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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32화 (32/365)

32화. 구름 위에서 (9)

구름이 짙게 깔린 홀을 지나 아래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내딛는다.

그러던 중 마침 계단을 올라오는 한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은,

“맷?”

“도련님.”

매튜 아저씨,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내 가족들.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모두 다 좋게 끝났지, 아마 제대로 된 경매가 곧 시작될 거야. 그나저나 맷은? 별일 없었나? 우리 친구들이 사고라도 치진 않았겠지?”

내 물음에 맷이 피식 웃어 보였다.

“맥과 엔이 이 큰 구름의 온 구석까지 쏘다니던 걸 겨우 찾았습니다.”

그렇다는 건 맥레인과 엔제이가 이곳의 내부를 어느 정도 가늠해봤다는 소린데.

“칩은 아직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얼마나 버티던지, 끌고 오는데 애먹었습니다.”

촙이 흥미로운 것을 찾는다…,

포키스와 연락할 새를 말하는 건가?

분명 보라색 꽁지깃을 가진 골다스 종이라고 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아직까진 포키스 쪽과 연락이 닿질 않았다는 거네.

“안은 경매에 나올 물건들이 궁금했는지 금고 쪽을 기웃거리다가 친위대에게 쫓겨날 뻔했습니다. 도련님의 일행이라고 말을 안 했다면 정말 경을 칠 뻔했어요.”

“도련님, 정말 무서웠다고요! 철문은 얼마나 두꺼운지, 거기 앞에 중무장한 놈들이 적어도 수십은 되어 보였습니다!”

그런 육중한 금고를 털려고 한다면 큰 소란이 일어나겠지.

그렇다면 최대한 모든 물건이 바깥에 노출되었을 때를 노려야겠어.

역시 관건은 에르니인가.

“안, 네 천연덕스러움에 반해 널 고용했지만 여기서는 자중하는 게 좋을 거다.”

“…, 네 도련님.”

내 말에 안드레는 풀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도련님은 에르니님을 만나러 가시는 길입니까?”

이어지는 맷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동으로 얼굴을 덮은 나비 가면이 팔랑거린다.

“밑에 있는 은밀한 연회장에서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아마 그쪽에 계실 겁니다. 그럼, 저희는 미리 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맷. 이따 보자고.”

짤막하게 대화를 마치고 그들과 지나친다.

그 찰나의 순간.

맥레인은 날 보며 제법이라는 듯 턱을 까딱거리며 눈짓을 보냈고, 난 그런 그에게 어렴풋이 그린 듯한 미소로 화답했다.

* * *

커다란 욕조, 그 한 가운데 솟은 찬란하기 그지없는 조각상.

날개를 얻고 승천하려는 듯, 애절한 표정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그 조각상의 눈에선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있다.

절묘한 은빛의 조명과 어우러진 탓일까.

조각상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잘게 다진 보석을 흩뿌리듯 눈부시게 반짝인다.

그런 화려하고 거대한 욕조 한쪽엔,

한 무리의 여성들이 발을 담근 채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한 중년의 여성이 요염한 미소로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 담배와 함께 운을 뗐다.

“이야기 들었어요, 에르니. 어쩌면 오늘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면서요?”

붉게 칠한 입술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연기.

이내 묽어지는 그 연기 너머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엔서니 에르니.

그녀는 그 말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당연히 좋은 일이 생길 수밖에 없잖아?

에르니는 질문을 던진 늙은 여우에게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이내 꾹 참았다.

뭐, 그와의 혼사가 성사된다면 그때부턴 굳이 이렇게 참을 필요도 없어지겠지.

이어서 늙은 여우의 말에 에르니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여인이 익살스러운 추임새를 붙여왔다.

“세상에, 다르마야라니. 생각지도 못했어요, 정말!”

거대한 수정이 박힌 함 속에 분을 털어 얼굴에 바르던 그녀는 그렇게 그것을 닫고서 새침한 표정으로 에르니를 쳐다보았다.

에르니는 알고 있다,

저 새침한 표정에서 시기와 질투가 뚝뚝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그래서 웃기다.

밤마다 미망인이 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그녀의 꼬락서니를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린 ‘치세’다.

가문을 위해 존재하는 치세.

다른 가문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도구.

뭐 어쩌다 상호 간에 존중이라는 게 생기기도 하지만 그렇게 된 경우는 이 바닥에서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거의 없다고 해서 아예 없는 게 되는 건 아니지.

난 나를 위해 사교계에 온 힘을 다해 투신했다.

왜?

