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6화 (36/365)

36화. 재 (2)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네가 쓰러진 직후 우리가 타고 있던 조각구름도 빠르게 추락했거든.

끝까지 침착하게 방향타를 잡아준 포키스가 아니었다면 우린 추락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겨우 땅 위에 안착하기 무섭게 우린 미리 정해두었던 장소를 향해 이동했어.

그런데 트와드가 빡쳐도 단단히 빡쳤는지….

우리가 목적지로 이동하는 그 잠깐 사이에 이미 용병들을 죄다 풀어버렸더라고.

근데 재키 그 새끼가 눈치가 빨라서 망정이지, 걔가 말들을 데리고 마중 나온 덕에 정말 간발의 차로 거리를 벌릴 수 있었어.

하…, 그다음은 그러니까.

아, 그렇지. 마차를 꾸리고, 짐을 싣고 모두 다 그곳에서 빠져나갈 준비를 했었다.

아니야, 아무튼 그보다 중요했던 건…,

그래,

바로 너였어 디안.

시몬은 결정을 내렸어야 했지.

네가 총을, 그것도 심장에 맞았다는 걸 바로 가족들에게 알려야 했을지, 아니면 이동할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알려야 했을지.

그는 후자를 택했고 생각해보면 그 덕에 네 상황을 모르는 나머지 가족들은 침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가 첫 능선을 탔을 때,

시몬은 가족들에게 네게 처한 상황을 알렸어.

그거 알아?

그 말을 듣고 안나는 하루 동안이나 실신했다는 거.

짧은 시간 동안 네게 가장 정을 준 사람이 안나였으니까, 그 충격이 엄청났을 거야.

그다음은 안드레와 촙, 케니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지.

오히려 비질라는 담담하게 네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더라고.

매튜는 자책했어.

이번 작업에 널 선두에 두고, 널 이용했었음에도 끝까지 옆에서 책임을 지어주지 못해서.

시몬도 아마 끓는 용암을 삼키는 기분이었을 거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그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랑만 있을 땐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으니까.

나도 후회가 돼.

내가 조금만 신경 썼다면 우린 정말 완벽하게 일을 끝마치고 여유롭게 이동했을 텐데.

* * *

“아무튼, 정말 다행이야. 잘 돌아왔어 디안.”

늦은 밤.

차가운 달빛에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이동을 멈추고 작게 펼친 모닥불 곁에서.

맥레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 말들은 제법.

내겐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소속감, 그리고 속을 가득 채운 끈끈한 유대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으니까.

길고 끔찍했던 그 꿈이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질 만큼 좋았어.

생각에 잠긴 채 조심스럽게 아직 붕대에 감겨 있는 상처를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다.

“나도 솔직히 놀랐어, 디안.”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맥레인이 다 핀 연초를 모닥불에 던지며 입을 열었다.

“넌 하루만 지나면 상처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몸을 가지고 있잖아. 그런데 그렇게 선명하게 흉터가 남다니 말이야.”

“저도 놀랐어요.”

“이건 그냥 내 예상일 뿐인데, 아마도 네 몸에 흉터가 남은 이유는 발렉손의 숨결 때문일 거다.”

“발렉손의 숨결…,”

트와드가 내게 자랑하듯 보여줬던 보랏빛 화약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괴물 같은 화약은 자연의 모든 법칙을 무시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어. 일종의 마법 같은 거라고 해도 무방하지.”

맥레인은 날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가진 그 굉장한 회복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소리야.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잘 모르겠어. 지금까지 심장을 관통당해도 살아남은 자는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러나 분명한 건 이전엔 없었던 흉터가 네 몸에 남았다는 것이고…,”

“어쩌면 다음에 똑같은 상황과 마주했을 때, 그땐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겠죠.”

내 씁쓸한 표정을 읽은 걸까,

아니면 이미 내 머릿속까지 훑어본 건 아닐까.

맥레인은 조용히 내 얼굴을 살피다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잃어버렸다던 기억을 되찾은 거냐.”

어떻게.

“어떻게 그걸…?”

“총에 맞은 충격보다, 다른 무언가에 끙끙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 지금 네 모습이.”

그 말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 기억의 짐을 덜고 싶은 거야?”

“덜 수 있을까요?”

“가족들에게 덜어서 네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건 모르겠어요, 그들에게 큰 짐이 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들어줄 거야, 가족이니까.”

맥레인의 말에 괜히 식은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까.

“아직 때가 안됐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정말 때가 안됐단 소리야. 억지로 그때를 앞당길 필요는 없어.”

