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37화 (37/365)

37화. 재 (3)

불침번을 마치고 오전 내내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곤히 잠들던 촙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은 내가 딱 그렇게 자 버린 거다.

그렇게 어제보다 부쩍 따가워진 햇볕에 볼을 긁적이며 일어났을 땐 촙이 기다렸다는 듯 날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이끌려 다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어느새 그와 나란히 말을 타고 마차 행렬의 후미를 지키고 있었다.

“오, 디안. 이제 고삐 잡는 모습이 자연스러운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이 정도는 해내야지.”

“어제는 불침번도 섰다면서?”

“나도 슬슬 가족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하니까.”

“그래, 그건 그렇지.”

촙은 그리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디안, 넌 총을 맞았어. 그리고 사흘을 누워있었지. 우리 가족을 위해 큰일을 하다가 말이야.”

이어서 날 바라보는 촙의 얼굴엔,

흡사 내게 큰형이 있었다면 그가 가졌을 법한 우직함이 묻어 있었다.

“무리하지 마. 쉴 땐 쉬라고. 그러기 위해서 가족이 있는 거야.”

“그래, 알겠어 촙.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모르게 그를 형이라 부를 뻔했다.

그만큼 그는 안드레처럼 나에겐 형제와 같이 쉽고 편안한 상대였으니까.

“촙, 얼마나 더 가야 라티아가 나올까?”

“이틀은 더 가야 하지 않을까? 추격대를 따돌리기 위해 험한 길만을 골라 가고 있으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걸릴지도 몰라.”

“추격대가 우릴 발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될 거야, 포키스가 우리 흔적을 다 지우면서 뒤따르고 있으니까.”

그렇지.

포키스는 과거에 군인이었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철저한 세뇌로 만들어진 군인.

“그러고 보니 디안은 포키스가 활 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지?”

“응.”

“아마 보게 되면 깜짝 놀랄 거다.”

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편에서 땅을 치대는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안장 앞에 매달려 있던 검 자루에 손을 얹었지만,

곧 그 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나는 얼른 자루에서 손을 떼야 했다.

“케니?!”

내 부름에 반대로 더 놀란 표정을 한 케니가 유려한 손짓으로 고삐를 잡아당기며 답했다.

“디안?! 벌써 그렇게 막 무리하면서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그리곤 날카로운 눈빛으로 촙을 째려보자 그 우직한 촙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냐 케니, 촙은 잘못 없어. 그냥 내가 이렇게라도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자발적으로 한 거야.”

“그렇다면야 안심이지만….”

이내 케니는 표정을 풀고 활짝 웃어주었다.

“그런데 케니, 오늘은 네가 포키스한테 다녀온 거야?!”

“응, 나보다 말을 빠르게 탈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촙이 쉬이 반박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케니의 말 타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소리겠지.

처음 알았어.

“그래서, 포키스가 뭐래?”

“추격자는 거의 다 따돌린 것 같데. 애초에 받은 만큼만 일해줘도 감사할 정도의 용병들이 대부분이라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나가떨어졌다나 봐.”

“그거 다행이네, 그렇지 디안?”

“응.”

“그럼 난 매튜 아저씨한테 보고하러 가 볼게. 촙, 디안 이따가 보자.”

그 말을 끝으로 결이 고운 백마의 목을 두들겨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간 케니의 뒷모습을,

우리 둘은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케니가 저렇게 말을 잘 타는지 몰랐어.”

이어지는 내 말에 촙이 머리를 긁적인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가족 중에 케니보다 말을 잘 타는 사람은 맥레인이나 조이 정도밖에 없을걸?”

“그 정도야?”

정말 놀랐다.

언제 기회가 되면 그 주제로 케니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또다시 우리 뒤에서 거친 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이번에도 우리는 그 소리를 잔뜩 경계했지만, 이내 그 소리가 더 가까워지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얼른 경계를 풀어야만 했다.

“촙, 디안?”

“포키스!”

촙이 반갑게 손을 흔들자 거칠게 고삐를 잡아당긴 포키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에게서 물씬 풍겨오는 숲 냄새.

녹음이 찐득하게 들러붙은 옷들.

잔뜩 때 묻은 얼굴까지.

영락없이 고생한 몰골이었지만 그는 그 행색과 어울리지 않는 후련한 목소리로 촙의 인사에 화답했다.

“오늘도 고생하는구나, 촙.”

“우릴 추격하던 놈들은 어떻게 됐어요?”