처음 보는 털복숭이 돼지 위에 올라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왜 그 지독히 술을 꺼리는 앤서니 가문이 군수업계에서 대성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면, 그래.

바로 내 덕이다.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런 노력을 내 아비란 사람은 알아주지 않았어, 오히려 부정하려 했지.

아니다. 됐다.

인제 와서 괜히 그 지긋지긋한 과거를 회상할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드디어 내게 운명이라는 게 찾아왔다는 거야.

세상에, 빈센 다르마야!

내 평생의 짝!

어디서 그런 보석 같은 남자를 만날 수 있겠는가?

그가 가진 재물은 또 어떻고!

망나니라 한들 어때, 노예 몇을 장난감으로 붙여주면 좋아해 주겠지.

가망 없는 서열이면 어때, 재물만으로 우리 가문이 몇 단계는 더 도약하는데.

무엇보다.

이 혼사로 새롭게 꾸려질, 앤서니 가문을 중심으로 한 사교계에서 여왕으로 군림할 내 모습을 생각해 봐!

“그나저나, 그 망나니라는 빈센님도 에르니의 화려한 과거를 알면 좀 놀라겠어요.”

그러다,

금빛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던 적발의 여인이 산통을 깼다.

“어머…, 프질리야. 그게 무슨….”

이리드 프질리야.

바꿔 말하면,

어마어마한 썅년.

유일하게 내 약점을 알고 있는 년.

“하지만 아시죠? 우린 영락없는 친구잖아요. 이리드 가문은 앤서니 가문의 앞에 있을 부귀를 축복한답니다.”

“프질리야, 짓궂기는! 이리드 가문이야 저희 앤서니 가문과 평생을 함께한 친구잖아요? 앞으로도 쭉 그럴 거고요.”

하마터면 표정이 구겨질 뻔했다.

그래도 제법 잘 웃어넘겼지만.

저년도 섣불리 나대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다. 우리 가문을 이용해 이리드 가문이 반사이익을 얻어야 하니까.

도중에 수가 틀린다면 위협할 패로 쓸 작정이겠지.

하지만 두고 봐.

내게 기회라는 게 주어졌을 때, 가장 먼저 널 위해 써줄 테니까.

이윽고 다소 차갑게 식어버린 대화를 다른 주제로 이끌어가려는 때.

“이곳에 모여 계셨군요.”

순식간에 열기를 더하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내 심장도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빈센님!”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발째로 그를 향해 달렸다.

그러자 그는 그리도 자상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어주었다.

느껴진다.

내 뒤통수에 꽂히는 엄청난 부러움의 살들이.

킥킥,

프질리야년의 부들부들 떨리는 시샘도 느껴지는 것만 같구나!

“붉은 나비를 찾고 있었는데, 가면을 벗고 계셨군요.”

“이런, 부끄럽습니다. 가녀린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대화에 집중하다 보니….”

“굳이 붉은 나비가 아니었더라도, 에르니님은 한 번에 찾을 수 있습니다.”

황홀해.

그는 내 거야.

서둘러 자랑하듯, 그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겼다.

그러자 뒤에서 티 날 정도로 큰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가운데 난 내색하지 않은 채,

애절한 눈빛으로 빈센을 올려다보았다.

빈센은 그런 날 우수에 찬 눈빛으로 바라봐 주었다.

“에르니님, 이제 축하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게 무슨…?”

“트와드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알고는 있었다, 내 아비가 그의 가문을 놓칠 리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그의 목소리로 들으니까 새삼 처음 듣는 것처럼 설레잖아.

“해서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다 들어줄게요.”

“에르니님께서 가문을 위해 노력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그런 에르니님의 능력이 보통 것이 아님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있을 거국적인 축하에 당신의 능력을 써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써주겠어 에르니?”

그가,

슬쩍 풀어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순간 무슨 마법에 홀린 듯 애간장이 팍 녹아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끈,

얼굴이 바짝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다.

“물론이에요. 빈센.”

설사 지옥 불에 떨어져 달라고 해도 떨어져 줄게.

당신을 위해서라면.

* * *

당당한 자태로 걸음을 옮긴다.

눅진하게 끓인 그림자를 그대로 끼얹은 듯한,

검은 예복을 갈아입고서.

말레드레의 옷감으로 만들어진 이 옷엔 아직도 안나 아주머니의 정성 어린 온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가슴 주머니에 빼꼼 고개를 내민 에메랄드빛 행커치프는 그 특유의 실크 재질을 내뿜으며 내 걸음에 맞춰 반짝인다.

그 반짝임은 잘 못 바라보면 눈꺼풀로 압정을 씹은 듯 따끔할 만큼 예리할 것이리라.

