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수확 (3)
제아무리 깊은 물이라 한들 물고기가 헤엄치는 법을 잊을까.
하물며 밤에 박힌 별들을 세던 내 눈과,
책 보기를 사람 얼굴 보듯 훑는 비질라의 눈이,
무질서한 책더미와 책장들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을 못 찾고 헤맬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찾아야 할 것들을 모두 찾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낸 네 권의 책.
세월을 한 모금 머금어 푸석해진 낡은 책은 ‘용의 시대’
겉표지가 차가운 금속 재질인 책은 ‘강철의 연대기’
표지에 여러 무기 모양이 양각된 험상궂은 책은 ‘무기 연감’
마지막으로 표지 없는 책인 ‘딱딱한 도감’까지.
그 모두를 다 챙겨 들고 노인에게 향하자 그는 말없이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얇게 꼬아놓은 줄로 단단히 포장해주었다.
“값은 절반만 받겠네.”
말없이 노인을 쳐다보자 그는 자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숙여 말을 이었다.
“내 무지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일세.”
생각해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어째서 당신 같은 사람이 이런 곳에 있는 겁니까?”
“이곳이 중립지역이니까.”
내 아리송한 표정을 살피던 노인이 인자한 주름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애석하게도 중립지역만큼 책 펴는 자유가 보장되는 곳은 얼마 없거든.”
“그렇군요.”
책 펼 자유를 위해서라니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어떤 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이런 무법지에서 지성은 일종의 안전자산이고 말이야, 누가 이런 서점을 털러 오겠나.”
“없다고는 할 수 없죠, 지성을 탐할 자유를 갈망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내 말에 노인이 호탕하게 웃는다.
“그래,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이내 살짝 굳은 얼굴을 불쑥 내민 노인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선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을 걸세. 내 자네에게 조언하나 해줄까?”
“들어서 나쁠 건 없죠, 해주십시오.”
“이곳에 오래 머물지 마, 기회를 봐서 얼른 떠나게.”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약속 장소엔 케니, 그리고 그녀와 동행했던 두 사람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들은 우리를 보고도 그렇게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묵묵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케니.
마찬가지로 심기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찌푸린 두 사람.
비질라도 상황을 직시했는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눈치만 살핀다.
조심스레 안드레에게 말을 건넸지만,
“안드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이곳에서 빠져나간 다음에 알려줄게.”
그는 잠자코 있다가 한참 뒤에나 작게 중얼거릴 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건 이 세 사람뿐만이 아냐.
느껴진다.
아까부터 우리에게 쏟아지는 노골적인 시선들이.
정확한 방향은 모르겠다, 그 수가 몇인지도 모르겠어.
맥레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난 뒤부터 부쩍 이런 설명하기 힘든 감각들이 놀랄 정도로 예민해졌지만,
시선들은 그런 내 감각의 한계를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관망하고 있는 것 같구나.
덜컥 긴장감을 집어먹고 있길 몇 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매튜 아저씨가 마차를 끌고 나타나셨다.
버드와 안나 아주머니는…,
짐칸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우릴 바라보고 있을 뿐.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거지?
이미 우리가 무법자라는 사실이 일대에 퍼지기라도 한 건가?
“타라, 얼른 캠프로 돌아가자.”
매튜 아저씨의 말에 우린 묵묵히 마차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쫓기듯 내리쳐진 고삐에,
마차는 달아나듯 도시로부터 멀어졌다.
동시에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던 그 끈적한 시선들도 하나둘 벗겨지고,
그제야 안드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해, 엄청 이상했다고.”
그 말에 촙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밖 멀어지는 도시를 노려보았다.
“뭐가 이상한데?”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재차 안드레에게 낮은 목소리 묻자,
“다.”
그는 짧고 굵게 대답하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케니를 살폈다.
케니는 한층 여유를 찾은 표정으로 애써 웃어 보였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고 싶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부풀어 오르는 궁금증을 한 수 접어둬야만 했다.
“우리에게 집이란 게 있던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촙이 웃음 섞인 말투로 입을 열자.
앞에서 고삐를 만지던 매튜 아저씨가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우리가 다 모여있으면 그게 집이지, 안 그래?”
“참, 매튜. 수확은 잘 됐어요?”
“그 얘긴 캠프에 도착하면 하자, 안드레.”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우린 캠프에 다다를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 * *
따닥따닥,
마른 장작을 씹는 모닥불 곁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시몬 바스티유의 가족들.
