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수확
수많은 검술을 마스터했다.
각 검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스탠스 역시 마찬가지.
어디 그 뿐인가?
상황에 맞춰 두 스탠스 이상을 조합해가며 그 가짓수가 무한에 가까운 검술을 펼치고 다녔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 둘도 없는, 기사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칭호도 손에 얻었었다.
‘글라디옴’
모든 검을 통달한 자.
과거엔 맥레인 베나즈로 불리는 것보다 저 칭호로 불렸던 적이 훨씬 많았었지.
본디 검술이란 것은 뿌리 깊은 정신이 벼려낸 근본 같은 거다.
그러니까 보통은 가문에 의해서 그 근본적인 검술들이 완성됐고, 정말 극소수만이 비전 형태로 남아 비밀리에 명맥이 유지되었지.
둘의 차이를 나누자면,
가문에 의해 완성된 검술은 그 원형, 그러니까 기본적인 골자가 영원토록 남지만,
비전은 말 그대로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 원형이 한 세대도 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가문에 의해 완성된 검술이라도 그 원형이 무조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창시자만이 다룰 수 있는 고난도의 검술이었거나, 전대 원형이 가졌던 단점을 현대가 보완하여 살을 붙였거나 하는 사례도 있었으니까.
아니면 개방적인 성향의 가문이 다른 검술 가문과 혈연관계를 맺으며 근본을 확장한 사례도 있겠지.
디안의 검술은…,
굳이 따지고 본다면 비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보고 따라 할 순 있겠지만 원형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그러니까 누구도 그 근본을 파헤칠 수 없는 종류의 검술.
전통이 남을 수 없는 검술이나,
전설을 남길 수 있는 검술.
그렇다면 디안의 검술이 가진 특징은 무엇일까.
이건 거창하게 따지고 들 필요 없이 아주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검술을 부정하는 것’
그래, 이거다.
디안의 검술은 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검술을 부정하기 위해 나타난 어떤 현상에 가까운 수준이야.
그 정도 수준이니 내가 그의 태생이니 가지고 있는 몸의 특징 같은 것들을 좋게 보지 않을 수밖에.
찬란함은 덜 찬란한 것에 의해 탁해지기 마련이니까.
몸의 특징이야 초장에 두들겨 패버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 감을 잡게 해놨지만,
문제는 그의 태생이야.
학대받으며 보석으로 세공되었고, 그와 관련해서 신체에 누적되었을 것들이 나중에 어떤 형식으로든 그의 발목을 잡기라도 한다면.
…, 그럴 일이 없게 해야겠지.
적어도 내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놔야겠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놈에게 이렇게 신경을 쏟아붓기 시작한 건지.
아니, 정확히는 아직.
과거에 기사로서, 검을 잡은 사람으로서 그가 가진 새로운 검술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거라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물론 결과적으론…,
은화 한 개,
그리고 줏대 없이 공감해버린 그의 상실감에 뭣도 모르고 내 것을 팔아버린 게 문제이긴 하겠지만.
* * *
이른 아침부터 맥레인과 한바탕 검을 부딪쳤다.
그는 언제나 절묘한 선을 지키며 날 압박했고, 그 덕에 나는 매 순간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낡은 아밍 소드 하나를 가지고 변화무쌍한 검술을 펼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대적하고 있는 그 순간에조차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다.
나는 매 순간 더 예리해져야만 했으며,
그래야만 맥레인은 그다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가 보여주는 그다음이라는 것에 끝이란 없어 보였다.
“팔라가스 12연.”
눈을 번뜩인 맥레인이 짧은 보폭을 연달아 옮기며 엄청난 속도로 날 옥죄어온다.
여러 방향으로 베기를 반복하는 단순한 동작이지만 모든 행위가 공격과 방어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짧게 나뉜, 앞으로 향하는 보폭이 앞서 말한 단순한 동작을 변칙적으로 탈바꿈해주었다.
실로 잘 버무려 만들어진 검술이다.
작은 회오리를 코앞에서 목도 한 기분이야.
하지만 내 검술은 상대의 기세를 편승하는 것.
짧지만 맥레인과 여러 번 검을 나누면서 내린,
내가 가진 것에 대한 분석과 그에 따른 결론이다.
큰 보폭으로 단숨에 맥레인의 품으로 기어들어 간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검과 맞부딪쳤다.
착!
부딪침과 동시에 검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반동, 그 반동을 주축으로 본능에 몸을 맡겨 몸을 한 바퀴 회전한다.
이 부분은 도저히 내가 어떻게 판단 내릴 수 없었다.
