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수확 (2)
“첫째, 우린 낯선 이방인이다. 둘째, 심지어 우린 무법자다. 셋째, 우린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넷째, 그래서 우린 눈에 띄는 짓을 하지 않을 거다.”
마차에 내리기 전,
매튜 아저씨가 단호한 표정으로 동행한 모두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 진지함이 무색하게,
마차 안 젊은이들은 들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마차 밖으로 튀어 나갈 기세였다.
그중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대한 정착지에 켜켜이 쌓인 문명은 그 자체로 최고의 즐길 거리였으니까.
그 이글거리는 눈빛에 살짝 데이기라도 했을까, 흠칫 놀란 매튜 아저씨는 졌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너희들 모두 고생했고, 그만큼 그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겠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물건을 처분하지 못했으니….”
이내,
매튜 아저씨의 안주머니에서 나온 반짝임.
그 반짝임에 모두가 미소짓는다.
“이 늙은이가 젊은이들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밖에.”
매튜 아저씨의 손가락에서 튕겨 나온 금빛 동전 하나.
촙이 그것을 낚아채 잡았다.
“적당히 놀아라, 해가 익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출발할 거니까. 그전까지 이곳에 꼭 모이도록 해. 참고로 여기서 캠프까지 걸어가려면 한 시간은 넘게 걸어야 할 거다. 그리고 촙, 네가 제일 연장자이니까 모범을 보여라. 환전해서 정확히 머릿수대로 나눠 줘.”
“걱정하지 마세요, 매튜 아저씨.”
그렇게 말을 하고도 아직 걱정인지 입술을 움찔거리던 매튜 아저씨는 결국 말없이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 * *
“저것들 달려나가는 게 꼭 오베라가스에 있는 경주마들 같지 않습니까, 매튜?”
고삐를 내리친 버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물음에 매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는다.
“그보다 더하지 싶은데, 젊은 혈기라는 건 건기에 불어닥친 산불처럼 빠르고 뜨겁잖나.”
이어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나가 입을 열었다.
“전 재산을 그렇게 덜컥 주면 어떻게 해요, 매튜. 저러다 혹시 험한 일을 당하면 어쩌려고요.”
그 말에 버드가 능글맞게 대꾸한다.
“안나, 당신은 너무 다정해서 문제야. 물론 아직 다들 어리긴 하지만 그들은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남은 무법자들이라고.”
“아이들에게 구태여 무법자란 이름을 붙이지 마, 버드. 적어도 우리만큼은 그들을 부드럽게 대해줘야지.”
“하하, 알겠어.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촙을 잘 알잖아? 그 유명한 밧드렛 최고의 주먹이었던 아이라고! 디안은 또 어떻고? 하루가 다르게 장성해지잖아.”
“그만, 버드. 그래도 내 눈엔 다들 아직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아이들로밖에 안 보여.”
“아이고, 알겠습니다. 마마!”
결국엔 잠자코 있던 매튜가 입을 열었다.
“안나, 저 아이들은 해낸 일에 따른 당연한 대가를 받은 것뿐이야. 요즘은 그 지극히 당연한 것들조차 이뤄지기 힘든 세상이잖나. 비록 빌어먹을 무법자일지언정 나는 그들에게 그 당연함을 가르쳐주고 싶네.”
“잘 알겠어요, 매튜. 제가 너무 예민했나 봐요.”
안나는 그런 매튜의 말에 피식 웃으며 한층 누그러졌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버드, 이 정도 물건들이면 값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꽤 클 겁니다. 기업가들의 사치품이니까요. 애초에 원주인에게도 그리 떳떳한 물건들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기업가라니, 저희 조직이 이젠 기업가들까지 상대하는 겁니까?”
“전에는 꿈도 못 꿨지, 하지만 디안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많은 게 바뀌었어.”
매튜는 그 말을 끝으로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을 일관했다.
* * *
무슨 일인지 촙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다가왔다.
“이 새끼들이 사기를 치는 거 같아. 금화 하나에 은화 140개밖에 안 되는 게 말이 돼?!”
그러자 케니가 촙의 손에 들려 있던 금화를 뺏더니 순식간에 주도권을 잡고 휘두르기 시작한다.
“환전해주는 곳이 그곳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두가 케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케니는 한창 여러 상점가를 관찰하며 다니다가 순식간에 한 곳을 골라 들어가서는,
금화 하나를 은화 170개로 환전해내었다.
“우리가 다섯이니까 인당 34개로 나눠야겠지만, 내 덕에 후하게 환전을 받았으니까 은화 하나씩 떼어갈게. 불만 없지?”
