을 답습하고 있었을 때.
“생각해보니까 지금은 역할에 충실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선두 마차의 짐칸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엔제이가 매튜에게 투정을 부리듯 말을 걸어왔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근데 넌 엔제이잖아.”
이에 매튜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젓자.
엔제이는 금세 덥수룩한 수염 속에 입술을 감춘 채 울적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매튜 옆자리의 시몬이 낮고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엔제이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다 내뱉어버려, 참았다가 나중에 실수하지 말고.”
그 말에 매튜도 이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엔제이는 금세 수염 속에서 입술을 끄집어내 열렬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보스, 그래서 우리가 정확히 뭘 훔쳐야 하는 건데?”
“트와드의 물건들.”
“그중 가장 우선인 물건이 있을 거 아냐?”
엔제이의 질문에 선두 마차의 고삐를 잡고 있던 맥레인이 소리치며 답했다.
“재키가 그랬잖아, 인챈트 된 물건이 있을 거라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훔칠만한 물건은 아니잖아, 그런 걸 훔치면 바로 ‘순례자’들이 짐승처럼 쫓아온다고.”
엔제이의 그 말엔 뭔지 모를 두려움이 약간 섞여 있었다.
그런 엔제이에게 매튜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타일렀다.
“그래서 최대한 위험부담을 지지 않게 교묘히 훔쳐야겠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니까. 인챈트의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장물이라 해도 최소 금화 이십만 개야.”
금화 이십만 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뿐이야? 그걸 이용해 개짓거릴 하려는 놈들을 우리 쪽에서 거를 수도 있지. 구매자를 우리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고. 힘없는 소국에 가져다 팔면 없던 출신도 생길 거다.”
그 달콤함이 풍겨오는 말에 엔제이는 금방 온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담 리시론에 파는 건 어떨까.”
이에 자석처럼 붙어오는 맥레인의 비꼼.
“리시론은 강대국이잖아 빡통머리 새끼야.”
그러나 지지 않는 엔제이.
“그럼 뭐 어때서?! 돈 많이 주는 놈들이 최고지!”
“그러다 나중에 나도 갖다 팔겠다?”
“넌 오히려 내가 돈을 주고서라도 팔아야 할 판이야. 고객님 죄송합니다, 이놈에게 걸린 인챈트가 ‘지랄’이라서요.”
“그래도 ‘병신’하난 기가 막히게 잘 잡는답니다, 구매 즉시 시연 가능!”
“아잇 씨팔!”
심각하지만 전혀 심각하지 않은 그들의 다툼에 매튜는 지끈거리는 듯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시몬은 그저 식은 웃음을 지었고,
뒤쪽에 따라붙은 촙과 안드레는 깔깔거리며 웃기 바빴다.
그 사이에서 난,
그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그 상황이 좋아서.
바람에 실려 또르르 떨어지는 낙엽의 모양새처럼 미소지었다.
“자, 그럼 다시 정리하겠어.”
그렇게 겨우 맥레인과 엔제이의 실랑이가 끝나자 모두를 집중시키는 시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름에 진입하는 즉시 빈센의 최측근을 제외한 나머지는 내부를 파악해. 그래야만 경매가 시작될 때 우리가 움직일 동선을 그릴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언제 실랑이를 벌였냐는 듯, 금세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엔제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 너머 고삐를 잡은 맥레인도 같은 표정이겠지.
“디안은 빈센을 연기하면서 최대한 앤서니 가문 사람들을 홀려야 해. 까탈스럽지만 또 줄 건 줄 것 같은 식으로 밀고 당겨. 그리고 경매가 시작되면 그 대단한 다르마야 가문의 힘을 보여주라고.”
난 곧바로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진행하다 내가 디안에게 제동을 걸 거야, 그리고 그 순간이 우리가 내뺄 신호다. 만에 하나 우리의 기만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어 매튜가 덧붙인다.
“그땐 최대한 신속하고 빠르게,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치고 빠질 거야.”
직후 시몬이 고개를 돌려 뒤에서 따라오는 촙을 향해 말을 이었다.
“촙, 포키스가 어떤 깃을 가진 새를 날린다고 했지?”
“꽁지가 보라색인 골다스 종이요.”
“좋아, 잘 기억하고 있군. 동선이 다 그려진 직후 탈출할 노선을 포키스에게 전달하도록 해. 절대 실수하지 마! 중요한 일이니까!”
“물론이죠, 보스.”
“구름을 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리는 게 더 중요하니까.”
복잡한 말들이 오가는 와중에, 나는 오로지 나와 관련된 것들만을 귀에 담으며 심중으로 복기 또 복기를 반복했다.
그런 내 표정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매튜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작게 속삭인다.
“걱정하지 마, 디안. 네가 할 수 있는 일만 해.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니까.”
그리곤 특유의 익살스러운 윙크를 날리는 그의 모습에,
내 몸 안에 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한 꺼풀 덜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내 굽이진 숲길을 따라 또 한참을 이동하다가,
슬슬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엔제이마저도 입을 꾹 다물 때쯤.
우리는 숲에서 벗어나 길게 뻗은 길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턴 서로 묵묵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끝내 매튜 아저씨가 내게 눈빛을 보냈을 때.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연극의 시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막이 오르고,
무대의 조명이 올랐으니.
유감없이 내 할 일을 해내야지.
“맷, 꼭 이렇게까지 촉박하게 움직여야겠어?”
