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재 (4)
맥레인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초점 잃은 눈으로 무언가를 계속 떠올리듯, 여기까지 생각하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몰두한 그 앞에서.
난 그저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 허리춤에 있던 가죽 물통을 들더니 내게 손짓한다.
“디안, 가서 내 말 좀 끌고 와 봐.”
그 말에 쏜살같이 달려가 잿빛 털을 가진 맥레인의 늙은 말을 끌고 돌아오자,
그는 곧바로 안장주머니에서 오래된 짐승 가죽을 꺼내 거기에 물을 끼얹었다.
이제 흠뻑 젖은 가죽을 한차례 짜낸 그가 다시 내게 손을 내민다.
“네 검을 줘봐.”
스릉.
다시금 검집에서 미끄러지듯 쏟아진 은빛 폭포.
그는 검을 받아들기 무섭게 도신을 젖은 가죽으로 감쌌다.
“숲에서 만든 검은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워서 잘 먹힐진 모르겠지만, 이드리의 가죽이라면 그래도 조금은 버텨주겠지.”
가죽을 끈으로 여러 차례 고정한 그는 다시 내게 검을 돌려주었다.
“이제 선 긋기는 너에게 의미가 없어, 지금부터는 여러 검술의 스탠스를 배운다.”
“검술의 스탠스?”
“일반적으론 검술에 필요한 행동이란 뜻이지만 검 쓰는 놈들 사이에선 족보라는 뜻으로 통한다.”
족보?
의문투성이인 내 얼굴을 본 맥레인이 담담하게 설명을 이었다.
“족보란 여러 행동 중 특정 행동들을 연결해 만든 가장 편리하면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기술들이야. 비단 검 쓰는 놈뿐만 아니라 무기를 다루는 자라면 내가 말한 족보 같은 걸 모두 다 가지고 있지.”
“한마디로 한 검술의 스탠스라는 건, 그 검술의 기술적 집약체란 소립니까?”
“이해가 빠르군.”
맥레인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대번에 안장에서 낡은 검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꼿꼿이 세운 허리.
무릎보다 아래로 내려가 있는 칼끝.
순식간에 그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자세에서 나오는 흉흉한 압박감은 단숨에 내 어깨를 돌처럼 굳게 만들었다.
과연,
지금부터는 저런 무시무시한 것들을 배우게 된단 말인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가죽으로 둘러싸인 칼끝을 무릎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맥레인이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날 벌레 보듯 쳐다본다.
“뭐 하는 거야?”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처음 취해본 자세인데 능숙한 모습을 보이는 건 무리가 있지 않은가?!
“뭐 하는 거냐고.”
“스탠스를 가르쳐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배우게 될 거라고 했지, 네가 가진 그 검술로 말이야.”
순간,
머리가 띵했다.
“네가 가진 것으로 여러 스탠스를 겪고 익히는 거야, 그렇게 해서 네 걸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지. 남들 걸 따라 할 거였으면 네 검을 그런 꼴로 만들지도 않았어.”
맥레인이 내 검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왜 네 검을 가죽으로 둘러맸는지. 네 검이 어디로 튈지 내가 모르잖아, 그건 날 보호하기 위해 씌운 거야. 반대로 나는 왜 검에 아무런 장치도 안 했을까?”
이내 그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건 내가 지금 네 스승 노릇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그는 모든 행동을 통제하면서 내게 칼끝 하나 닿지 않게 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니까.
모든 순간순간이 뼈저리구나!
“에드리지 리히트 일 번.”
맥레인은 내게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단숨에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다.
팍!
맞부딪힌 검으로부터 느껴지는 요동, 그 반동으로 순식간에 쥐 난 듯 저리는 양 손목.
짧은 보폭에서 나왔으리라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이다…!
“에드리지 리히트 일 번.”
채 반동을 수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짧은 보폭으로 내 지척까지 다가와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똑같이 올려 베었다.
부딪치는 게 손해라고 판단한 나는 곧바로 땅을 차 뒤로 물러났지만,
“에드리지 리히트 삼 번.”
그는 기다렸다는 깊은 보폭으로 찌르듯 다가와 도신 상부를 쥔 채 자루를 든 손으로 내 가슴을 후려쳤다.
뻑!
“컥…!”
손이 아니다,
쥐고 있던 자루 위 가드가 화살처럼 내 가슴에 꽂힌 거다.
그대로 상체가 무너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숨이 쉬어지질 않아.
“커헉… 컥!”