그러자 비질라가 깜짝 놀라 그 여린 손가락으로 자길 가리키며 묻는다.
“나한테도 그렇게 주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비질라 너도 자격이 있어.”
케니는 그런 비질라를 보며 활짝 웃는다.
“그래서, 다들 동의하는 거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촙과 안드레, 그리고 나는 말 없이 그녀에게 공손히 두 손을 내밀 뿐이었다.
꽤 묵직한 돈주머니를 받고 보니 괜히 기분이 좋구나.
그러고 보니,
아직 내 말 안장주머니에 쓰지 못한 돈이 더 남아있었지 참.
“자 그럼 해산할까?”
받은 돈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한껏 의기양양해진 촙이 우리 모두에게 말하자,
케니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오히려 그를 쏘아붙였다.
“촙과 안드레는 나랑 좀 같이 다녀줘야겠는데.”
“뭐? 왜!”
즉각 반발하는 촙과는 달리, 안드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사야 할 물건들이 꽤 많아서 말이야, 어차피 여기서 머물 동안은 언제든 와서 돈을 쓸 수 있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내 짐꾼 좀 되어줘.”
“그러니까 왜 하필 지금인데?”
“왜냐면 나에게 꽁으로 은화 네 개가 더 들어왔으니까? 어쩌면 너희에게 수고비로 은화 두 개씩 나눠줄지도 모르고.”
“가시죠, 아가씨.”
촙이 허리를 푹 숙였다.
“그럼 오늘은 매튜 아저씨 말대로 해가 기울어 떨어지기 전까지 여기서 모이자. 디안, 비질라 잘 데리고 다녀.”
그래도 맏형이라고, 촙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촙. 이따 보자.”
그렇게 우리는 둘로 나뉘어 흩어졌다.
* * *
사람 많은 도시에 걸맞지 않게 물씬 풍겨오는 풀냄새.
넓은 땅을 감당하지 못한 듯, 듬성듬성 넓은 간격을 두고 배치된 건물들.
그러나 그 여백이 무색할 정도로 가득 찬 북적거림에 나와 비질라는 손을 꼭 잡고 다녀야만 했다.
개중에 비질라에게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난 그런 그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한껏 노려봐 주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비질라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잔뜩 신이나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모르는 게 그녀에게 더 나을지도 몰라.
한창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디안 오빠, 저기 봐!”
그녀가 대뜸 날 불러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한창 피어오르는 연기를 꼬챙이로 꿰어 흔들어대는 남자가 있었다.
주변 아이들의 시선을 모조리 훔친 그 남자는 유쾌한 표정으로 꼬챙이를 돌리기 시작했고,
곧 꼬챙이 끝에서 허연 타래가 풍성하게 맺히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세상에, 그 모든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비질라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별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구나.
“나 저게 뭔지 알아, 책에서 봤어.”
“그래? 뭔데?”
“비싼 설탕을 끓여서 나온 수증기를 추위 바른 꼬챙이에 휘감아 만든 간식이야.”
“그렇구나, 맛은 어떨까?”
“무진장 맛있을걸? 왜냐면 그 책의 주인공인 알렉산드리아는 그걸 먹고도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입에서 배어 나오는 침마저도 달콤했다고 했거든!”
“그럼 우리도 한 번 먹어볼까?”
“그래도 돼? 아니지! 나도 돈이 있었잖아!”
그 똑똑하고 야무졌던 비질라가 지금만큼은 영락없는 아이처럼 보이네.
괜히 내가 다 기분이 좋다.
“가보자.”
슬쩍 비질라의 손을 잡고 이끌자,
어느새 비질라가 앞장서서 매대에서 한껏 꼬챙이 질을 하고 있던 남자 앞에 멈춰 섰다.
살짝 걱정됐지만, 남자는 오히려 다가온 비질라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풍성하게 맺힌 타래 하나를 내밀었다.
“하나 드릴까요?”
끄덕.
비질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말했다.
그리고선 부랴부랴 그 작은 손으로 은화 하나를 쓱 내밀어 본다.
그렇게 비질라는 한 손엔 거스름돈을, 다른 한 손엔 타래를 쥐고 날갯짓을 갓 배운 새처럼 길거리를 활보했다.
“어때, 알렉산드리아가 말한 맛과 비슷한 것 같아?”
“내가 볼 때, 알렉산드리아는 비유를 참 못하는 것 같아.”
의기양양하게 말하곤 타래를 한입 크게 베어먹은 비질라는 바쁘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럼 비질라가 한 번 멋지게 비유해 주겠어?”
