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구름 위에서 (4)
“솔직히 다르마야 가문에 대해 궁금한 게 산더미 같습니다, 그 높이를 비유하자면 서쪽에 있는 룸푸느 산 만큼일 정도로요.”
“아버님도 참!”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고기를 썰던 트와드가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말에, 옆자리에 동석한 여인이 입을 가린 채 격식에 겨운 웃음을 내뱉는다.
그 직후엔 내 얼굴을 흘깃거리며 술잔을 들어 올리는 여인.
이에 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녀의 손에 들린 잔에 맞추어 부드럽게 술잔을 들었다.
물론 트와드에게 능청을 떠는 것도 놓치지 않고서.
“잘못하면 그 궁금증에 깔려 죽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면서 슬쩍, 그녀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술잔을 흔들었다.
그러자 여인은 금세 만족한 표정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서둘러 술잔을 기울인다.
트와드는 그런 둘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곤 흡족한 표정으로 포크에 찍혀 있던 고기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이쯤에서,
내가 물어봐 주는 게 예의겠지.
“하지만 그전에 제 궁금증을 먼저 풀어주셨으면 좋겠군요, 이 아리따운 분은 누구십니까?”
이미 그녀가 트와드의 딸인 것쯤은 알고 있지만,
이 자리는 그런 인지적인 문제로만 따지고 넘어가기 위해 마련된 게 아니다.
그가 3세계에서 찾아온 젊은 귀족과의 첫 만남에서 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는 건.
그만큼 나와 강한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뜻.
그러니 방금 그 질문은 그가 내민 의중에 대한 최고의 화답이 되는 셈이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트와드는 활짝 웃으며 옆에 앉은 여인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제 딸인 앤서니 에르니라고 합니다.”
그 소개에 맞춰,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농익은 여름을 탄 것처럼 진한 금발,
트와드를 닮은 푸른 눈동자.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슬쩍 숙인 채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 그대로 온실 속의 화초인가.
그러나 그 생각이 머릿속에 머물기 무섭게 비질라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래,
주연 하나로 사교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이가 바로 그녀로구나.
때마침 목이 타는지 에르니는 다시 술이 담긴 잔을 기울였지만 트와드는 그런 그녀를 가볍게 제지하며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트와드는 가문의 몇몇 뿌리를 썩게 만든 술을 질색한다 했었지.
어쩌면,
저 부녀가 가지고 있는 ‘상극’을 요긴하게 써먹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어서,
트와드는 고기 한 점을 더 썰어 입에 넣고는 그 상태로 게걸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긴 여정을 하고 오신 터라 피곤하실 테지만, 약간의 무례를 부려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그의 행동에 난 불편함을 느껴야 할까, 아니면 반갑게 동조해야 할까.
입안에 음식이 남은 채로 말을 잇지 않는 건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절.
그게 아니면 대충 빈센 다르마야의 성향을 주워듣고 한 행동일 수도 있지.
그 성향에 맞춰 자신이 이렇게 열려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걸 수도 있잖아?
“그렇게 급해 보이는 질문에 어찌 답하지 않겠습니까? 말씀해보십시오.”
그러나 난 약간의 불편한 뉘앙스와 함께 끝에 미소를 덧붙여 그 대답에 답했다.
빈센 다르마야가 제아무리 망나니라고 해도, 그 빌어먹을 예법의 기본은 지키려 한다는 것은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비록 비질라의 입으로 전해 들은 게 9할에 가까울지라도, 다르마야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가 그리 가볍지는 않다는 건 아주 잘 알 수 있었으니까.
곧 그런 내 대답에 그의 눈썹이 아주 잠깐 들썩였다.
“아버님, 너무 급해요.”
내 모습을 살펴보던 여인은 급하게 트와드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가볍게 나무랐다.
트와드는?
“이거 참,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빈센 씨 같은 귀인과 만날 기회가 또 어딨겠습니까?”
익살스럽군,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가진 남자다.
능숙하게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그는 대번에 진중한 태도로 날 대하기 시작했다.
“제가 주최하는 이 비밀스러운 행사를 어떤 방식으로 알게 되셨는지, 그리고 이 행사에 참여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트와드는 내게 시선을 집중한 채 식탁에 놓인 바구니 안에서 작은 과일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런 그의 질문에,
나는 제법 당당한 태도로 답했다.