그런 내 뒤로,

맷과 시온이 위풍당당하게 뒤따랐다.

이어 거대한 문 앞에 당도하자,

뒤에 있던 그 둘이 앞으로 나서서 각자 문 한쪽을 잡고 힘차게 당긴다.

그 너머 드러난 매끈한 옥 바닥,

그 위로 카펫처럼 낮게 깔린 구름.

구름 위에 서 있는 수많은 이들.

내 등장에 맞추어 하인 하나가 슬금슬금 따라 들어와 햇빛 담긴 유리병을 열어,

일순간 이곳을 청명한 아침으로 만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빈센님. 저는 요힘이라고 합니다. 건축 쪽으로 작게 사업을 하고 있지요.”

“반갑습니다. 건축이야말로 문명의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씀해주시니 이 미천한 사업가가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겠군요.”

“겸손하시긴, 언제 한 번 연락드리겠습니다. 요힘 같은 분만이 저의 까다로운 주문을 맞춰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턱이 빨린 인상을 한 요힘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씀만 해주신다면 저 요힘이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그런 요힘의 뒤로 기다렸다는 듯.

“아, 안녕하십니까. 오그 잔센의 메릴입니다.”

내 아리송한 표정을 읽은, 통통한 체격의 메릴이 바쁘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덧붙인다.

“아! 그 동부지역에 보석을 유통하고 있지요.”

“그렇습니까.”

요힘과 달리 시큰둥한 내 반응에 메릴은 크게 당황한 듯 덥수룩한 수염을 실룩이며 말을 이었다.

“그…. 빈센님! 제가 이번 경사에 작게나마 도움이 될 만한…, 그러니까 예물을….”

“예물을?”

“이번 경매에 출품했는데….”

“했는데?”

“그….”

안색이 굳기 시작하는 메릴에게 난 싱긋 웃으며 그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값은 톡톡히 치러드리겠습니다, 앤서니 가문의 연맹은 곧 내 연맹이기도 하니까요.”

그제야 반색이 된 메릴은 두 손을 맞댄 채 연신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를 지나치고 나서야,

에르니와 트와드가 보였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에르니,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검은 예복을 차려입은 트와드.

그 둘이 날 보고 대번에 반기듯 미소지었다.

먼저 에르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반짝이는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트와드가 그것을 재빨리 가로챘다.

“정말 2부 경매 물품을 다 보지 않으셔도 됩니까?”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다 제가 낙찰받을 텐데요.”

“어떤 물건인지 정말 확인 안 하셔도 될는지요?”

“괜찮습니다, 그만큼 트와드님을 신뢰하니까요. 하지만 꼭 보고 싶기는 하군요, 파티를 진행하면서 홀에 그 물건을 전시해 구경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요.”

내 말에 트와드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

“경매의 마지막 물건은 ‘87년 셀레어’였습니다. 검은 망치에 소속된 난쟁이가 공식적으로 인챈트 한 물건이지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품이랍니다. 당연히 직접 보셔야지요, 빈센님이 감탄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말씀하신 신뢰에 부응한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거든요. 바로 사람을 시켜 홀에 모든 물건을 진열하도록 하지요.”

말로만 들어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지만,

결론은 결국 그 인챈트가 됐다는 물건이라는 거네.

안 보이지만 뒤에서 매튜 아저씨와 보스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게 느껴진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지.

“일단 오늘은 그것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하는 일이 있잖습니까, 그렇지 에르니?”

내 말에 에르니가 얼굴을 붉히며 슬쩍 내 옆에 붙어왔다.

그에 맞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우리 쪽으로 조심스럽게 내민다.

그 쟁반 위엔,

투명한 크리스털 잔에 가득 채워진 술이 금빛 기포를 토해내고 있었다.

여유롭게 잔을 하나 집고,

에르니가 뒤따라 잔을 집는다.

그리고,

약간 망설이던 트와드가 불같은 눈길로 노려보는 에르니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야.

검연쩍은 웃음과 함께 잔을 들어 올린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나로 향했다.

이에 좌중을 돌아본 나는 그들 앞에서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화합을 축하하며. 그리고 에르니, 당신과 약속한 평생을 기념하며.”

동시에 값비싼 화약이 비명을 지르며 작은 폭죽들이 사방에서 터졌다.

그건 에르니가 준비한 사치스럽고 취기 가득한 사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어 모두가 술잔을 입술에 걸치고 가감 없이 그것을 비웠을 때.

그건 우리 시몬 바스티유가 준비한 이야기의 결을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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