꾸며낸 나태함으로 잔뜩 누운 눈썹, 거만한 입꼬리.
그리고 성대를 좁혀 만든 매끈한 목소리.
맥레인과의 훈련이 끝나고 늦은 밤까지 비질라와 머리를 맞대며 탄생시킨,
빈센 다르마야의 모습이다.
그런 내 첫 대사에,
매튜 아저씨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하지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않습니까? 가주님께서 앤서니 트라이던트와의 접점으로 도련님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기회를 잘 잡으면 가문 내 도련님의 입지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겁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한 꺼풀 쌓였다.
그럼 난 매튜 아저씨가 깔아놓은 그 이야기 위에서 장단 맞춰 춤을 춰야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가문은 큰형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하지만 그 중심에서 멀어지시면 훗날 크게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후회? 지금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게 뭔지 알아? 몸 파는 귀쟁이 한번 못 보고 이렇게 미련하게 움직이고 있는 거야! 앤서니 트와드가 발정 난 개새끼마냥 허리를 들추는 바람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대주러 가고 있는 거라고.”
“도련님, 혹시라도 앤서니 트와드 면전에서 그런 상스러운 발언은 삼가셔야 합니다.”
가슴 한쪽이 지끈거리듯 가렵다.
내 이성 속엔 찾기 힘든, 그런 꼬인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생각보다 그 괴리가 크구나.
“도련님.”
속에서 올라오던 괴리를 곱씹고 있던 나에게 이번엔 보스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시온?”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꼭 상기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뭐를?”
쏘아붙이듯 말하기 무섭게 보스는 일전엔 하지 않던,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행동을 하며 능숙한 솜씨로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뱉었다.
“앤서니 트와드에게 보일 성의 말입니다. 너무 적지도, 그렇다고 과해서도 안 된다는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경매 초반 물품들은 지나치고 중반부터 차근차근 성의를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금화 십만 개 안팎이면 그도 매우 흡족해 할 거에요.”
옳거니,
나와 시온 사이에 있을 갈등이 이런 방식이로구나.
“어차피 당신은 아버지가 날 감시하기 위해 붙인 사람이잖아요? 그럼 당신 입맛대로 하라고.”
내 껄렁한 대답에 보스는 아주 살짝 흡족한 듯, 은은한 미소를 짓다가 대번에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열변을 토했다.
“그럴 리가요. 전 엄연히 도련님을 수행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럼 얌전히 내 수행이나 열심히 하지요? 주제넘게 조언하지 말고.”
이런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보스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좋아.
구름 위에 올라타기 전,
빈센과 맷, 그리고 시온과의 관계가 얼추 맞춰졌고 이제 남은 건….
투둑.
툭.
투두둑.
순식간에 어둑해진 하늘에서 차가운 빗방울이 쏟아진다.
구름을 조각 내 일일이 재조립을 한 것처럼, 위화감이 느껴지는 하늘의 움직임은 별안간 두 눈에 담아도 어색한 것이었다.
“꼭 이럴 때마다 북쪽 탑이 말썽이지.”
앞서가던 엔제이가 하늘을 보며 투덜거린다.
덩달아 나도 빈센 다르마야와 혼연일체 한 것마냥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곳은 비를 내려주는 탑도 있네.”
물론 속으론 정말 오랜만에 보는 빗방울에 반가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빗방울은 점점 거세져 순식간에 마차 지붕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어긋나게 조립된 인위적인 구름에선 이제 막,
쾅!
콰릉!
짧은 섬광과 함께 번개가 쳐 내렸고.
뒤이어 날카로운 바람이 내가 타고 있는 마차의 창문 틈을 비집고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 소리가 빈센으로선 거슬려 잔뜩 신경질을 부리며 열린 창문을 내리는데,
창 너머로 흰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내 호기심 어린 눈을 알아차렸을까.
마차 안에서 나와 마주 앉아 있던 매튜 아저씨가 씩 웃으며 말했다.
“연금술사들이야, 날씨의 파편을 채집하기 위해 온 거지. 마법사의 탑에서 날씨를 만들면, 연금술사들은 그 부스러기를 주워.”
그 말투는 맷이 아닌 매튜였다.
해서 나도 빈센이 아닌 디안으로서,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창 너머로 그들의 움직임을 한참 동안 주시하다,
서서히 마차의 속도가 줄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매튜는 맷으로,
나는 빈센으로 돌아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서 상황을 주시했다.
앞 마차에선 껄렁한 맥레인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중무장한 군인 하나가 쩔걱거리는 갑옷 소리를 내며 내가 타고 있는 마차로 다가왔다.
빌 비트에서 봤던,
그런 불량한 군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시무시한 인상을 한 그 군인은 창가를 주시하다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앞을 보며 손짓한다.
“통과시켜! 귀한 손님이다! 얼른 방책 열어!”
이어서 지시를 마친 그가 날 보며 넙죽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빈센 다르마야님. 탑의 날씨가 요란스럽습니다. 가시는 길이 평안하길.”
그의 인사에,
난 찰나의 순간 매튜 아저씨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그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흐릿한 날씨, 그 속을 가로지르는 화려한 마차 행렬.
그 사이에서 미지의 땅으로부터 왔다는 얼굴 모를, 딱 봐도 귀해 보이는 사람.
착각이라 쓰여 있는 가면을 두른 우리는 그렇게 국경을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