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구름 위에서 (8)
신뢰를 바탕으로 휘두르는 혓바닥은 무섭다.
그런 그 신뢰가 거짓된 것이라면,
그땐 단순히 무서운 것만으론 그치지 않는다.
지금이 그러하다.
“8만.”
있지도 않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액수가 내 혓바닥 위를 구른다.
그때마다 저들은 진짜로 있는 것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열광했다.
내 옆에서 마른 침을 삼킬 뿐인 트와드에게선,
그전까지 보여줬던 냉철하고 이지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도,
내가 부른 금액에 덤벼들지 않는다.
모두 기대하는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팻말을 내버리거나, 소매 속에 숨길 뿐.
이제 이건 경매라고 부를 수 없다.
그래,
이건 내가 그들에게 보여주는 공연이다.
공연의 제목은,
돈지랄.
그리고 그 공연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단 하나,
결실을 얻고 싶다면 나를 빨아라.
“빈센 다르마야님께 낙찰되셨습니다!”
경매인의 호쾌한 선언에 주위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개중엔 기립 박수를 하는 이들도 있다.
트와드는 유리잔에 가득 담긴 주스를 목구멍에 때려 부은 뒤 떨리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직 물건들이 많이 남아있겠지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에게 묻자, 트와드는 반짝이는 옥 단추를 하나 풀며 혓바닥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물론입니다, 절대로 실망하실 일 없을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랴부랴 시온이 우리 쪽을 향해 달려왔다.
있지도 않은 내용으로 보낼 리 만무한 전서구를 급히 보낸 척하면서.
난 그런 그에게 다시 거만한 손짓을 보냈다.
“시온, 다시 전서구 하나를 보내.”
“그게 무슨…?”
시온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덩달아 옆에 앉아있던 트와드 역시 눈썹을 치켜뜬 채 날 바라보았다.
“금화 50만 개를 더 준비해 놓으라고.”
“도련님…, 도대체…?”
“하라면 해, 아니면 정확히 선을 긋던가. 네가 모시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시온이 내게 읍소하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럼 내 말대로 해, 아니면 너한테 일일이 내 야망을 드러내 줘야 하나?”
“… 아닙니다.”
시온은 표정을 굳힌 채 다시 전서구를 보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자연스럽게 트와드와 눈을 마주쳤다.
“비…빈센님, 금화 백만 개라뇨…?”
“과연 포부가 크시군요. 백만 개로는 부족합니까?”
“아…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닙니다!”
더 헝클어져라,
내가 주무르는 대로 어지럽혀져, 트와드.
“이쯤 되면 제 결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실 수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빈센님.”
트와드는 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앞에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쯤에서,
트와드에게 진하게 우려낸 고취 한 방울을 넣어줘야겠지.
“트와드씨, 우리 관계를 똑바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군요. 전 트와드씨와 상하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동업자가 어떻습니까? 저는 트와드씨와 동등한 관계에 놓인 동업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 이런…. 빈센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트와드의 두 눈이 석양빛 조명에 물들만큼 촉촉해졌다.
그런 그를 향해 씩 웃어 보인 나는,
오매불망 나만을 기다리는 경매인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12만.”
그러자 경매인은 마치 뒤로 넘어갈 듯 허리를 꺾은 채 환호성을 질러댄다.
그렇게 한창 여러 사람의 환호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가던 와중, 트와드는 제법 조바심이 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빈센님 저는 사업가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 전에 셈부터 하는 사업가 말입니다.”
“그래서요?”
“빈센님께서 성의를 보여주셨으니, 저도 그에 걸맞은 것을 보여 드려야 셈이 맞지 않겠습니까?”
얼른 더 말해 봐, 트와드.
“잠시 쉬는 시간을 갖도록 하지요, 겸사겸사 저와 둘이서 나눌 대화도 슬쩍 풀어보고요. 그리고 다시 경매를 재개하겠습니다. 보여주신 빈센님의 성의에 걸맞은 물건을 보여 드려야지요.”
그의 말에 난 말 없이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곧,
트와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위로 번쩍 들어 흔들었다.