“셋을 쐈지. 능선 세 개를 사이에 두고서. 그 전에 내가 설치한 함정엔 둘이 걸렸고, 한 무리는 늪에 빠져서 말 대부분을 잃었어. 그러다가 의지를 잃었는지 결국엔 추격을 포기하더라, 방금 그걸 보고 오는 길이야.”

능선 세 개를 사이에 두고 그 거리를 저격했다는 말인가?

“대체 어떻게 그런…?”

궁금증에 못 이겨 마치 재채기처럼 입 밖으로 샌 질문.

포키스는 그런 내 질문에 삐뚤어진 안대를 고쳐 쓰곤 미소와 함께 휘파람을 불었다.

휘리리리.

혀를 잔뜩 굴려 부는 특이한 휘파람 소리.

거기에 화답하듯 잠시 후.

찌르르 찌르르.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날카로운 새의 지저귐.

이어 어여쁜 보라색 꽁지깃을 가진 알록달록한 새 한 마리가 불쑥 날아들어 포키스의 어깨에 위에 앉는다.

그래 맞아, 구름 위에서 저 새를 본 적이 있었지.

보라색 꽁지깃을 가진 골다스 종.

“이 아이의 이름은 덕스야.”

머리에 우뚝 선 노란 깃이 인상적인 그 새는 별안간 정신 사납게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내 하나뿐인 부사수이기도 하지.”

“부사수?”

재차 이어지는 내 궁금증에 포키스가 활짝 웃으며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꺼내 들었다.

“뼈대는 렌타니 나무, 시위는 메무즈에서 만든 줄이야. 이걸로 만든 활이 전쟁터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줄 알아?”

“뭔데요?”

“작은 투석기.”

말을 마치기 무섭게,

휘리리리.

포키스가 휘파람을 불면,

찌르르,

하고 덕스가 힘차게 날갯짓하며 높이 상승한다.

거기에 맞춰 정말이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화살을 시위에 건 채 한순간에 당기는 포키스.

“방금 덕스에게 작은 짐승 따위를 찾으라고 시켰거든, 곧 녀석이 내게 신호를 줄 거야.”

멋있다.

나도 모르게 넋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신호를 받으면 다음은 활공한 채로 부리를 이용해 방향을 가리킬 거고.”

찌르르.

말 끝나기 무섭게 덕스가 부리를 고정한 채 활공한다.

“난 그 방향으로 가기 알맞은 바람결을 골라.”

팍!

쒸이익!

고막이 아려오는 날카로운 소리.

이미 쏜 살은 저 멀리 날아가 내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

“쏘면 되는 거야.”

말을 마치고 활을 거둔 포키스는 넋을 잃은 내 모습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이런 걸 가능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요소는 따로 있어.”

휘리리리.

휘파람에 맞춰 다시 그의 어깨에 날아든 덕스.

“자, 잘 봐.”

포키스는 그 새를 손으로 감싸 쥔 뒤 내게 내밀어 자세히 보여주었다.

“어, 이건…?”

자세히 보니,

새의 한쪽 눈이 유리구슬 같은 것으로 대체되어 있다.

그리고 이 유리구슬은 분명 포키스의 안대 너머에…,

“이 눈으로 덕스가 보는 세상을 나도 똑같이 볼 수가 있어. 시야를 공유한 채 녀석이 방향을 설정해주면, 난 시야와 방향을 판단해 살을 올릴 바람결을 골라 시위를 놓는 거지.”

“그래서…, 방금 쏜 살은 어떤 걸 맞춘 건가요?”

“여기서 굽이진 길을 두 번 정도 통과하고 나면 길에 큰 나무가 하나 있거든, 거기에 매달려서 과일을 따 먹고 있던 쥐를 맞췄어.”

포키스가 하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다른 세상 이야기 같구나.

매튜 아저씨가 해주는 이야기처럼.

* * *

앤서니가 푼 용병들이 더는 우릴 쫓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턴 편한 길을 골라잡고 속도를 높였다.

아 그렇지, 마지막 굽이진 길을 빠져나올 때 정말 포키스가 말한 대로 화살에 꿰어진 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나와 촙이 서로를 보며 지었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기다.

이제 완만한 길 위를 부드럽게 할퀴는 마차는 더는 덜컹거리지 않았다.

저 앞, 길 너머에선 뭔지 모를 고소한 냄새가 가득 풍겨왔고 태양은 불 위에서 따끔거리는 노른자처럼 하늘 위에 선명하다.

그렇게 끝 모를 완만한 언덕을 넘어서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아, 이곳부터가 라티아라는 곳이구나.

