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26화 (26/365)

26화. 구름 위에서 (3)

쏴아아.

두 귀가 먹먹할 정도로 쏟아지는 장대비.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도시.

곳곳에 흐르는 은은한 조명 아래엔,

흠뻑 젖은 도로에 비친 전경이 일렁거린다.

덜거덕, 덜거덕.

이따금 바닥을 할퀴는 마차 바퀴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면,

동시에 내 몸도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고.

그 때문에 흐트러져버린 머리칼과 옷매무새를 마치 오래된 버릇인 양 신경질적으로 고쳤다.

비질라와 머리를 맞대며 구상한 그 일련의 행동들은,

머릿속에 떠올린 빈센 다르마야에 대한 인상을 더욱 확고히 다져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거대한 도로를 가로지르며 매섭게 나아가던 마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이내 우뚝 멈춰 섰다.

그 순간 매튜 아저씨는 아니,

맷은 능숙한 몸놀림으로 날 수행하기 위해 마차 문을 열고 나와 우수수 쏟아지는 비를 맞은 채 대기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맞춰 나는 최대한 가볍고 경쾌한 움직임으로 마차에서 나와 앞에 펼쳐진 거대한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외벽에 장식된, 혀를 내두를 만한 조각들에 순간 시선이 빼앗길 뻔했지만,

하얀빛을 제 맘대로 색칠해 내뿜는 찬란한 유리창에 감탄할 뻔했지만.

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끝까지 유지한 채 맷의 수행을 받으며 제법 우아한 모습으로 건물 입구를 향했다.

이윽고 ‘서풍’이란 작은 간판이 매달려 있는 육중한 문에 도달하기 무섭게,

벌컥.

날 반기듯 안쪽에서 자동으로 문이 열렸고.

그 문 너머에선.

잘 익은 과일 냄새, 잎사귀 위를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이슬 향기.

귀를 애무하듯 절절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듣기만 해도 유복해지는 값비싼 가십이 오가는 사람들의 떠듦.

마지막으로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식기의 쨍쨍거림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이 쉴 새 없이 내게 쏟아져 내렸다.

그 모든 것이 자극으로 점철된 광경에 당황한 내 모습을 봤을까.

맷은 서둘러 내 어깨 위의 빗방울을 손수 털어내며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어떠십니까, 아직도 중립지역의 귀쟁이들이 보고 싶으십니까? 도련님께 어울리는 건 햇살을 담은 샹들리에와 입 헹굴 와인이 있는 이런 곳이랍니다.”

그리곤 짧게 이어지는 그의 익살스러운 윙크에,

난 보기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맷, 언제나 내게 깨달음을 주는 사람은 자네뿐이라니까. 꽉 막힌 시온이 조금이라도 자네를 닮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어 뒤늦게 따라온 시온에게 잔뜩 눈치를 주며 거만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핀 나는 다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내 용병들이랑 친구들은?”

그러면서 맷에게 질문을 던지자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곧장 대답했다.

“이미 저흰 이곳에 귀한 손님 자격으로 온 것 같으니 그들 또한 썩 괜찮은 대접을 따로 받게 될 겁니다.”

“맷이 최대한 잘 말해줘, 나한텐 중요한 사람들이니까 섭섭지 않게 대접해달라고.”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다르마야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인데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가운데 길을 가로질러 내게 집중된 시선을 하나하나 당당하게 마주쳤다.

긴 속눈썹을 나부끼며 노골적인 시선으로 날 핥듯이 쳐다보는 숙녀들부터, 순수하게 얼굴을 붉히며 호기심을 태우는 어린 여인들까지.

또 벌써 사업적인 동반자가 된 양, 머릿속에 오만가지 계획을 설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야망 넘치는 자들의 눈빛도.

또래 관계에 큰 파문을 일으킬 존재의 등장에 시작부터 경계심을 남발하는 야망가의 자식들도.

그 어느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은 나는 빈센 다르마야의 자신만만한 오만을 뚝뚝 떨어트렸다.

