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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28화 (28/365)

28화. 구름 위에서 (5)

“명심해, 넌 한낱 보석에 불과하다는 걸.”

매캐한 연초 냄새.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듯 극단적으로 짧은 머리.

그 아래, 끔찍한 그림을 그려놓은 듯 흉터가 가득한 얼굴 한 남자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다.

그런 그의 태도는 강압적이기 그지없다.

“넌 집 대문을 지키는 개와 다를 게 없어, 그래도 너무 절망할 필욘 없을 거다. 적어도 그 개들에게 허락된 공간보단 네게 허락될 공간이 더 클 테니까.”

말을 마친 남자는 액체가 가득 담긴 두꺼운 쇠 컵을 내게 내밀었다.

컵에선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 이젠 이 컵만 봐도 네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겠지?”

좀 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날 노려보는 남자,

그런 그에게 난 복종하듯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한다.

“제 가치를 증명할 시간이에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맞은편 남자는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정확해! 어차피 늘 먹었던 거잖아? 단지 그 단순한 행위만으로 넌 소유주를 만족시킬 수 있어. 주인에게 뼈다귀를 받아 꼬리치고 아양을 떠는 개들처럼!”

이윽고,

남자는 책상 위에 놓인 컵을 내 쪽으로 더욱 깊숙이 내밀었다.

난,

그 컵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내 몸은 보석 덩어리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다시 나는 망설임 없이 컵 속에 담긴 내용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혀를 휘감는 꾸덕한 감촉을 제외하면,

그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목구멍을 따라 흘러 들어간 유리액은 그렇게 서서히 내 몸 안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맞은편 남자는 그 광경에 마치 홀린 듯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지 않나? 다섯 번의 시험을 거쳐 세공된 보석은 말이야.”

그 감탄에 양옆에 멀찌감치 서 있던 장정들도 넋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남자의 눈동자가 붉게 변한다.

그 색은 내가 방금 들이켰던 유리액과 똑같은 색이었다.

“우주에 흩뿌려진 붉은 성운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군.”

그는 감탄을 마치기 무섭게 날랜 손짓으로 내게 일어서라 명했다.

해서 그의 지시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었지만, 이미 그건 내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날 철저히 물건으로 취급하는 그들의 시선은 내게로 하여금 그 어떤 부끄러움도, 치욕스러움도 들게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저 압도적인 무기력감과,

허무함만이 느껴졌을 뿐.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내 눈 주위에 붉은 기운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들이킨,

붉은 유리액이 내 몸에 거의 다 퍼졌다는 뜻이겠지.

그건 확실히 일반적인 보석에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잘 다듬어진 다이아몬드가 눈앞에서 농염한 붉은 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그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일 테니까.

거기다 난 밤하늘을 품은 보석이었기에,

이렇듯 형형색색의 유리액은 내 몸속에서 별이 되고 은하로 꽃피웠으니 가히 그들이 해갈하려 발광하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제레니아의 서곡을 불러 봐.”

남자는 이제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고 한층 더 편안한 자세로 내게 명령하듯 말했다.

제레니아의 서곡.

내 소유주를 위해,

뜨거운 유리를 코로 흡입하면서 강압적으로 외워야만 했던 수많은 노래 중 하나.

“최대한 여리게, 네 세공된 목젖을 최대한 굴리면서.”

거기에 덧붙여 연기까지 가미하라는 것을 보니까.

이들은 나라는 물건의 품질을 철저히 검사하려는 거구나.

짧게 심호흡을 하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린 뒤.

천천히 남자 앞에서 운을 뗀다.

“제레니아, 당신은 날갯짓이 그려낸 바람결처럼.”

첫 가사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매우 만족한 얼굴과 함께.

“날리는 꽃잎이 쓰다듬은 바람결처럼.”

동시에 내겐 역겹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주실 수는 없나요?”

내가 내뱉는 음률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남자.

“나는 언제나 그대 날갯짓에 무너지는 바람, 그대 향기에 망가지는 바람.”

순간 슬픔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감정이 실린다.

“멀어지는 건 왜 그대의 몫인가요, 다가가는 건 왜 나의 몫인가요. 대답해 주오, 제레니아.”

천천히,

노래를 끝마치자.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로 환호했다.

* * *

짝,

짝짝.

귓가를 때리는 사나운 박수 소리.

그것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는 안개 속 암초처럼….