눈 깜빡임과 같이 몸에 내재 된 어떤 필연적인 본능처럼 느껴졌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일련의 동작이 상대의 호흡에 맞춰 이뤄진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상대의 한 호흡 사이에 검을 겨눌 수 있는 절대적인 결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의 호흡이 짧고 강할수록,
그 기세에 편승한 내 검술도 빠르고 강해지는 거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맥레인의 호흡과 그 호흡 사이에 끼어든 내 동작이 맞물려 마무리될 때쯤.
나는 내 검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금 그 부딪침으로 결국 도신을 덮고 있던 가죽이 찢어져 버린 거다.
가죽이라는 보호장치를 믿고 마음껏 내질렀는데, 이건 맥레인이 피하지 않으면 다칠지도 몰라!
당연히 맥레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렇담 그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마무리 지어주겠…,
“이런 씨벌!”
일순간.
그가 들고 있던 낡은 아밍 소드의 도신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반짝임에 먹먹해진 두 눈이 잠잠해졌을 땐.
“허… 허컥….”
등 전체에 뜨거운 통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뭐였지?
뭔가 엄청난 힘이 날 밀친 것 같았는데.
“야, 괜찮아?!”
뒤이어 맥레인이 놀란 눈으로 허겁지겁 달려온다.
상황을 살펴보니 맥레인이 처음 서 있었던 곳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날아간 건가?
중간에 나무가 없었으면 아마 그보다 더 멀리 날아갔을지도.
“어쩔 수 없었어, 내 본래 호흡으로 상대했다면 네가 베였을 거고. 그렇다고 그대로 네 검에 내가 베일 수는 없잖아?”
맞는 말씀입니다요.
“윽…, 그래서 방금 그게 대체 뭔데요…?”
죽을 맛이다.
잔뜩 표정을 일그러트리는데 맥레인은 뭐가 그리 웃긴지 낄낄거린다.
“그건 수확이 끝나면 알려줄게.”
그건 또 뭔데?
숨이 턱 막혀 제대로 대답도 못 하는 내 뒷덜미를 잡고 번쩍 일으켜 세운 맥레인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걸레짝이 된 가죽을 집어 올렸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너무 안일했던 거 같아. 숲에서 만들어진 검을 이런 가죽으로 감싸놓곤 안전하다 떠들어 댔었다니.”
당신이 이렇게 하면 안전할 거라며.
결국엔 통증에 겨워 올라온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나는 그대로 나무에 기댄 채.
“우… 우웨엑!”
“야, 진짜 괜찮아?!”
* * *
햇살을 닮은 머리카락을 뒤로 바짝 묶은 케니가 자기 가방에서 작은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그게 뭐야?”
“북쪽 추위.”
이게 말로만 들었던 날씨 파편이란 건가?
구름 위에서 하인이 어떤 유리병을 여는 것까진 봤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다.
작고 투명한 유리병 안엔,
실루엣에 가까운 어떤 흰 결이 둥둥 떠 있다.
케니는 그 유리병의 뚜껑을 아주 살짝 열고는 그대로 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에 부었다.
그리곤 가죽 주머니를 뒤흔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각자각,
안에서 딱딱한 소리가 들려온다.
순식간에 얼어버린 건가?
채 질문하기도 전에 케니는 마치 야단치듯 단호하게 내 뒷덜미에 가죽 주머니를 얹었다.
“으, 차가.”
“참아! 얼마 전에 그렇게 크게 다쳐서 사경을 헤매놓고, 이렇게 또 멍투성이로 와?!”
케니의 잔소리는 꽤 낯선데.
그래도 나쁘진 않아.
오래전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고마워.”
진심으로 그녀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래도 풀리지 않았는지, 케니는 얼음주머니로 날 때리듯 등 이곳저곳에 두들겼다.
“아마 오늘 수확을 할 것 같은데, 그때 연고도 같이 사자.”
“하루면 다 없어질 텐데.”
짝!
“아악!”
케니의 손바닥이 꽤 맵다. 등에 불을 올린 것 같아.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다쳐서 오면 다음 날까지 끙끙거리며 아플 거잖아!”
“알겠어, 케니.”
“요즘 부쩍 디안이 달라진 것 같아.”
그녀가 좀 서운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래 들어 갑자기 몸도 커지고 좀 투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딱 맥레인화 되는 것 같아!”
욕인가?
칭찬은 아닌 게 확실한데.
“나도 이제 가족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케니.”
“넌 그래도 영원히 동생 같을 줄 알았는데.”