내 눈치를 살피던 맥레인이 작은 육포를 씹으며 넌지시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불쑥 모닥불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디안. 네가 먼저 그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다면 그래야지.”

차가운 손을 비비며 모닥불 근처에 앉은 매튜 아저씨가 나와 맥레인을 번갈아 보며 씩 웃는다.

“분위기 좀 바꿀 겸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까?”

그 말에 맥레인은 질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로 향했고, 그렇게 나는 매튜 아저씨와 단둘이 되었다.

“해주세요, 옛날이야기.”

“좋아, 아주 재밌는 얘길 해주지. 한번은 내 젊었을 적에 라디아 해협에 배를 타고 나가야 했었어. 남자들을 홀려 잡아먹는 인어들을 퇴치해달란 의뢰가 있었거든….”

난 아저씨의 입에서 쏟아지는 것들이 좋았다.

내겐 하나같이 새로운 풍경이었고, 경험이었고, 상상이었으니까.

* * *

이른 새벽,

불침번을 섰던 포키스의 신호를 시작으로.

우리는 다시 펼쳤던 간이천막들을 거두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각자각 굴러가는 마차 바퀴 소리와 함께.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완전히 잠을 깬 나는 아직 밤이 묻은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주위 풍경을 살폈다.

부쩍 숲의 녹음이 더 진해진 것 같네.

매튜 아저씨는 내가 사흘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하셨었지.

그럼 꼬박 사흘을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소린데, 이대로 쭉 가면 도대체 뭐가 나올지 궁금하다.

포키스와 불침번을 선 촙은 완전히 곯아떨어져서 마차가 험한 길 위에서 통통 굴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비질라는 내 옆에 콕 붙어 책을 읽고 있었고,

안드레는 그냥 말없이 마차 뒤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안드레, 이대로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뭐가 나오는지 알고 있어?”

내 물음에 그가 얼른 고개를 돌린다.

“진짜 진득하게 쭉 내려간다면 테리라스가 나올 거야.”

“테리라스?”

“거긴 햇살이 꾸덕한 꿀처럼 떨어져 내린데. 그러면서도 가끔 바다에서 얼음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더라.”

“지금 우리가 거기로 간다는 거지?”

“글쎄, 이 마차로 테리라스까지 가려면 두 달은 걸릴걸.”

“세상에.”

“보스가 하는 얘길 들었는데, 우린 라티아로 간댔어.”

“라티아?”

이어지는 내 물음에 비질라가 책을 덮고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세브리의 황금밭이 있는 곳이야. 같은 중립지역이지만 라티아는 위대한 농장주 세브리의 땅이라서 누구도 감히 건들 수 없지.”

“더 얘기해줄 수 있어, 비질라?”

“디안 오빠라면 열흘도 해줄 수 있어.”

“그럼 나는 비질라?!”

뒤따르는 안드레의 물음에 비질라가 생긋 웃는다.

“안드레 오빠는 채 삼일을 못 버티고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은데.”

그 말에 당장 반박하지 못한 안드레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 옆에 앉아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그렇게 비질라는 설명을 이어갔다.

나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구석에서 자고 있던 촙도 실눈을 뜬 채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구나.

“농장주 세브리의 밭은 그 규모만 해도 리시론의 수도 세지앙만큼 커다래.”

“정말이야?!”

“안드레, 정확히 어느 정도 크기라는 건데?”

“한눈에 들어오는 하늘만큼?”

세상에.

“그 밭에서 나오는 곡식의 양이 굉장해서 여러 나라의 백성들이 그 곡식을 먹고 살 정도야. 바꿔 말하면 세브리는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리고.”

“한마디로 그 지역의 왕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네.”

안드레의 대답에 비질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중립지역 북쪽에 즈리칸이 있다면, 남쪽엔 세브리가 있다고 봐야지.”

“즈리칸은 또 뭔데?”

이어지는 내 물음에 안드레가 대뜸 내 어깨를 팍 치며 답했다.

“하이켈의 늑대들이라 불리는 군벌의 수장을 몰라?”

“내가 그런 걸 자세히 알 리가 없잖아.”

“아, 그건 그렇지. 하하!”

다시 멋쩍게 웃는 안드레,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비질라의 침착한 설명.

“우리가 라티아로 가는 이유는 세브리의 영향권 내로 들어가기 위해서야. 그렇게 되면 앤서니가 고용한 추적자들이 우릴 쫓을 수 없을 테니까. 여러 나라와 이해관계를 걸치고 있는 세브리의 땅을 감히 들쑤실 순 없잖아?”

“일개 기업가 나부랭이 새끼가 말이야, 하!”