느닷없이 강렬하게.

짝!

“헉…!”

고막을 때리는 강렬한 박수에 눈이 팍 떠졌다.

그런 내 눈동자에 비친 것은,

“디안, 일어날 시간이야.”

햇살에 반쯤 물든 매튜 아저씨의 너그러운 얼굴이었다.

그 뒤편으론 흐릿하게 옷들과 씨름하는 시몬의 모습도 보이는구나.

그제야,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결코 지금의 내가 간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

꺼트린 촛불이 감추고 있었던 기억 일부가 분명해.

그것도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어.

“아직도 넋이 나갔군, 하기야 들판 위에서만 자다가 처음으로 앰페르제 침대를 겪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매튜 아저씨의 말에 어느새 옷을 다 입은 시몬이 특유의 호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매튜.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리 가족 모두 엠페르제 침대 위에서 떵떵거리며 살 테니까.”

이에 매튜 아저씨가 허탈한 표정으로 푸념한다.

“그래, 이번 일이 안전하게 끝난다면. 그리고 트와드가 우릴 추격하지 않는다면.”

하지만 시몬은 더욱 쾌활한 목소리로 매튜를 다독였다.

“그 누구도 우릴 쫓지 못할 만큼 남쪽을 향해 이동하기만 하면 돼. 세간의 소문조차 우릴 쫓지 못해 흩어질 때까지.”

그 말에 매튜 아저씨가 그제야 피식 웃는다.

“테리라스까지 가면 정말 그럴지도.”

“테리라스 좋지! 햇살 아래 찐득한 땀을 흘리며 시원한 에일을 들이키자고.”

잠자코 그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렴풋이 그들이 말하는 그 나른하고 여유로운 감정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절로 입가가 올라가는구나.

“자, 디안. 아니 이제 다시 도련님으로 불러야겠지.”

“네, 매튜 아저씨. 맷.”

내 대답에 그는 말없이 내게 윙크한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이미 시몬과 매튜가 한바탕 난리를 쳐놓은 욕실로 향했다.

들판에선 결코 맡아볼 수 없었던 수십 가지의 향초 냄새가 내겐 더없이 자극적이구나.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다,

벽 한쪽에 놓여 있던 전신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그 거울 앞에 우뚝 선 나는.

맞은편에서 날 바라보는 이를 찬찬히 살폈다.

그건 한낱 보석 따위가 아니었다.

디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만 보였을 뿐.

하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내 몸엔 유리의 시험으로 인한 후유증이 넘쳐났다.

기름기라곤 하나도 나오지 않는 몸에, 햇살 아래 열흘을 서 있어도 창백하기만 한 피부, 또 자라지 않는 손발톱.

손으로 세공한 것 같은 인위적인 동공의 모양까지.

다름은 느껴보지 못한 자들에겐 축복처럼 보이지만, 겪고 있는 자들에겐 저주처럼 느껴질 뿐이다.

* * *

“이제 출발해 볼까요, 도련님?”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말끔한 모습을 한 맷이 내 앞에 고개 숙였다.

그런 그의 옆엔 시곗줄을 찰랑거리며 구부정하게 서 있는 시온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난 그 둘에게,

“출발하지.”

거만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둡고 거대한 복도를 지나, 어제 트와드와 대면했던 거대한 홀을 거쳐 출구로 향하기 무섭게.

서풍의 주인인 아들러가 우릴 발견하곤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빈센님! 오 이런, 어제는 제가… 그러니까 결례를 범한 것 같아 밤새 마음이 불편해 밤잠까지 설쳤답니다.”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도 못 마주치고 쩔쩔매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더군다나 귀한 손님께 제대로 된 대접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아….”

“우리 도련님께선 중요한 일을 앞두고 계실 땐 조용히 지내시길 선호하십니다.”

맷이 차분한 말투로 대답하자 아들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 신세는 잊지 않겠습니다. 서풍의 주인 아들러 씨. 도련님께서는 기억력이 아주 좋으시거든요.”

이어지는 맷의 말에,

아들러는 순식간에 화색이 되어 지나치는 우리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그렇게 밖으로 나서자,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마차 뒤편엔,

제법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맥레인, 엔제이.

안드레, 촙.

그들 역시 내색하진 않았지만 우릴 보곤 두 눈을 반짝여왔다.

“다들 늦지 않게 왔군. 하긴, 미천한 놈들이 약속이라도 잘 지켜야지.”

