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구름 위에서 (10)
활의 움직임에 현이 떨리고,
현의 떨림에 몸통이 노래를 부른다.
바이올린에서 쉴새 없이 쏟아져나오는 그 흥에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사람들이 짝을 이뤄 춤을 추었다.
점잖은 춤은 점점 과격해지고, 사람들의 볼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면.
개중에 열기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듯 추태를 부리는 자도 나오기 시작한다.
잔을 들이키기 무섭게 바닥에 내팽개쳐 깨트리는 자, 웃옷을 벗고 하인들을 붙잡은 채 남사스럽게 나뒹구는 이.
정숙하고 딱딱했던 여인들은 드레스 자락을 올려 현란한 발재간을 놀렸고, 모여서 형형색색의 연초를 피거나 적나라한 담소를 나누는 등 사석에서나 나올 법한 행동들을 즐겼다.
그렇게 물결치는 흥에 올라타 모두가 정신이 없는데,
그 흥이 부족했는지 한 귀족이 악대를 더욱 재촉한다.
“아첼레란도! 아첼레란도!”
이에 이미 장내의 열기에 잔뜩 흥분했던 악대의 지휘자는,
대뜸 음악을 멈추고 지휘봉을 세우며 단원들을 향해 작심한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8월의 소나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원들이 일치단결한 표정으로 지휘자를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 지휘자는 세웠던 봉을 박력 있게 휘두른다.
이제 음악은 마치,
거름망 위에 춤추는 자갈처럼 음표가 우수수 쏟아지는 형태가 되었고.
그 음악에 맞춰 사람들은 열렬히 방황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석에 유린당하는 나침반처럼 보일 정도로.
에르니는 부쩍 홍조를 띤 얼굴로 내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때요? 월주는 우리 지역의 고유한 특산품이자 하나뿐인 주류에요. 달빛에 재워 발효시킨 덕에 취하면 세상 모든 게 은빛으로 물들어 보이죠.”
살짝 풀려버린 혀, 한껏 올라간 목소리 톤.
“근데 아무리 마셔도 당신은 태양처럼 빛나 보여요.”
그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하고도 아찔한 향수 냄새.
확실히,
그녀는 대단했다.
모임의 분위기를 점토처럼 주무를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장내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광경이 그 반증이리라.
나도 그 순간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그녀의 박자를 따라 술을 마신 덕에 세상 일부가 은빛으로 물들여 보일 정도였으니까.
월주는 굉장히 강한 술이었다.
물론 촙과 안드레와 마셨던 밀주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반대로 거부감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어서 되려 월주가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대로 더 무리해버리면 활동에 지장이 갈 정도로 취할지도 모를 일.
하지만 다행히도 이 이후로 술을 마실 상황은 오지 않았다.
취기를 이용해 나와 손쉽게 친밀감을 형성하려는 자들이 셀 수도 없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노예를 소작농으로 포장해 큰 밭을 굴리는 대지주였고.
그 포장에 합법적인 빌미를 제공한 법관이었으며.
법관의 뒤를 봐주고 대지주를 작은 지갑으로 취급하는 귀족이자.
귀족의 세력에 붙어 거대한 위세를 자랑하는 기업가였다.
그 모습은,
거미 수십이 합심하여 만든 거대한 거미줄처럼 끈끈하게 엉킨 하나의 빈틈 없는 카르텔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펼쳐놓은 거미줄에 힘없이 걸린 상식과 양심, 합법 등을 갉아 먹고 이것이 올바른 생태계인 마냥 자랑하듯 지껄였다.
역겹다.
세공소에서 날 깎고 다듬은 부류들이랑 똑같은 놈들.
덕분에 수도 없이 핍박받았던 내 과거가 떠올라 순간 속에서 매스꺼운 증오가 일었다.
하지만 그 증오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나는 이제 무법자,
시몬 바스티유의 가족이고.
도둑이다.
오늘 놈들이 자랑하듯 지껄이던 생태계는 뒤집히게 될 것이다.
기득권들에 대한 반항심?
구도를 위한 대의?
무슨 말로 포장해도 상관없어.
단지 이건 내가 살아가야만 했던 삶에 대한 대답일 뿐이니까.
“빈센?”
교태를 잔뜩 머금은 에르니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체 노골적인 시선으로 목덜미를 끈적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대뜸 까치발을 들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날 어떻게 자빠트릴까 하는 생각?”
그리곤 노골적인 말로 속삭이던 그녀가 뜨거운 숨결을 불어 내 귓불을 자극한다.
“이제 전 당신 거잖아요,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요.”
그래, 마음대로 할 거야.
“아니면 제가 먼저 맘대로 하길 바라시는 걸까요? 킥킥.”
“구름이 제아무리 느릿하게 흐른다 한들 하루는 일정하게 흘러가, 에르니. 난 결국 곧 다가올 하루의 끝에서 당신과 아슬아슬하게 맞물리며 내일을 노래하게 될 거야.”