“케니가 첫날에 나한테 그랬지, 나는 나라고. 내 지금 모습이 중요한 거라고. 난 언제나 디안으로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그 말에 케니가 금방 볼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곤 한참 동안 말없이 얼음주머니로 내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나저나,
“케니, 수확이란 게 뭐야?”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큰 작업이 끝나면 거기서 얻은 물건들을 파는 거야. 그걸 수확이라고 불러. 아주 옛날부터 쓰던 무법자들의 은어라고 들었어.”
그랬구나.
“디안 너도 몸이 괜찮으면 수확하러 같이 갈래? 매튜 아저씨 말을 들어봤는데 지역이 지역인지라 여기엔 아직 우리에 대한 수배령조차 안 떨어졌데.”
애초에 공식적으로 앤서니가 우릴 쫓을 명분은 없다.
구름 위에서 벌어진 일들은 다 비공식적인 것들이었으니까. 결정적으로 장소가 중립지역 상공이기도 했고.
하지만 바꿔 말하면 수배령이 아닌 따로 용병을 풀어 우릴 쫓을 가능성은 늘 열려있는 셈이다.
뭐 케니의 말대로,
지역이 지역인지라 그 가능성조차 희박하게 됐지만.
“당연히 가야지, 나도 수확하는 걸 보고 싶어.”
그제야 케니는 늘 보여줬던 시원한 미소로 화답했다.
* * *
마차에 장정들이 달려들어 빼놓았던 바퀴를 하나둘 연결했다.
대부분이 들떠있는 모습이었기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늘 안나 아주머니와 함께 캠프에 머물러 있던 버드가 이 수확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던 거다.
버드 두에리.
네 개 지역을 합쳐 사기 전과 38범, 탈옥 2회.
막상 사기로 취한 이득은 전무.
얻은 재물을 민가에 뿌리는 등의 기행을 일삼고 다녔으며, 덕분에 교수형에 세 번이나 처해졌으나, 애석하게도 집행인 셋 모두가 그를 돕는 바람에 살아남은.
기인.
그런데 그런 사람치고 인상이 너무나 둥글둥글하고 선하다.
짧고 거친 잿빛 머리와 잘 정돈된 짙은 눈썹, 뭉툭한 코.
살면서 어디선가 마주쳤을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가진 그가 앞서 말한 화려한 전적을 가진 사람이라니.
“버드! 이거 죄다 값나가는 거니까 제대로 받아야 해! 알지?!”
차장 자리에 앉은 버드를 향해 재키가 큰소리치며 말하자,
“장물이면 본래 값에 십 분의 일도 받기 힘들지만 난 그걸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지.”
그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가볍게 대꾸할 뿐이다.
이내 쾌활한 목소리로 외치는 버드.
“자, 같이 갈 사람은 어서 타라고! 수확 철이다!”
그 말에 신나서 올라타는 촙과 안드레, 케니.
안나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도 이미 가장 안쪽에 타 있었다.
그렇게 나도 얼른 그들을 따라 마차에 오르려 하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맥레인이 내게 손짓했다.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아니, 너한테 필요한 거겠지. 가서 책을 좀 사와.”
“책?”
그는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적은 종이를 내게 건넸다.
그 종이엔,
[용의 시대]
[강철의 연대기]
[오스페리지의 무기 연감, 991]
[볼스피티의 딱딱한 도감]
“이걸 다요? 이런 책을 파는 곳이 있긴 할까요?”
내 물음에 마차에 타 있던 매튜 아저씨가 대신 답했다.
“라티아라면 있을 거다. 중립지역에 몇 남지 않은 지성의 최후 보루 같은 곳이니까.”
그렇다면,
이런 것에 빠삭한 전문가를 데리고 가야겠지.
“비질라!”
저 멀리서 우리를 멀뚱멀뚱 보고 있던 비질라가 내 부름에 화들짝 놀란다.
“나랑 같이 가자.”
그 말에 맥레인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괜히 갔다가 상처받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상처 준 쪽은 각오해야 할걸요.”
내 단호한 대답에 맥레인은 저도 모르게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와 같이 비질라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처음 겪어보는 일에 잔뜩 흥분했는지, 비질라가 반색이 되어 내게 쏜살같이 달려온다.
“다 탔나? 출발한다?!”
버드의 말을 끝으로,
얼굴을 가로지르는 그 큰 흉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맑게 웃은 비질라가 크게 소리치며 대답했다.
“출발!”
절벽 위에 걸쳐있는 캠프를 벗어나, 바퀴가 흙먼지를 토해낸다.
이내 바삐 수확을 준비하는 황금밭을 지나쳐,
외벽의 부제로 이곳이 평화의 땅이란 걸 증명하는 거대한 도시를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