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구름 위에서 (6)
크림색 옥 바닥.
천장에 매달린 오색 샹들리에.
홀 가운데 솟은 거대한 나무.
건치를 드러내며 웃는 유지들.
그 웃음에 견줄 만큼 반짝이는 액세서리들.
한쪽 벽면엔 앤서니 트라이던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무기들이.
그 반대쪽 벽면엔 앤서니 가문의 초상화가.
사치스러운 화약이 담긴 총으로 무장한 경호병은 사방에.
총이 아닌 곡검만으로 무장한 친위대는 곳곳에.
“큰 구름, ‘마그나 누베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빈센 씨.”
그 가운데.
테두리를 금으로 마감한 코트를 휘날리며 다가오는 남자.
앤서니 트와드.
그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그 모든 반짝이는 것들의 초점이 내게로 향했다.
“이렇게 환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트와드 씨.”
하지만 그러한 반짝거림에 홀라당 타버릴 내가 아니다.
일찍이 그보다 더한 반짝거림을 삼켜야 했던 내겐 이쯤은 일상보다 더 무던한 것이리라.
내 당당한 태도에 트와드는 흡족한 표정으로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순간 놀란 얼굴로,
“이거 참, 이 중요한 순간에 에르니는 어디로 간 건지!”
허공에 바삐 손짓하기 무섭게 저 멀리서부터 하인 둘이 총총 달려와 그 앞에 고개 숙였다.
“에르니는 지금 뭐 하고 있지? 얼른 데려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트와드의 명이 떨어지자 또다시 부리나케 달려나가는 두 사람.
“이해해 주십시오. 제 딸아이가 어제 귀공을 뵙고 난 뒤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밤잠까지 설쳤지 뭡니까.”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천연스럽게 대꾸하자 그의 볼에 매력적인 보조개가 만개한다.
“병이라면 병이겠지요, 그것도 치료제가 없는….”
이쯤에서 그에게 달콤한 것을 내어주어야겠지.
“부디 오늘 저를 만나 그 병이 호전되었으면 좋겠군요. 안 그래도 에르니님과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조금 더 익살스럽게 해 볼까.
“이런, 제가 너무 서둘렀군요. 트와드님의 허락조차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그 말에 트와드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빈센님께 허락이라니요! 저는 귀빈께 그런 무례한 단어는 붙이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앤서니 가문의 관대함을 느끼는군요. 어제부터 신세만 지는 것 같으니….”
난 일부러 뜸을 들인 뒤 제법 날카로운 눈으로 트와드를 보며 은밀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번 행사에서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트와드는 애써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 아닌 듯싶다.
내 말에 호방하게 웃음 짓는 것을 보면.
세공소에 있었을 적, 숱한 세공사들이 그런 부류였었지.
시험을 마치고 다듬음까지 마친 날 보며 탐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던,
그런 부류.
“제가 귀빈을 너무 오래 세워둔 것 같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트와드의 안내에 나는 자연스럽게 맷에게 턱짓했다.
“맷, 애들 데리고 여길 천천히 구경시켜 줘.”
그런 내 지시에 트와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날 보며 은은한 미소를 흘렸다.
내가 그와 독대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랬으면 다행일 텐데.
그러나 의심은 거둘 수 없었는지,
“저들은 누구입니까?”
옥 바닥 위를 또각또각 걸으며 내게 묻는다.
“중립지역에서 만난 자들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중립지역은 천박하고 위험한 곳이니까요. 충만한 돈만 있다면 그런 중립지역에서 제 몸을 지켜줄 실력자를 구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더군요.”
내 말에 트와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그곳만큼 자극적이고 자유로운 곳도 없습니다.”
“하하, 맞습니다. 하지만 트와드님께서 절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중립지역이고 뭐고 다 제치고 달려왔을 겁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다르마야의 가주님과도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리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이곳에 온 것이니까요.”
트와드는 감복한 듯 두 눈을 반짝였다.
“자, 그럼 이제 딱딱한 얘기는 잠시 뒤로 물려두고. 구름 위에 있을 행사에 대해 알려드려야겠지요.”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트와드님,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이렇게나 거대한 배라니! 심지어 홀 바닥 전체를 앰버스 산 옥으로 마감하시다니요. 예술적인 감각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트와드가 걸음을 뚝 그친다.