그 한가운데 앉아있던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버드가 마차 실려 있던 가죽 포대를 우리 앞에 가져와 내려놓았다.
“말 해봐, 버드.”
시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버드가 단검을 뽑아 포대를 쑤시자.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뽑혀 나온 단검을 따라 금빛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정확히 금화 909개. 큰 구름에서 훔친 물건 4개를 팔고 받은 돈이지.”
“허…, 미친.”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재키의 단말마를 끝으로,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른 과일을 씹던 엔제이도, 멀찌감치 앉아 화살을 손질하던 포키스도 모든 행동을 일제히 멈춘 채 눈동자를 영롱한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배부른 땅이라더니 빈말이 아니었군.”
다 태운 연초를 모닥불에 던진 맥레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버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열성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 어디서도 장물을 이렇게 비싼 값에 쳐주진 않아, 게다가 오늘 판 물건들은 다른 것에 비해 비교적 가치가 적은 것뿐이었지.”
말 끝나기 무섭게 시몬이 냉철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기서 장물을 모두 다 처분한다면 얼마가 나올 것 같나?”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지만…, 보스. 장담하는데 적어도 금화 칠천 개는 받을 겁니다.”
그 말에 턱, 하고 안드레가 입을 틀어막는다.
“다만.”
버드가 단호한 말투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오늘 처분한 물건들은 그 값이 민간 수준에서 처리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나머지 물건들은 값이 값인지라 민간 수준으론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가격을 터무니없이 후려친다면 그 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겠죠.”
잠자코 듣고 있던 시몬이 재키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재키, 우리가 군수 물자를 털었을 때 얻었던 금화가 몇 개였지?”
“대략 칠백 개 정도였을 거야, 보스.”
“맥레인, 옛날에 매튜와 셋이서 원정대를 앞질러 모스도스를 사냥했을 때는?”
“천 개 가까이 됐지, 그놈 덩치가 워낙 산 만 했으니까.”
모든 대답을 들은 시몬이 버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계속 말해 봐, 버드.”
“물건을 처분하면서 라티아에서 제법 손 큰 상인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좀 더 가치가 높은 물건을 적절한 가격에 팔고 싶다면 황금밭의 주인에게 가보라고.”
“세브리?”
“네, 맞습니다. 보스.”
“크흠.”
그 뒤로 매튜 아저씨가 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라티아의 주민들은 세브리라는 이름만 거론했다 하면 그렇게 냉소적으로 변하더군, 마치 어떤 저주나 역병을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지.”
“그래서, 매튜?”
“시몬, 세브리는 중립지역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 중의 거물이야. 그 앤서니 트와드조차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해서? 본론을 말해 봐 매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떠한 결정을 내린다면?”
시몬의 물음에 매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따라야지, 시몬 너는 우리를 이끄는 사람이니까.”
이제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던 시몬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버드, 만약 라티아보다 훨씬 남쪽으로 내려가 이 장물을 처분한다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나?”
“세브리 정도의 비호가 없는 땅이라면, 다 팔아도 금화 삼백 개 정도일 겁니다. 애초에 어딜 가도 거물급의 이름이 중간에 껴 세탁해주지 않는 이상 기업가로부터 훔친 장물이란 꼬리표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모두의 시선이 시몬을 향하고, 그 시선만큼 무거워 보이던 어깨를 한껏 편 그가.
종래에 담담하고도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입을 열었다.
“우린 언제까지고 도망만 치며 살아야 할까? 아니, 평생을 도망쳐 살아야만 할까? 천만에! 우리가 왜 모였는지 잘 생각해 봐.”
강한 어조로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말을 잇는 시몬.
“우린 억압으로부터 도망치는 대가로 자유를 사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어. 그 자유가 얼마일까? 금화 칠백 개? 천 개? 아니, 적어도 그보단 훨씬 비쌀 거다. 우리 가족이라면 그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을 테니까.”
그가 이어서 포키스를 가리켰다.
“우린 자유를 사기는커녕, 이 도망치는 삶의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부어야만 했어. 언제나 우리 뒤를 든든하게 지켜줄 포키스를 위해 금화 팔백 개짜리 활을 들려줬지. 이따금 활을 관리하기 위해서 금화 수십 개를 써야만 했고, 당장 그 관리를 위해 포키스 혼자 발품을 팔며 마을 이곳저곳을 오가며 허드렛일을 해야만 했어!”