최대한 느긋한 표정으로 그녀를 진정시키듯 말하자,
그녀는 되려 붉어진 얼굴로 안달이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그렇게 에르니가 좀 더 내게 밀착하려 들던 그 시점에,
멀리서 마찬가지로 취기가 오른 트와드가 생글생글 미소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빈센씨, 지금 막 경매품 진열이 끝났다고 합니다. 같이 가서 보시겠습니까? 성전에 전시된 신들의 유물에도 뒤져지지 않을 거라 자부합니다!”
“그거 좋죠, 트와드님. 에르니? 잠시 다녀와도 될까?”
“두 남자의 치기를 어떻게 말리겠어요? 다녀오세요, 어차피 하루의 끝은 오게 될 테니까.”
에르니는 그러면서도 은밀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걸치고 있던 드레스의 어깨끈을 잡아 흔들며 내게 노골적인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살짝 흥분한 트와드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와중 자연스럽게 매튜 아저씨와 시몬이 내 뒤를 따랐다.
마침내 홀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 들어선 우리는,
짙게 깔린 구름 위에 전시된 수십 점의 물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 잿빛 액자에 담긴 그림을 제일 먼저 가리킨 그는 신이 난 말투로 설명을 이었다.
“우선 이것부터 설명해야겠군요. 달리아 실바를 아십니까? 그의 열두 번째 작품인 시간의 아이러니입니다.”
취기가 오른 트와드는 일전에 내가 알던 트와드가 아니었다.
극히 가벼워지고, 극히 과해지는 그의 모습이 심지어는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왜 앤서니 가문이 술을 경계하는지, 그 결정적인 대목을 훔쳐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본래 시작가만 해도 금화 8천 개 정도 호가하는 대단한 물건이지만 이젠 아니죠, 빈센씨가 그 가치를 올려버렸으니까요.”
“과찬이십니다.”
진심이다.
빈말로 올라간 가치거든.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아 참! 이런 시시한 물건들로 시간을 낭비하다니! 말 그대로 시간의 아이러니입니다. 하하!”
경박한 웃음을 짓던 트와드는 가장 끄트머리에 진열된 물건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서요, 어서 일로 와보시죠!”
그 닦달에 빠른 걸음으로 가니 거기엔.
한 자루의 검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이라 말할 수 있겠군요.”
트와드는 과장된 몸짓으로 그 검을 가리키며 꼬불거리는 혀를 잔뜩 굴려댔다.
“이 롱소드는 저 먼 서쪽 숲의 주인들이 직접 두들겨 만들었습니다. 산 주인의 눈물이라 불리는 광석, ‘이터누티’로 말이죠. 해서 그 무게가 400그램 정도밖에 안 나갑니다. 세상에, 롱소드가 400그램이라니 믿겨 지십니까?! 아무리 귀 큰 자들이 무기를 가볍게 만든다지만 이렇게나 가벼운 것은 이 검이 유일할 겁니다!”
잔뜩 침을 튀겨가며 반쯤 비워진 나머지 잔을 모두 비운 트와드는 대뜸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죠, 아시다시피 이 검엔 인챈트가 걸려있습니다. 87년 셀레어 말입니다. 그 강력한 근원을 생각하면 그 어떤 보석도 부럽지 않죠.”
사실,
아까부터 그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미 두 눈에 그 검이 담긴 순간부터 내 정신은 그것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둥근 폼멜을 시작으로 양손이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검은 손잡이.
맹금이 펼친 날개와 같이 위풍당당하게 뻗은 가드.
그 아래,
은빛 폭포가 쏟아지는 것만 같은 시린 날.
검에 대해서 아는 건 거의 없지만, 그런 무지렁이조차 감복할 수밖에 없는 그 자태는.
정말 완벽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빈센님이 흡족해하시는 것을 보니 제가 다 기쁩니다.”
내 표정을 살피던 트와드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저와 빈센님 사이에 체결된 신뢰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손색이 없겠지요?”
신뢰는 모르겠지만 어떤 걸 상징하든 그에 걸맞은 건 확실해.
하지만,
무대의 막은 아직 내리지 않았어.
그러니 내 역할에 끝까지 충실해야지.
“상징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물건임엔 동의하지만…, 상징물로 삼는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에르니에 비하면 제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빛이 바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빛바래 질 것으로 우리의 신뢰를 상징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 하하! 하하하하! 맞습니다. 맞아요!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군요. 이거 너무 부끄럽습니다. 하하하!”
간지럽지?
당연히 간지러워야지.
처음으로 내 낯짝이 간지러워 죽을 지경인데.
“자, 그럼 다시 연회장으로 가실까요 빈센님? 그나저나 빈센님께서 보내신 금화가 슬슬 걱정되는군요, 그만큼 대단한 수행원을 붙이셨을 테니 상관없겠지만 어쨌든 통과하는 곳이 중립지역이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그렇게 트와드를 따라가려는 순간.
누군가 내 소매를 슬쩍 잡아끌었다.
뒤를 돌아보니,
보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때가 임박했구나.
난 즉시 멀어져가는 트와드에게 말했다.
“트와드씨.”
“네, 빈센님?”