“세상에, 드디어 예술적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군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제 예상보다 보석에 대해 더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잘 알 수밖에 없지.
“다르마야라는 이름으로 태어나는 순간, 세상 모든 반짝거리는 것을 접하는 건 숙명과도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냥 아는 것과 심도 있게 아는 것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제 안사람은 너무 과하다지 뭡니까!”
“이미 안주인님 그 자체로 완벽한 보석일 텐데요. 투박한 원목으로 배를 지었어도 충분했을 겁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홀에 심겨있던 나무도 예사롭지 않던데요. 보석을 거름으로 주고 계신 것 같은데.”
“잘 아시는군요? 저건 ‘신티아트’종입니다.”
딱 한 번 본 적 있다.
밤하늘에 평생을 갇혀 살기 전, 세공소 마당에 우뚝 서 있었지.
“저리 장성하게 자란 것을 보니 제 마음이 다 먹먹해질 정도입니다.”
“이거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제가 귀공께 흠뻑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귀공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어요.”
“하하, 그렇습니까?”
그래서,
언제까지 내 옆에 붙어 있을 생각이지 트와드?
“아버님!”
홀을 벗어나 연회장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멀리서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와중에도 연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다각다각,
바쁘게 옥 바닥 위를 구르는 발소리.
그 위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달려온다.
절묘하게 드러난 윗가슴과 새벽녘에 젖은 능선과 같은 쇄골은 마치 날 향유 하려는 듯 노골적으로 반짝였다.
“에르니, 체통을 지켜라.”
그 모습에 트와드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에르니는 내게 모든 신경이 가 있었는지 애써 무시하고 그대로 내 앞에 멈춰 섰다.
“반갑습니다. 빈센님.”
“안녕하십니까. 에르니양.”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감미로운 목소리로 화답하자,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붉힌 채,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한 에르니는 그렇게 무릎을 살짝 굽힌 채 내게 가녀린 손을 내밀었다.
난 그런 그녀의 손을 주저하지 않고 휘어잡아,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세공소의 장에게 복종의 의미로 했던, 손가락에 끼워진 인장과 하는 입맞춤보단 적어도 낫다고 할 수 있겠네.
“자 그럼, 저는 스리슬쩍 빠져보겠습니다.”
씩 웃는 와중, 찰나의 순간 에르니를 보며 단호한 얼굴로 꾸짖은 트와드는 홀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움직였다.
“빈센님, 받으세요.”
트와드가 사라지기 무섭게 에르니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손가방에서 나비 모양 가면을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건…?”
“곧 있을 행사에 필요한 물건이랍니다. 제가 손수 만들었지요.”
“영광입니다. 그런데 곧 있을 행사에 가면이 왜 필요한지 여쭈어도 될까요?”
내 말에 에르니는 은밀한 표정으로 귓가에 속삭이듯 대답했다.
“법 없는 땅 위에 증인은 없다. 목격자만 있을 뿐.”
“…흥미롭군요.”
에르니는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끈적한 시선으로 내 몸을 핥듯이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트와드, 에르니.
앤서니 가문으로부터 뭔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로군.
각설하고,
본론을 꺼내자.
“참, 에르니님께서는 주연 쪽으로 능통하시다 들었습니다.”
“어머, 그걸 어떻게?”
“중립지역에선 지나간 바람마저 돈을 받고 팔더군요. 트와드님께서 절 초대해주신 순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소문을 사들이면서 알게 됐습니다.”
“그럼 더 잘 아시겠군요? 저희 아버지께서 술을 지독히 싫어하신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아버님마저도 앞으로 있을 따님의 경사 앞에선 기쁨의 한잔 정돈 걸치실 수 있겠지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에르니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에르니님, 가문과 가문의 결합엔 개인의 의사보다 집단의 의사가 중요시되곤 합니다. 저는 그런 방식을 혐오하지만…, 기막히게도 어떨 땐 개인의 의사와 집단의 의사가 같을 때도 있는 법이지요.”
그녀의 큰 눈망울을 보며 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입안에서 지독히 씁쓸한 맛이 난다.