“이 땅의 중립지역이라 불리는 곳은 제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곳이더군요. 말씀하신 ‘어떤 방식’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요.”
그 말에 트와드는 납득한 표정으로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 그런 흥미로운 것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해서 지금 이 자리에 트와드 씨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거고요. 중립지역에서 트와드 씨가 주최하는 행사보다 흥미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어 나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트와드 옆에 앉은 여인을 흘겨보며 씩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얇은 어깨가 살짝 놀란 듯 떨린다.
트와드는 내 말을 곱씹듯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이윽고 들고 있던 과일을 탐스럽게 한입 베어 물고는 흡족한 얼굴로 오물거렸다.
그리곤 고작 한입 베어먹은 과일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채 냅킨을 정돈하곤 자리에서 일어선 트와드.
“절대로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이 트와드가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그 말은 제 기대를 충족시킬 물건들이 경매로 나온단 말씀이시겠지요.”
살짝,
일어선 그의 시선에 맞추어 구슬리듯 입을 열자.
“물론입니다, 최고의 물건들을 소개해드리지요.”
트와드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피곤하실 텐데 제가 너무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있을 행사에서 단둘이 이야길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오늘 밤 모든 여독을 해소하시기를.”
이어 아쉬운 듯,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이렇게 환대해주시니 고맙군요. 내 구두에 묻은 중립지역의 질척한 진흙이 하룻밤 사이에 떨어져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거의 빈센에 빙의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화답했다.
마지막으로 트와드보다 더 아쉬운 표정으로 내게 끈적한 눈빛을 보내는 에르니와 눈 마주치는 것을 놓치지 않은 나는,
끝내 그들이 뒤돌아 밖을 나가고 나서야 작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도련님, 제 생각보다 훨씬 능숙하게 해내시는군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옆에 잠자코 있던 맷도 그제야 긴장 풀린 목소리로 내게 중얼거리듯 말을 걸어왔다.
그런 그에게 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뭐, 이런 것쯤이야.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지붕 아래서 배운 것들이니까.”
세공소에서 익혀야 했던 것들을 회상하며 돌려 말했다.
그 말에 맷은 잠시 먹먹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여유 있는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우린 좀 더 여유롭게 알록달록한 문명과 함께 식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 * *
서풍의 주인인 아들러는 우리가 식사를 끝마치기 무섭게 하룻밤을 지낼 방으로 안내했다.
유복한 자들의 떠듦 위를 걷는 듯.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면,
어둡고 긴 복도가 우리를 반긴다.
아들러는 복도에 들어서기 무섭게 자랑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이곳이 저희 서풍이 자랑하는 곳, 일명 ‘왕의 복도’입니다. 이 복도 전체가 단 하나의 원목으로 만들어졌지요. 2000년도 더 넘게 산 프렐리지아 나무를 두 난쟁이가 일 년에 걸쳐 만들었답니다.”
그 말에 시온은 못마땅한 얼굴로 뒤에서 투덜거렸다.
“몇몇 귀 큰 자들이 피눈물을 흘렸겠군.”
“대단한 박애주의자 납셨네요, 시온.”
이에 난 마치 자석처럼 그에게 비아냥을 덧붙인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가 했던 말을 곱씹어야만 했다.
저 원목의 출처는 분명 중립지역의 안야 숲이겠지.
전쟁으로 인해 삶의 현장을 잃어야만 했던 귀 큰 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이런, 제가 괜한 말을 늘여놓은 것 같군요.”
아들러는 머쓱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우리 눈치를 살폈다.
그 안절부절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맷이 헛기침을 하며 아들러를 닦달했다.
“사담은 거기까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그렇겠지요. 빈센 님 어서 안으로….”
금방 창백해진 아들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복도 끝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곤 다시 한번 내게 뒤통수를 보일 기세로 꾸벅 인사하더니 도망치듯 복도를 빠져나갔다.
이어서 내가 제일 먼저 방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시온과 맷이 잔뜩 경계하는 모습으로 두리번거리며 뒤따랐다.
그렇게,
철컥-
방문이 닫히기 무섭게,
맷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시온은 방금까지 엉거주춤하게 숙이고 있던 어깨를 활짝 켜며.