“에드리지 리히트 육 번.”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맥레인은 깊었던 보폭을 물림과 동시에 거기서 얻은 신체 반동으로 내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아니,
검은 내 얼굴 옆에 아슬아슬 박혀 있다.
“… 헉… 헉….”
“이게 에드리지 리히트의 기초 스탠스다. 정석적이지만 강하지. 하지만 방금 건 그렇게 빨리하지도 않았고 위력도 절반 정도 줄인 거다.”
그렇게 말한 맥레인은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들고는 대뜸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때, 기초 없이 막싸움만 하는 용병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지?”
사실 구름 위에서 있었던 그 순간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맞는 말이야.
확실히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아.
나는 묵묵히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상대가 달라도 넌 달라지면 안 돼. 구름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지라고.”
그 말과 함께 우악스러운 힘으로 번쩍 들어 올려진 나는 다시 검을 고쳐잡았다.
그 모습을 본 맥레인도 슬슬 본격적인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세를 잡는다.
“에드리지 리히트 일 번.”
내가 가진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검을 쫓는 것,
멈춘 검을 다시 내가 이끄는 것.
맹렬하게 솟아오르는 맥레인의 검을 비스듬히 받아친다.
팍!
맞부딪힌 충격에 잡고 있던 검이 일순간 뒤로 고꾸라진다.
난 그걸 감내하며 다시 고쳐잡지 않을 거다.
고꾸라지면 고꾸라진 대로, 기울어지면 기울어진 대로.
오히려 내 몸을 검의 움직임에 맡길 거야.
그렇게,
이제 검의 움직임이 멈출 때쯤엔.
애초에 그런 휘두름이 세상에 존재했었던 것처럼.
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실어 휘두르자.
검이 나를 따라오듯이.
* * *
기민한 동작을 하며 상대의 공격에 반격을 집어넣는 검술은 많다.
하지만 반격의 골자는 방어에 있어.
그러니까 반격은 방어라는 반석을 밑에 깔고 들어가는 행위인 거다.
부딪힘이 없더라도 그 뉘앙스라는 게 있잖나?
방어적인 보폭, 행동, 기세등등.
그 모든 방어적 성향을 기조로 기회를 잡는 것이 반격일진데.
이건 달라.
직접 부딪혀보니 속속들이 알겠다.
녀석이 하는 검술엔,
앞서 말한 모든 것의 경계가 아예 없어.
“헉…! 헉…!”
디안은 한참이나 숨을 고르더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뒤늦게 파악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같은 검사로서 얄미울 정도다.
가죽으로 둘러싸인 디안의 검은 정확히 내 목을 향해 있었다.
난 분명 그의 검과 부딪쳤다.
근데 마치 물을 베는 듯한 느낌이었어.
놈은 정말 말 그대로 물처럼 흐르듯이 내게 검을 들이민 거다.
부딪히고,
그 이후에 공격적, 방어적 행동을 내비치는 게 일반 검사들의 싸움이라면.
부딪히고,
모든 인과적 과정을 생략하고 문자 그대로 상대에게 검을 겨눈다는 결과만이 남는.
화약이 판치는 용의 시대에서조차 능히 경악할만한 검술.
하지만 한 가지 더,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다.
“왜 마무리를 안 짓는 거지?”
내 물음에 디안은 그 자세 그대로 시선을 옮겨 자기 발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무리를 못 지으니까요.”
그의 발목엔,
내 검이 닿아있었다.
“제 검술이 아무리 특이한들, 적어도 저보다 나이 많은 검술의 스탠스를 한순간에 파훼한다는 건 무리죠.”
씨발 합격이다.
라고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솔직히,
검사로서, 전사로서.
그리고 과거에 기사로서.
투쟁을 업으로 삼았던 삶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은 느낌이 들 정도다.
보석?
좆 까라지.
상처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몸?
그딴 건 오히려 성가신 장애물이야.
그냥 디안이라는 저놈 자체가 진짜인 거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모든 부분을 잊어버리리라 맹세했는데.
미안하다, 메리안.
한 번만 더,
과거 속 내 모습에 투신해야겠다.
* * *
라티아의 밤은 따스했다.
지력을 양분 삼아 뜨겁게 박동하는 곡식들이 사방에 깔려 있어서였을까.
어쩌면 저 밤하늘에 유독 빛나는 별,
격하게 뜨겁다는 뜻을 가진 이지칼리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음에도 덜덜 떨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만 두고 다 떠난 것 같은데요.”