시온이 작게 이죽거리자.

“도련님께서 보는 눈이 있으신 거지.”

맷이 빈센을 두둔한다.

“도련님, 간밤에 잘 지내셨습니까?!”

제일 먼저 내게 달려온 이는 안드레, 안이었다.

“안, 어땠어? 문명이 살아 숨 쉬는 도시에서의 하룻밤은?”

“밤중에도 워낙 밝아서 별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지요, 소감을 물으신다면 예, 아주 끝내줬습니다!”

“아직 만족하긴 일러, 지금부터가 진짜일 테니까.”

“정말입니까, 도련님?!”

평상시였으면 장난기 많은 안드레가 내 어깨를 툭 쳤을 거다.

하지만 그는 내 상상 이상으로 능청스럽게 연기력을 뽐내고 있었다.

촙, 그러니까 칩은 뭐 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가 맡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고.

가장 의외인 것은,

가족들 모두가 살짝 무시하는 엔제이보다 맥레인이 연기를 굉장히 못 한다는 것이었다.

“도련님.”

아니, 날 우대해야 한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일지도.

그는 짤막하게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하면서도, 눈썹을 심히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맥, 얼굴 펴. 네 그 험악한 얼굴은 이런 문명 속에선 안 어울리니까.”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니,

나로선 철저하게 즐길 수밖에.

내 핀잔에 그의 이마가 심히 움찔거렸다.

거기에 난 한술 더 떠,

마차에 오르기 직전 그를 향해 툭 던지듯 말을 이었다.

“처신 잘하라고, 안 그럼 네가 구름에 올라탈 일은 없을 테니까.”

짜릿하다.

하지만 짜릿한 만큼 무섭기도 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저 양반이 내게 할 짓을 생각하면.

“네, 도련님. 처신 자알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마차에 모두 올라타자, 앤서니 가문 측 인물인 기수가 묵묵히 고삐를 휘둘렀다.

* * *

이동하는 내내 우리는 말을 아꼈다.

저 앞에 마차를 모는 이가 외부인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서인지 시온와 맷은 일부러라고 해도 될 만큼 재물에 대해서 노골적인 말을 주고받았다.

뒤따라오는 금화의 양이 너무 많아 마차를 늘렸다는 둥, 이미 빈센의 지시로 금화를 실은 또 다른 마차가 이쪽으로 출발했다는 둥.

난 그 사이사이 공백에 채워진 침묵 속에서,

짐칸에 불편하게 앉아 있을 네 사람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에 처연히 대처하겠다는 결심을 다잡았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마음속이 정돈되고 난 뒤부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풍경은,

내겐 ‘자유’였다.

비록 지금 나는 자유롭다 할 수 있겠지만.

아직 자유에 대한 그 원초적인 갈증이 해갈된 것은 아니다.

그 오랜 세월에 비하면 내가 만끽한 자유는 티끌에 불과했으니까.

해서 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 갈증을 해소한다.

말의 발굽에 길게 늘어선 풍경도, 내 발걸음에 따라 숨 쉬듯 움직이는 풍경도.

정체된 눈동자 안에 고스란히 담긴 계절 묻은 풍경도.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말의 발굽이 멈추었다.

죽 늘어지던 풍경도 정체되었다.

기수는 바쁘게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가 타고 있는 객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구름 닻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리곤 깃 달린 모자를 벗어 우리에게 인사한다.

그의 안내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자,

기막힌 광경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산 중턱 계곡에 괴어있는 거대한 한 척의 배.

선체 하부엔 이미 여러 번의 비행을 마친 듯, 조각조각 난자된 구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마치 해초와 조개가 다닥다닥 붙은 것처럼.

상갑판엔 금과 은으로 칠해진 장식들로부터 빛이 쏟아져 내렸다.

배 한 쪽에 내려앉은 대리석으로 깎은 계단엔,

이미 많은 이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마차에서 내려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이동하는 그들의 행렬은.

화려함이라는 단어를 가시화한 것 같았다.

이내,

나는 그들 무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를 선두로 맷과 시온이, 그리고 나머지 네 사람이 그 뒤를 따른다.

이에 맞춰 우릴 태우고 온 기수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빈센 다르마야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된다.

허나 내 어깨는 위축되지 않는다.

도리어 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나는 그들 사이를 거쳐 거대한 구름을 향해 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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