“먼저 가시지요, 금방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 말에 트와드는 별 의심 없이 시끄러운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살핀 나는 매튜 아저씨와 시몬과 함께 외진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윽고 작게 돌출된 발코니에 이르자.
맷의 가면을 벗어던진 매튜 아저씨가 특유의 냉철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모든 물건이 금고 밖으로 나왔어.”
그러자 그에 화답하듯.
시온의 가면을 벗어던진 시몬이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로 답한다.
“때가 됐다.”
“그럼 나는 애들을 모아 올게. 이미 맥레인과 엔제이가 동선을 다 짜놨을 거야.”
“그래, 매튜. 애들을 데리고 연회장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와 디안이 신호를 보내면 그때부터 행동을 개시해.”
“알았어, 디안? 너무 긴장하지 마라.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갈 거야.”
매튜 아저씨의 말에 시몬이 날 보며 웃는다.
“디안은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잘해줘도 너무 잘해주었지. 지금부터는 디안이 했던 것처럼 우리가 실수 없이 일을 진행할 차례야.”
* * *
“빈센님은요?”
에르니의 날 선 물음에 트와드는 말없이 가득 차 있는 술잔을 들었다.
“빈센님은 어디에 있냐고요.”
“볼일을 보고 있겠지.”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적막.
그 주변이 시끄러운 연회장이라 더 대비되는 모습이다.
“에르니, 이번엔 실수하지 마라.”
“걱정 마요, 그는 완벽하니까. 내가 한눈팔 수 없을 만큼.”
“전에도 그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빈센 앞에서 그 얘길 꺼내면 사교계를 움직여서라도 당신 신망을 조져버릴 테니까 입조심 하세요.”
“너야말로 말조심해. 이젠 나만의 신망이 아니니까. 내 신망이 무너지면 네 남편의 신망도 무너져.”
“모르나 본데, 오직 나만이 무너진 신망을 세울 수 있어요.”
트와드는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잔을 깔끔히 비웠다.
“어쨌든 최대한 빠르게 이리드 가문을 정리하도록 해. 그때가 되면 나도 아비로서 그때 있었던 일들을 영원히 잊어주겠어. 그럼 네 난잡했던 과거도 영원히 묻힐 테지.”
트와드의 말에 에르니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그러나 에르니는 금세 온화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저 멀리서 빈센이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뒤따르는 시온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이윽고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빈센 다르마야.”
“지금 뭐라고 했지?”
“어리석은 자의 이름을 불렀지. 방금 전서구를 보내고 오는 길이야. 그 전서구가 지금 어딜 향해 날갯짓하고 있을까?”
“시온, 드디어 네가 미쳤구나.”
“아니, 미친 건 너지. 알량한 꿈에 금화 백만 개를 불사르다니.”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어, 시온. 이 씨발 반역자 새끼.”
“네 아버지께선 누굴 반역자로 생각하실까? 줏대 없는 병신같은 생각으로 가문의 재산을 빼간 너와 그 사실을 알린 나. 둘 가운데 말이야. 네가 빼돌린 금화 백 만개가 이동하길 기다렸지, 그것이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어줄 테니까.”
“시온, 도대체 왜 그래? 날 믿는다고 했잖아?!”
“난 다르마야를 믿어, 빈센 네가 아니라.”
“하, 그래 좋아. 네 생각을 확실히 알았어. 이젠 내 생각을 좀 말해줄까?”
“뭐…?”
“금화 백만 개가 끝일까? 내가 빼돌린 재산이? 천만에, 그리고 넌 실수를 했어. 내 아버지가 아니라 먼저 중립지역을 통과하고 있을 수레부터 신경 썼어야지!”
“그게…, 무슨….”
빈센이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트와드를 향해 소리쳤다.
“트와드! 이미 그대와 난 서로 신뢰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 물음에 멍하니 있던 트와드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빼돌린 재물 정도면 트와드, 당신의 기업은 능히 제국으로 성장하게 될 거다! 그 누구도 견제하지 못할 만큼 장대하게!”
일순간 트와드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지금 바로 결정해. 얼른!”
“무…무엇을?!”
트와드의 물음에, 빈센이 시온을 손가락 짓 하며 선언했다.
“병사를 불러, 저 새끼를 잡아! 어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트와드가 품에 있던 작은 뼈 피리를 불어 정말 삽시간에 구름 위에 있던 모든 병력을 집결시켰다.
하지만 그 집결한 병력을 앞두고 시온은 오히려 담담하게 외친다.
“맷, 이제 슬슬 결착을 지어야지. 네 도련님을 살릴 유일한 기회잖나.”
그 말에,
빈센의 측근인 맷이 우울한 표정으로 시온 옆에 선다.
“…, 죄송합니다. 도련님. 도련님을 살리기 위해선 이 방법밖엔….”
“맷?! 네가 어떻게…?!”
이윽고,
중립지역에서 빈센이 고용했다던 패거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집결한 병사들과 대치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내,
“쳐라, 다 죽여버려!”
이성을 잃은 듯한 빈센의 말을 끝으로.
가자,
시몬 바스티유의 문제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