그러자 한구석에서 유리병을 들고 있던 시종이 얼른 그것의 뚜껑을 닫아버린다.
동시에 사그라드는 석양빛 조명.
이어서 경매인이 트와드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장내를 가득 채웠다.
“중천에 뜬 빈센님이란 태양이 너무 뜨거워 잠시 열기를 식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경매가 잠시 중단되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홀 내 수많은 이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빈센님!”
“잠시 제 이름이라도 알려드릴 시간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쪽을 조금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방금까지 가면을 쓰고 무법을 반찬 삼아 유희하던 자들이 지금은 가면을 벗은 채 내게 시선 한 번 받기 위해 애걸복걸하고 있다.
트와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려는 듯,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로 그들을 향해 쏘아붙이기 바빴다.
“어찌 이리 무례하게 행동하는 거요?! 이러면 빈센님께서 우릴 뭐라 생각하시겠냐는 말이야!”
그러자 겨우 진정된 좌중이 뒤로 물러나고,
그 틈에 트와드는 내 등에 조심스레 손을 얹은 채 쫓기듯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그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돼지 새끼들이 따로 없군. 트와드님을 봐서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어련히 내가 알아서 할 것을, 쯧.”
내 이죽거림에,
트와드는 그저 식은땀을 뻘뻘 흘릴 뿐이다.
그렇게 트와드를 따라 걷다가 옥 벽 한쪽에 도달하자, 그는 대뜸 멈춰 서서 벽의 특정 부분에 손바닥을 얹었고.
이에 맞춰,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은밀한 격실이 열렸다.
“이곳이라면 그 누구도 빈센님을 방해하지 못할 겁니다.”
“도련님!”
트와드의 손짓에 따라 격실에 입장하기 직전,
뒤에서 나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
“시온?”
“맷은 도련님의 호위들을 살피기 위해 움직인다더군요, 지금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시온의 말에 트와드는 괜히 기침을 내뱉으며 불편한 기색을 내뱉었다.
하지만 난 그런 트와드를 향해 손을 펼쳐,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온 역시 제가 설득해야 하는 사람 중 하나라서요.”
그를 제지했다.
“아직 정확히는 제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렇지 시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도련님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자리라면 신하 된 자로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동행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당신 같은 사람을 괜히 내게 붙여줬겠냐 만은…, 방금 한 말은 꽤 듣기 좋았어.”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래서, 트와드씨. 이런 이유로 그도 같이 합석해야겠습니다. 어쨌든 지금부터는 엄연히 제 이름을 걸고 할 이야기라서요.”
시온과 나와의 진지한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트와드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은밀한 격실 문을 활짝 열었다.
그렇게 들어간 격실은 제법 넓었다.
그리고 단순했다.
바깥의 그 화려하기 짝이 없는 장식들과 비교하면 굉장히 단출해 보일 정도로.
다만,
거대한 테이블 뒤편, 벽에 장식되어있는 것은 절대로 가볍게 보고 넘길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내 눈빛을 읽었을까,
트와드는 얼른 벽 쪽으로 다가가 늠름한 자태로 장식되어있던 걸 두 손으로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어떻습니까? 저희 가문의 가보입니다.”
“대단하군요.”
빈말이 아니다.
전체가 옥으로 이루어진 그 물건은 방금 구름에 걸친 봉우리에서 수확한 과실처럼 탐스러워 보였다.
마찬가지로 감탄하던 시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머스킷이군요.”
“이런, 빈센님의 보좌관께서 보시는 눈이 있으시군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물건입니다, 용의 시대를 주름잡던 무기니까요.”
“하! 맞습니다! 이놈은 얀덴의 작품인 다섯 가지 줄기 가운데 첫 번째죠. 후미장전식으로 제작된 유일한 무기로 천재적인 얀덴의 감각이 집대성된 물건이기도 합니다.”
“앤서니 가문의 건실함을 증명하는 증거로 손색이 없겠습니다.”