땅 위를 점거한 황금빛.

바람에 출렁이는 곡식의 파도.

흥에 겨운 곤충들의 낯뜨거운 울음소리.

땡볕 아래 잠깐 휴식을 얻은 짐승들의 나태함 섞인 푸념.

그 모든 것이 언덕 너머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끝없는 황금빛 바다 옆을 쭉 가다 드디어 마주한 거대한 팻말엔,

[라티아, 배부른 땅.]

필기체로 휘갈겨 쓴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 팻말을 지나치기 무섭게 우리 시몬 바스티유는 지금까지 옥죄어 오던 긴장감들을 풀고 좀 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작은 공터에 멈춰 섰다.

그 날카롭고 까다로운 재키마저도 활짝 웃으며 안나 아주머니 말을 따라 간이천막을 치고,

시몬과 매튜 아저씨는 나란히 앉아 자기 발이 가죽 부츠와 한 몸이 되어있진 않은 지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있다.

그 사이에서 풀어헤친 마차 짐칸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던 나는,

불쑥 내 옆에 앉은 맥레인 때문에 퍼뜩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날 내려보다가 이내 짧게,

“따라와.”

자기 할 말만 하곤 벌떡 일어나 저 멀리 걸어갔다.

난 서둘러 걸터앉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말 안장에 달려 있던 검집을 꺼내 허리에 단단히 채우고 그 뒤를 따랐다.

이젠 알고 있거든.

그가 뭐 때문에 날 부르는지.

그런데 맥레인은 한참이나 공터를 가로질러 가다가 그 너머 숲에까지 들어가 버렸다.

마치 공터에 머무르는 가족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려는 듯이.

그 이상한 뉘앙스에 뒤따르는 내 발걸음도 점점 무거워졌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했다.

한참,

숲을 가로질러 작게 드러난 들로 들어서자.

그제야 그곳에 우뚝 멈춰 선 맥레인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해봐.”

“무엇을요?”

“구름 위에서 네가 보여줬던 거 말이야.”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어찌…,

나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고쳐잡고 허리춤에 잠들어 있던 검을 깨웠다.

스릉.

검집에서 미끄러져 나온 은빛 폭포가 날카롭게 쏟아진다.

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질적인 무게감.

그러나 그 희박한 무게감 속에서 빛을 발하는 균형.

잠깐 잡아봤던 경험치고는,

그 검은 내 손에 완전히 익은 것처럼 느껴졌다.

양손으로 세워 잡은 롱소드를 한쪽 어깨로 당겨 자세 잡은 나는,

이제 구름 위에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려지지 않는다.

그땐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으니까.

그럼 그 순간 내 본능은 무엇을 떠올리고 있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

그 기억 뒤편에 드리워진 그림자라도 끄집어내야지.

직선,

사선,

점.

구름에 오르기 전 맥레인이 내게 보여줬던 그 황홀한 경지의 단편을 떠올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선 나는 자루를 잡은 손을 슬쩍 느슨하게 한 채로.

검을 휘둘렀다.

휘두름에 있어서 거스름이 느껴지는 모든 것을 빼놓고, 자유롭게 유영하듯 내 몸이 원하는 대로.

내 힘으로 휘두른 검이 나아가는 방향을,

다시 내 몸으로 억제하는 것은 거스름이기에.

순응해야지.

검의 움직임을 몸이 따라가야지.

하지만 끝내 검의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엔,

다시 내 의지를 표출해야지.

강하게,

부드럽게,

날카롭게.

* * *

무기를 다루는 것은 그림을 그리고자 펜과 붓을 놀리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그림을 그릴 때 그 시작이 어떻나?

지겹도록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중 열의 아홉은 깨닫지.

나는 선조차 잘 못 그리는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그 선 긋는 게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그럼 남은 열의 하나는?

이미 선을 긋는데 확신이 있는 자였던 거지.

그래서 그 확신에 찬 선으로 벌써 남들을 설득할 만큼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거다.

그런데 남들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그림을 그리는 건 또 다른 얘기다.

심지어 설득당할 만큼 매혹적인 의견이라면?

동시에,

그 의견이 세상에는 없던 충격적이고 새로운 것이라면?

나는 비로소 확실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 설득에 한 무기를 다루는 전사로서 통감했다.

통한다.

통할뿐더러 세상을 관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석이건, 신비한 체질을 가진 몸이건.

그 모든 건 저 찬란한 의견에 비하면 거름조차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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