“빈센 다르마야 님?”

곧 내 앞에 말끔한 정복을 입은 남자가 튀어나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귀한 바람이 저희 ‘서풍’에 머무시다니, 영광입니다.”

“그야 바람이 잠깐 쉬기에 이만한 곳이 없으니까요.”

“전 서풍의 주인 ‘아들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 아시다시피 빈센 다르마야지요.”

“트와드 님께 이야길 들었습니다, 내일 다시 경쾌하게 나부끼는 바람이 되실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니 제가 빈센 님을 모실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세상에,

저 남자의 입에서 걸쭉한 꿀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진짜로 단내가 날 정도로.

“그럼 잔뜩 기대해도 되겠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들러 씨.”

그의 호의에 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비질라가 그랬지,

빈센 다르마야의 악수는 아주 귀한 것이라고.

팔뚝만 한 금괴 하나를 부여잡는 것보다 빈센의 손을 잡는 게 그들 입장엔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아들러는 순간 앞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넙죽 고개 숙여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아왔다.

“정말 영광입니다, 정말로요.”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내 손을 핥을 기세인 아들러의 모습에 맷이 슬쩍 헛기침하며 끼어들었다.

“크흠, 보다시피 비를 맞고 온 터라 얼른 쉴 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는데요. 저희 도련님께서도 중립지역을 통과하면서 많이 지치셨거든요.”

그제야 아차 싶은 아들러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요, 방부터 준비해드릴까요? 아니면….”

맷은 눈을 반짝이며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곧 트와드 님께서 이곳에 도착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짧게 식사하면서 기다리면 딱 좋겠군요.”

그 말에 아들러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 뒤 손짓으로 사람들을 불러 우리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거대한 원탁, 내 두 어깨를 그대로 껴안아 삼킬 것 같은 호화스러운 의자.

녹이면 금화 스무 개는 나올 것 같은 화려한 촛대.

옷감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냅킨.

맷은 허겁지겁 의자를 빼 나를 앉히곤 잠시 아들러와 이야기를 나눈다며 사라졌다.

그렇게 시온과 단둘이 되기 무섭게,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앤서니 트와드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잘 알았다면 제가 구태여 이곳까지 왔을까요? 중립지역의 질척한 진흙을 밟으면서까지?”

“도련님, 도련님은 단순히 다르마야라는 가문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전서구가 아닙니다. 빈센 다르마야라는 주체로서 이번 만남을 주도하셔서 가문에 보탬이 되어야지요.”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테니 시온, 당신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앤서니 트와드는 냉철한 사업가이자 열정적인 자본가입니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드러내면 그는 그걸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시온 대 빈센 다르마야가 아닌, 보스가 내게 일러주는 조언 같은 것이었다.

말끝에 날 격려하는 그의 은은한 미소가 그 증거이리라.

“시온, 당신은 세상을 두 눈으로 좀 볼 필요가 있어요. 나무 한 그루를 보더라도 단순히 두 눈으로 볼 필요 말이에요. 주판부터 두들기며 나무에 과실이 얼마나 맺힐까 하는 그런 계산적인 거 말고.”

난 슬쩍 시온에게 핀잔을 주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중요한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였으면 애초에 내가 이런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없었겠지. 이건 그냥 상호 간의 눈도장을 찍는 것뿐이라고요.”

“정확히는 최소 금화 십만 개의 비용이 드는 눈도장이지요.”

“또 또, 계산적으로만 생각하잖아?”

이내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시온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그리고 그러기 무섭게 용무를 마친 맷이 서둘러 자리에 합석했다.

“맷, 왜 이렇게 늦었어? 날 저자랑 단둘이 있게 하지 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도련님?”

“알잖아, 그의 입에선 사람 말소리가 아니라 ‘딱딱’ 거리는 주판 소리가 난다고.”