“이러다 담에 걸릴지도 모르겠어.”
익숙한 원래의 목소리로 푸념했다.
“디안, 완벽했어.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튜 아저씨는 곧바로 내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비아냥이 수준급이었어, 딱 빈센 다르마야가 내지를 법한 것들뿐이었지.”
시몬도 침대에 걸터앉기 무섭게 날 보곤 온건한 표정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난 지금까지 들이켰던 긴장을 일거에 내뱉을 수 있었다.
“상황을 정리해보자.”
매튜 아저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동시에 아저씨는 그 특유의 이지적인 눈빛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구름을 타게 되면 빈센에게 말을 걸어올 자들이 한둘이 아닐 거야.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거물들일 테지.”
“트와드를 좀 더 애태울 필요가 있겠군, 빈센의 이목을 끌기 위해 갖은 수를 쓰게 만들어야 하니까.”
“맞아 시몬, 적당히 내가 가려 받을 테니 디안은 오늘 했던 것처럼 그들과 대화하면 될 거야. 좀 더 접근하게끔 여지를 주면서 애태우면 딱 적당하겠군.”
“그들 중 하나라도 다르마야 가문과 접점이 있다면, 그땐 어떻게 하죠?”
“구름에 타고 있는 자들은 결국 트와드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귀족들과 사업가들일 뿐이야. 그런 부류들의 인맥은 굉장히 폐쇄적이지.”
매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몬이 자조적인 말투로 받아친다.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야, 한 지역의 유지인 자들은 그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울타리가 생기길 바라지 바깥으로 뻗어 나가길 바라지 않아. 그 폐쇄성 안에 군림하며 존재 자체가 합법인 무법이길 바라는 게 그들이다.”
“쉽게 말해, 그들은 트와드를 중심으로 뭉친 이곳의 유지들이란 말이야.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지. 바꿔 말하면 울타리 바깥엔 관심이 없다는 거고.”
무엇보다 그쪽 생리에 가장 빠삭하다는 조이가 직접 선별한 인물이니 지금부터는 의심조차 거두는 게 연기하는 데 더 도움이 되겠구나.
이어 시몬이 고개를 불쑥 내밀어 그 강렬한 눈썹을 움찔거리며 내게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도 울타리 밖에 있는 존재인 다르마야를 반기는 이유는 말 그대로 다르마야가 황금이기 때문이야. 그놈들은 울타리 안에 있지만, 가끔 울타리 밖에 놓인 먹이에 환장하며 꿀꿀대는 돼지 새끼들이기도 하거든.”
시몬, 그의 눈이 일순간 반짝인다.
“탐욕은 놈들을 배부르게 해주지만 동시에 유일한 약점이기도 하지.”
담담하게 듣고 있던 나는 그런 시몬의 말에 탄성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탐욕이 그들을 낚아챌 미끼가 되는 셈이로군요.”
“그래 디안, 정확해.”
“해서 디안, 너도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해보렴. 무엇보다 이 무대의 주인은 너니까.”
매튜 아저씨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트와드가 아닌 에르니를 자극하는 건 어떨까요?”
내 말에 두 사람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다.
“예를 들면?”
“에르니 앤서니는 사교계에서 주연으로 능통한 사람이에요. 또 제가 아는 빈센은 굉장히 방탕한 사람이죠. 그럼 빈센은 그녀에게 이런 제안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제안?”
“자기가 마신 술의 양 만큼 경매에 올라오는 물건을 사들이겠다고.”
그 말에 시몬이 손가락을 튕겼다.
“옳거니, 그걸 빌미로 갈등을 조장하면 되겠어.”
“거기다 트와드에게 빈센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에요, 그런 그가 내민 잔에 트와드는 마지못해 거기에 부딪힐 잔을 들어야 할 겁니다.”
이번엔 매튜가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트와드는 술을 질색하지만….”
“그렇죠, 탐욕에 못 이겨 술을 마시게 될 겁니다.”
“동시에 구름 위의 모두가 덤으로 취하게 될 것이고.”
“판단력이 흐려진 그들 사이에서, 빈센의 공언으로 인해 올라왔을 값비싼 경매품들을 가지고 나오는 거죠.”
내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시몬과 매튜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끝내 동시에 날 바라보며 감복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