“설탕 타래는 끔찍이 달달 한 먹구름 같았다. 한입 가득 베어 먹으면 금세 침으로 된 소나기가 입안에서 쏟아져 내렸으니까.”
말을 마친 비질라는 다시 허겁지겁 타래를 뜯는다.
* * *
인적이 드문 거리,
그만큼 한층 차분해진 공기.
삐걱삐걱.
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이따금 열리는 가게 문틈에선 오래된 종이 냄새가 진하게 풍겨온다.
그 가운데 입가에 설탕을 묻힌 채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비질라는 잡고 있던 내 손을 좀 더 꽉 쥔 채.
나보다 먼저 씩씩한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간판에 달이 그려진 서점은 다른 서점보다 고서를 많이 가지고 있어. 우린 저기로 가야 해.”
“내가 사야 하는 책 중에 고서가 있나 보네?”
“아니, 오빠가 찾아야 하는 책들은 하나같이 다 고서야.”
간판에 달이 그려진 유일한 서점으로 가 오래된 문을 잡아당긴다.
그러면 안에서부터 퀴퀴한 양초 냄새와 낡은 나무 냄새가 우릴 반기듯 뛰쳐나온다.
곧이어 그 뒤로 로브를 걸친 비쩍 마른 사내가 유유히 걸어와 이제 막 서점 입구에 들어선 우리를 맞이했다.
“미안하지만 그것을 가지곤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아차,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얼른 벨트를 풀고 매고 있던 검을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어 보일 뿐이었다.
“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곤 턱짓으로 물건을 가리키듯,
내 옆의 비질라를 콕 찍는다.
“제가 말한 건 ‘저것’입니다.”
슬쩍.
겁먹은 비질라가 내 소매를 잡고 뒤로 숨는다.
난 그런 그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 ‘저것’은 이런 검이나 신은 부츠 따위 같은 것들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것과 저것엔 당신 뒤에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요.”
“무례하군요.”
“반대로 당신은 지성 앞에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저건 지성에 대한 모욕이에요. 책은 배우고자 하는 자들을 위한 문이지,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자들을 위한 문이 아니오.”
불현듯 가사 한 소절이 딱 떠오르는구나.
그 가사에 살을 붙여볼까.
“당신 멋대로 만든 잣대를 그 문의 빗장으로 쓰지 마십시오”남자가 내 말에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든 이 서점은 내 것이니 내 말을 따라줬으면 좋겠구려. 어디 가문의 자제분이신지는 모르겠으나 설령 책값을 착실히 낸다고 한들 저것을 통해 내 서점의 책을 소비시킬 맘은 없소.”
오늘 하루만큼은 비질라의 그 천진함을 지켜주고 싶었는데,
세상의 시선은 채 하루도 빗겨내지 못하는구나.
나는 뒤돌아 한쪽 무릎을 꿇고 비질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나와 눈 마주치길 두려워했다.
하지만 난 그런 그녀의 두 볼을 감싸 안았다.
“비질라, 다른 곳에도 분명 있을 거야. 다른 데도 가보자.”
비질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당신의 노예가 아니었던 거요?”
“그럴 리가, 이 아이는 제 가족입니다.”
내 대답에 남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나와 같이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살짝 읍소하듯 내게 재차 말을 걸었다.
“부끄럽지만 내 틀에 박힌 편견이 몹쓸 빗장이 되어 문을 틀어막고 있었나 보오. 방금 그것을 뜯어낸 참인데 내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시겠소?”
뜻밖의 반응에,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중립지역에서 가족을 제외하고 이런 사람을 보는 게 처음이잖아.
“난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지식을 빼앗고 독점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이용하는 귀족들을 혐오해왔습니다. 당신도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인 줄 알았지. 왜, 당신은 꽤 윤택하게 생겼잖소.”
“나도 막연하지만 그런 부류를 혐오합니다. 내 가족인 비질라를 통해 어렴풋이 실상을 알게 됐으니까.”
“이거 참, 당신의 말에 탄복할 따름이오. 다음부턴 이 늙은이가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세상을 봐야겠구먼.”
늙은 남자는 조심스럽게 내가 아닌 뒤에 숨어 있던 비질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무지한 늙은이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비질라?”
그제야 비질라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엔 아직,
우리 같이 핍박받아 온 사람들이 품을 수 있는 상냥함이 남아있었구나.
이제 막 그 상냥한 한 줌을 수확한 나와 비질라는,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세월의 때 묻은 지식 속을 마음껏 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