그 말에 맷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냅킨을 풀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시온이야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가주님께선 도련님을 끔찍이 아끼셔서 시온 같은 대단한 사람을 옆에 붙여준 것이지요.”

“날 끔찍이 여겨서 붙여준 게 아닐까?”

“하하, 도련님도 참!”

이윽고 우리 앞으로 여러 사람이 줄을 지어 식탁 위를 화려한 식기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 뒤론,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는데, 두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포만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애써 차분함을 유지한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해 눈앞의 요리를 건드렸다.

겉 뿌려진 열기에 바싹 그을린 고기는 그렇게 나이프를 받아들이기 무섭게 뽀얗고 탐스러운 육즙을 뿜었고,

단 한 번의 걸림 없이 나이프의 움직임에 순응한 고깃결은 그대로 반대편 포크에 담겨,

내 입으로 직행했다.

이빨에 닿은 고기의 첫인상은 바삭함.

그리고 그 바삭함을 꿰뚫자 드러나는 포근함.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육즙은 폭발한 침샘에 맞닿아 입안 가득 특유의 감칠맛을 흩뿌린다.

세공소에서 들이켰던 끓인 유리와는 비교라는 말조차 성립될 수 없고,

캠프에서 먹었던 죽은 지금 내 입안에 담긴 고기 조각에 비하면 요리라 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그렇게 입안에 머금은 요리를 목구멍 너머로 넘기자,

제법 씁쓸한 안나 아주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반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성스럽기 짝이 없는 요리를 먹고 있는 내 모습에 대한 쾌감이 동시에 들기 시작했다.

사기와 기만은 이렇듯 달콤하기 짝이 없는 것이로구나.

한창 침착하게 식사를 이어가고 있는 와중,

곧 정문이 거침없이 발칵 열리고.

동시에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열렬한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환호와 함께 문 너머로부터 등장한 사람은,

빗물에 젖은 고급스러운 망토를 벗어 던진 채 우아한 발걸음으로 대번에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입니다, 앤서니.”

“앤서니! 다시 만나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앤서니, 당신을 보러 저 먼 땅에서 귀한 분이 오셨던데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거룩한 둘의 대화에 낄 수 있을까요?”

“앤서니, 내일 구름 위에서 저와 조금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야기 들었어요, 앤서니. 어제 북쪽 산맥에 주둔한 연합군 사령관을 만났다는 걸. 또 거대한 계약을 성사시키기라도 한 겁니까?!”

좌우에서 빗발치는,

한 사람에 대한 지대한 열망과 관심.

그러나 그 주인공은 일말의 관심도 없이,

오롯이.

정말 오롯이 날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햇살과도 같은 미소를 뿜어낸다.

강렬해 보이는 진한 금발 머리는 단 한 올의 이탈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말끔히 정돈되어 있고,

짙은 눈썹 아래 그림자 진 눈두덩이 속에선 부른 보석이 불꽃처럼 일렁거리며,

그 강인한 인상 아래 길게 뻗은 신장은 거대하기 짝이 없어 끝내 내가 있는 곳에 올라왔을 땐,

그와 시선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한참이나 위로 젖혀야만 했다.

“환영합니다, 빈센 씨. 앤서니 트와드입니다.”

그는 곧 새하얀 이를 씩 드러내며 금색 털이 듬성듬성 난 거대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런 그의 인사에,

나는 담담히, 또 나른히, 무던히.

그 손을 맞잡고 인사에 응했다.

“반갑습니다, 빈센입니다.”

이자가 바로,

앤서니 트라이던트의 수장.

“솔직히 말해 다르마야 가문에 대해선 동화 같은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지, 이렇게 접점이 생겨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 고향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직접 마주해 보신다면 그리 동화처럼은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언제 한 번 기회가 된다면 초대해드리지요.”

“설마요, 그 햇살을 평생 받아오며 살아오신 분이 이런 아름다움을 지니고 계시는데 어찌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꼭 초대해주십시오, 시간을 내서라도 가겠습니다.”

우리가 기만해야 할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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