마차가 있었던 곳에 도착했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 우리가 종일 숲에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마찬가지로 땀범벅이 된 맥레인이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물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다리다 보면 가족 중 한 명쯤은 보러 와 주겠지.”
“그렇겠죠?”
그를 따라 나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완전히 방전됐어.
처음 자유를 만끽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체력이 많이 붙었고, 거기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는데.
맥레인에게 가르침을 받는 날이면 늘 체력의 한계를 맛봐야 하는 꼴이라니.
“벤투스, 이리온.”
처음 들어보는 맥레인의 다정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다각 다각.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늙은 말.
그렇게 그는 말없이 안장주머니에서 꺼낸 생무를 말에게 먹였다.
그리곤 하나를 더 꺼내 이번엔 그가 오독오독 씹어먹는다.
“저도 주세요.”
“싫어.”
오독오독.
크게 한입 베어 물고는 한참이나 오독거린 맥레인이 말없이 안장주머니에서 생무 하나를 꺼내 내게 던져주었다.
난 그것을 받아들고 허겁지겁 베어먹었다.
오독오독,
오독오독.
시원하고 달다.
입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듣기 좋고.
마치 주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곤충들과 합창하는 것 같은 기분.
그렇게 마지막 한입을 먹으려는데,
푸흥.
하고 벤투스가 다가와 남은 생무 한 조각에 침을 질질 흘렸다.
“야, 이거 내 건데!”
푸흐흥.
침이 묻었으니 자기 거라는 듯 위풍당당한 표정을 짓는 녀석을 보고,
결국엔 설득당해 남은 한 조각을 놈의 입에 넣어주었다.
“네 말엔 아직 이름 안 지어줬냐?”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내 대답에 맥레인은 불붙인 연초를 한 번 빤 뒤 씁쓸한 미소와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하긴, 쉴 틈 없이 바빴지. 특히 네가.”
“그래서 더 좋아요.”
“뭐가 좋아, 만약 우리가 널 이용해 먹는 거라면?”
“상관없어요, 가족이니까.”
“맘 편한 소리나 하고 있네, 호구처럼 살지 마.”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한 순간쯤은 호구처럼도 살아봐야죠.”
내 말에 피식 웃던 그가 넌지시 묻는다.
“가족은 있었냐? 그러니까…, 세공소에 들어가기 전에.”
“누나가 한 명 있었어요.”
“그래…,”
맥레인은 더는 내게 묻지 않았다.
그러다 다 태운 연초를 땅에 비벼 끈 맥레인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사실은 호구야, 세상에 둘도 없는 호구 새끼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시몬은 무슨 일이 터졌다 하면 늘 나만 찾아, 또 엔제이 똥을 닦아주는 사람도 나뿐이고. 물론 내가 자처한 거도 있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시몬 바스티유의 해결사가 돼버렸지 뭐야.”
“그래서 후회하세요?”
“아니.”
맥레인은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다가,
결국엔 내게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족이니까.”
맥레인이 처음으로 나와 동감해주었다.
제법 좋은 기분이구나,
어렴풋이 그 옛날, 누나로부터 받은 특유의 연대감이 떠오르는 듯한 기분.
해서 갑자기 그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심장을 관통당한 날, 꿈에서 잃어버렸던 기억들을 모두 다 찾았어요.”
그 말에 맥레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모르겠어요, 그냥 끝엔 모든 게 다 재뿐이었어. 쓸쓸하고 외롭고, 시커먼.”
그러자 맥레인이 손가락으로 저 건너편에 드높이 피어오른 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찬란함을 꽃피우기 위해서 땅은 무엇을 필요로 했을까?”
“글쎄요.”
“일단은 땅에 먹일 거름이 필요하겠지.”
“그렇겠죠.”
“그 거름 중엔 네가 말하는 재도 포함되어있어.”
“…….”
“아무것도 없는 그런 쓸쓸하고 무자비한 과거 속에서 일단은 네가 나왔잖아. 아직 애송이에 볼품은 없지만.”
그의 애정 어린 비아냥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네가 저 장성한 밭처럼, 아니 그보다 더 찬란하게 빛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네가 말하는 그 재는 결국 널 위한 거름이 되어 줄 거다.”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찬란해 지면 되겠구나.
한참 생각에 잠겨있는데.
찌르르,
찌르르.
따듯한 밤하늘 위로 익숙한 새소리가 들려온다.
“자, 이만 가 보자고. 우리 식구들이 얼마나 멋지게 터를 잡아놨는지 봐야지.”
“네, 맥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