포키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레인, 우리 가족 모두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그에겐 늘 메마른 검을 축여줄 기름이 필요해. 엔제이가 던져대는 검들은 또 어떻고? 안나는 매일 남은 식량을 어떻게 쪼개야 가족 모두에게 하루를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안나 아주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우린 언제까지고 자유를 사기는커녕 도망을 위한 삶을 위해 헌신해야만 했어! 하지만 이젠 달라, 제발 좀 그놈의 자유를 쟁취해 보자! 테리라스에서 집을 짓고, 기르는 가축을 치며, 이웃이 된 너와 내가 나란히 앉아 거품이 팍 식은 맥주를 웃으며 들이켜 보잔 말이야! 이 지긋지긋한 중립지역에서 벗어나서 무법자라는 낙인을 떼자고!”
결국엔 매튜 아저씨도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세브리가 현지인들에게 저주나 역병 같은 단어로 통해봤자 우리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어. 가서 놈에게 물건을 팔고, 그 값을 받아 조용히 남쪽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한바탕 열정을 쏟아낸 시몬은 잠시 지친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우리 모두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세브리에게 물건을 판 값은 가족의 수대로 정확히 나눠 갖는다. 그리고 중립지역에서 벗어나 이 지긋지긋한 과거로부터 손을 떼고 살아가자.”
그 말에,
내 가슴은 말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뛰었다.
그의 말만 들었을 뿐인데,
내 머리와 마음속에 과거라는 퀴퀴한 얼룩이 지워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매튜, 새벽이 밝는 대로 세브리와 접점을 찾아보도록 해. 포키스는 조금만 더 고생해 줘. 캠프 일대를 바짝 감시해야 해. 오늘 마차에 실은 금화 냄새를 맡고 파리가 꼬일 수 있으니까.”
시몬의 지시를 끝으로,
우리는 한층 더 들뜬 마음으로 기우는 달 아래서 곧 현실이 될 일들을 꿈꾸길 고대했다.
* * *
작게 만든 모닥불 주위로,
촙, 안드레.
그리고 케니와 함께 둘러앉아 뜨겁게 데운 우유와 주스, 그리고 차가운 술을 나눴다.
그런 내 무릎 위에는 비질라가 머리를 대고 누운 채 라티아에서 산 책에 몰두하고 있다.
“디안, 아까는 신경이 날카로웠어. 미안해.”
그렇게 말한 안드레는 독한 술을 들이켜곤 그 뒤로 우유를 입에 한참이나 머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내 물음에 드디어,
케니가 슬쩍 모닥불에 작은 나뭇가지를 쑤시며 운을 뗐다.
“뭐랄까, 라티아는 정말 이상했어.”
“어떤 식으로?”
“촙과 안드레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한참 뒤에나 알았지 뭐야.”
케니가 날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라티아라는 도시를 돌아다니는 내내…, 내 또래, 아니. 젊은 여자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촙이 입을 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곳곳에서 케니를 향한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어.”
라티아를 벗어나기 전 내가 느꼈던 그 시선과 같은 것이겠지.
“마치 울타리 안에 잡아둔 짐승을 구경하는 것처럼, 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입은 꾹 다문 채 멍한 눈으로 우리만 주시하더라.”
케니는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무릎을 껴안곤 가녀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정말 소름 끼쳤어.”
“내가 매튜 아저씨한테 말해볼게.”
“아니, 디안.”
케니가 멋쩍게 웃으며 날 말렸다.
“이젠 상관없잖아? 곧 있으면 우리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말에 난 차마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 * *
이른 새벽.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작은 천막에 들어서기 무섭게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왜.”
“깨어있었네요?”
“왜 왔냐고.”
“어제 라티아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불안해서요. 그걸 해소해야겠어요.”
내 단호한 대답에 불쑥,
그림자 밖으로 얼굴을 내민 맥레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따지듯 대답했다.
“근데 왜 나한테 온 건데.”
“다들 곧 얻게 될 자유를 생각하며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 텐데, 그것을 깨트릴 수는 없잖아요?”
“그럼 나는?”
“안 주무시잖아요? 지금.”
내 말에 맥레인은 할 말을 잃었는지 기가 찬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자고 있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깨웠겠죠.”
“이런 씨….”
“제자의 청을 무시할 생각은 아니겠죠?”
결국엔 맥레인이 졌다는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들어나 보자, 무슨 일인지.”
곧 얻게 될 자유에 차질이 생길까 두렵다면,
케니 네가 그런 두려움을 느껴 가진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해소해 주리라.
가족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