안드레는 괜히 내가 그들에게 당했던 것들이 떠올랐는지 치기 어린 말투로 화풀이하듯 말했다.

“어쨌든 라티아는 다른 중립지역과는 다르게 굉장히 평화로운 지역이라서 그곳에서 한숨 돌릴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을 마친 비질라는 스스로가 대견스러운지 제법 귀여운 표정으로 콧김을 확 불었다.

그럼 나는 그런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줘야겠지.

“정말 대단해 비질라,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이었어.”

“힛, 뭐 대충 알고 있는걸 말해줬을 뿐이야.”

덜컹덜컹.

마차는 어느새 완만한 능선 하나를 벗어나 다음 능선을 향해 길이 아닌 거친 숲으로 향했다.

* * *

해가 저물고 금세 어둑해진 하늘.

그러나 그 하늘에 수 놓인 형형색색의 별들 탓인지 땅 위는 아직 밝다.

깊은 숲에 마차를 둥글게 둘러치고 그 안에서 모닥불을 피운 채 잘 준비를 하는 와중.

매튜 아저씨는 나와 맥레인을 오늘의 불침번으로 임명했다.

처음엔 안나 아주머니께서 그런 매튜의 결정에 반대하셨지만 끝내 괜찮다는 내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허락하셨다.

흉은 졌지만, 상처는 이미 다 아물었고 몸을 움직이는 데에도 이렇다 할 불편함이 없었으니 구태여 몸을 계속 쉴 필요는 없지.

해서 나는 맥레인과의 불침번을 시작했다.

물론 말이 불침번이지, 포키스와 촙이 새벽이 다 되어서까지 우리 옆에 붙어서 수다를 떠는 바람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다음은 부랴부랴 잠에서 깬 안나 아주머니가 나와 맥레인에게 따듯한 차를 타주었고,

그다음은 소변을 누러 나온 시몬이 몇 분간 우리 사이에 앉아서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한 소회와 낯부끄러운 격언 같은 것을 서슴없이 던져댔다.

“정신없지?”

맥레인의 말에 난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맥레인씨, 이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 질문에,

맥레인은 말없이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냥 맥레인이라고 불러, 구태여 존대할 필요도 없고.”

“갑자기요?”

“예전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그럼 그렇게 할게요, 맥레인.”

“그러면서 왜 아직도 존대를 해?”

“왜냐면 아직 맥레인한테 배울 게 남아있으니까요.”

“은화 한 개 가지고 유세는.”

“떨어야죠, 제가 어떻게 산 기횐데.”

내 말에 이제 막 불을 붙인 연초를 한 모금 빨아들인 맥레인이 식은 웃음을 내뱉었다.

“말해 봐.”

“맥레인은 어떻게 이들과 가족이 되었죠? 그 전엔…,”

“됐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안 할 거다.”

단호한 그의 말에 난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바로 어제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으니까.

“야, 디안. 저기 봐.”

“네?”

맥레인이 손가락으로 밤하늘 한 군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별 이름이 뭐냐?”

손가락 끝엔 주홍빛으로 빛나는 별 하나가 맺혀 있다.

“렌두에룬트. 찬란한 불꽃이란 이름을 가진 별이에요.”

“유독 오늘만 저 별이 더 밝아 보이는 이유를 넌 아냐?”

“글쎄요, 전 그저 별들의 이름과 위치만을 외웠을 뿐인걸요.”

“저 별이 유독 반짝이는 날은 난쟁이들이 어디선가 무기를 두들겨 만들고 있다는 뜻이야.”

순간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말이 너무 흥미진진했으니까.

“어떻게 알죠?”

“난쟁이들한테 아주 커다란 유리가 있다고 들었거든, 그건 별 하나를 골라 그 빛을 짜내는 도구라고. 왜 난쟁이들이 저 별빛만을 고집했는지 네 말을 들어보니 알 것 같네.”

나도 모르게 입가가 씩 올라갔다.

조심스레 옆을 살피니 맥레인 역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서로 몰랐던 부분이 맞물려서 하나의 깨달음이 되었을 때 느끼는 그 벅찬 감정 때문이리라.

“디안.”

“네, 맥레인.”

“받아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맥레인이 내게 뭔가를 던졌다.

그것은,

“네 몫이다.”

멋들어진 가죽 검집 안에 맞물린,

한 자루의 검이었다.

“시몬의 결정이야, 그 검은 네 거다.”

87년 셀레어.

구름 위에서 잠깐 잡아 보았던 그 검이 이제,

온전히 내 손에 쥐어져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