그러나 난 시몬 바스티유의 일원이자, 그들의 가족.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제법 무례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좋아요, 좋아요. 좋고 말구요.”
에르니는 득달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귀빈 여러분, 저희 마그나 누베스는 지금 하늘의 일부분이 되기 위해 닻을 올리고 골짜기를 벗어납니다.]
연회장을 가득 메우는 목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짠 듯이.
가면을 꺼내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
에르니 역시 붉은 나비 모양 가면을 쓴 채 내게 속삭였다.
“그럼 밑에 층에서 기다릴게요. 붉은 나비를 찾으세요.”
이내 그녀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도련님?”
그리고 이번엔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스꽝스러운 개 가면을 쓴 그 남자는,
“맷?”
“시종들은 이런 식으로 티가 나는 가면을 쓴다더군요.”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나도 곧장 에르니가 주었던 나비 가면을 썼다.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그래, 이곳에서 하는 행사가 뭐든 적당히 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되겠어.”
“좋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알리죠.”
“그런데, 저들이 말하는 행사가 도대체 뭔지 맷은 알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맷의 입술이 일순간 움찔거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면을 뒤집어쓰고 하던 일들을 생각하면, 정상적인 일은 아닐 거라 확신합니다.”
저도 동의해요. 매튜 아저씨.
어느새 거대한 배는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옥 바닥 위론 바깥에서부터 흘러들어온 구름 조각들이 짙게 깔려 정말 말 그대로 구름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오색찬란한 샹들리에 아래 펼쳐진 구름,
그리고 그 구름 위에 서 있는 가면 쓴 자들.
무대의 막이 올랐으니,
이제 그 첫 무대가 펼쳐지는 순간이리라.
그런데 그 첫 무대는.
내가,
아니 모두가 예상하던 것들보다,
지극히 ‘이상’의 것들이었다.
[마그나 누베스는 신성한 문명의 하늘에서 벗어나 야성적인 하늘로 들어섰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철저한 목격자가 되시길.]
배는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남자의 목소리 뒤로.
거대한 연회장에서 흐르던 기류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나타난 하인들의 복장은 외설적이기 그지없었고, 유려한 가면을 쓴 몇몇은 그런 외설적인 복장의 하인들을 끼고서 입에 담기도 힘든 애무를 즐겼다.
“빈센씨, 지금부터는 귀족이니 기업가니 하는 허울은 벗어던지십시오. 이 순간, 빈센씨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한들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이는 없으니까요.”
확 바뀐 말투로 돌아온,
공작새 가면을 쓴 트와드.
그가 본능적인 말투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을 잇는다.
“무법의 만찬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홀 구석에서부터 벌거벗은 두 남자가 장정들의 손에 이끌려 나온다.
그들은,
지극히, 지극히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광대 가면을 쓴 이가 난입해 게걸스러운 말투로 장내를 압도한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그들의 ‘열정’을 보게 되실 겁니다. 평생을 수확에 몸 바쳐 온 그들이 내뱉을 새로운 열정의 향연, 기대하십시오!”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와!!]
사방에서 광기에 가까운 환호가 터져 나왔다.
“빈센씨, 좌측에 서 있는 사람은 제 땅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입니다. 단란한 가정을 꾸린 믿음직스러운 40대 가장이지요.”
난 그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측은 마찬가지로 라이존트 가문의 영지에서 작은 밭을 일군 자입니다. 이번에 아내가 임신했다고 하니 기쁜 일이지요.”
에르니가 했던 그 말.
그 말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오늘, 이들 중 살아남아 가정의 품 안에 돌아갈 사람은 단 한 명뿐입니다. 금화 40개, 오늘날 그들의 열정은 그 가격에 낙찰되어 스러지고 불탈 겁니다.”
두 남자는,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다.
끝내 상황을 파악했는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럼, 빈센씨. 저들이 만들 열정의 ‘목격자’가 되시길.”
[법 없는 땅 위에 증인은 없다. 목격자만 있을 뿐.]
트와드가 말한 그 행사라는 것은.
무법을 위시한 유지들의 놀음
권력을 향유 한 자들의 유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