시온의 말에 트와드는 정말 기쁜 표정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뭐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이어서 트와드는 들고 있던 머스킷의 개머리판을 우리에게 내밀더니 그 끝에 달려 있던 작은 뚜껑을 슬쩍 열어젖혔다.
그러자 안쪽에서 보랏빛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이건…?!”
시온이 놀라며 재차 묻자,
트와드는 얼른 젖혀진 뚜껑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
“발렉손의 숨결입니다. 이제 세상에 ‘일곱 숨’ 정도밖에 남지 않은 화약이지요. 이 머스킷 안엔 ‘반 숨’ 분량의 화약이 들어있습니다.”
들어본 적 있다.
맥레인이 내게 짧게나마 화약에 대하여 설명해줬을 때 들었던 이름.
그 가치가 대단하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어.
그런데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거기다 세는 단위마저 특별하다.
숨이라니.
가늠해 보건대, 진정 용이란 존재의 숨결이란 말인가?
“이런, 저 혼자 신나서 잡설을 늘어놨군요. 죄송합니다, 빈센님.”
“아닙니다, 좋은 구경거리였어요.”
“자, 그럼…, 빈센님.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빈센님께서 제게 들려주실 이야기가 무엇인지 제 머리론 도통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그의 물음에 나는 가죽 의자에 한껏 몸을 기댄 채 턱을 괴었다.
“트와드님.”
그리고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는 이곳에서 둥지를 틀 생각입니다.”
“둥지라 하시면…?”
“기반 말입니다.”
그 말에 트와드와 시온은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둘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귀족에게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늦음입니다. 그건 일종의 저주 같아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낙인처럼 따라다니지요.”
“말씀하시는 게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 말씀에 통감합니다.”
“그래서 그 낙인을 좀 떼볼까 합니다. 그렇다고 다르마야의 서열 싸움에 개입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쨌든 전 형제자매 가운데 가장 약하니까요.”
트와드는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경청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 대고,
나는 가증스럽게 연기를 이어갈 뿐이다.
마치 세공소에서 필사적으로 노래 부르듯이.
“전 다르마야 가문의 서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종래엔 가족 누구도 날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만큼.”
“도…도련님?!”
“이제 너도 잘 알겠지? 내 계획을?”
“너무 무모합니다…!”
“무모해도 돼,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으니까. 실패는 돈으로 사는 거야. 성공도 돈으로 사는 거고.”
“형제분들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가만히 있을 거야, 그들은. 당장 그 자리를 보존하고 가꾸지 않으면 다른 형제들이 넘볼 테니까. 그걸 기회 삼아 중립 지역을 유랑한단 핑계로 나왔으니.”
트와드는 내심 감탄한 표정으로 날 우러러봤다.
“해서 트와드씨, 당신이 제 모든 일의 시작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유망한 군수업체와 돈 많은 가문의 결합은 바꿔 말하면 무궁무진한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듭니다.”
“그래서, 그 시작을 대체 어떻게…?”
이제 순수한 의문을 담아 내게 묻는 트와드,
그에게 난 당돌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말한다.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에르니양과 혼인하겠습니다.”
아, 트와드.
회심의 미소를 짓는구나.
“오늘 있을 경매 끝에, 예정에 없을 잔치가 생기겠군요.”
내가 할 말을 트와드가 대신해주는구나.
그리곤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머스킷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그것을 벽에 다시 걸어놓고서.
내게 불쑥 손을 내민다.
“두 가문의 결합을 축하하며.”
“장대하게 오를 서막을 위해.”
난 그 손을 재빨리 붙잡아 들었다.
여기까지가,
비질라.
그녀가 공들여 만들어준 빈센 다르마야의 이야기.
이 이후부터는,
오롯이 내 재량으로만 이끌어야 한다.
“그럼, 에르니와 대화를 좀 나누시다 오시지요. 경매 준비는 여기 계신 보좌관님과 하겠습니다. 가보를 보시는 눈이 탁월하신 것을 보니 저와 말이 잘 통할 것 같군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격실 밖으로 걸음을 옮겨,
재킷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나비를 얼굴 위에 얹은 나는,
홀 아래에 있을 붉은 나비를 향해 유유히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