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수확 (4)
이른 새벽,
나는 맥레인에게 라티아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내 얘길 대수롭지 않게 여길 줄 알았던 맥레인은 예상과 다르게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어쨌든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니 그 역시 가볍게 흘려들을 생각은 없었던 거겠지.
그렇게 설명을 모두 끝냈을 즈음엔 날이 밝아져 있었다.
잠에서 하나둘 깨어난 가족들은 제법 들떠 보였다.
하긴, 어젯밤 시몬이 했던 말들은 밤잠을 설칠 정도로 뜨겁고 기대되는 것들이었으니까.
그 덕분인지.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던 케니도 제법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촙과 안드레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이른 아침부터 서로 티격태격 장난을 쳐댔다.
반면 시몬과 매튜 아저씨는 점심이 지나서도 천막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간간이 맥레인도 그 천막에 들어갔지만 금세 밖으로 나와 연초를 태우길 반복할 뿐이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안나 아주머니를 도와 한창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는 중에,
재키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해?”
눈 밑에 새겨진 점 모양 문신을 움찔거리며 다가온 그는 어색한 모습으로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나저나,
재키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는데.
예상 밖의 일에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한동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이 안 들려?”
“잘 들려요, 좀 의외라서요.”
살짝 차갑게 대꾸하자 재키는 씩 웃더니 품에서 연초 하나를 뽑아 입에 물었다.
“그러게, 의외지? 난 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있을 줄 몰랐거든.”
“그리고 재키, 당신의 예상보다 난 더 오래 살겠죠.”
내 대답에 그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낄낄거리며 연초를 입에 문 채로 모닥불에 가져다 댔다.
“뭐, 한참이나 늦었지만 너한테 인사나 하려고.”
“그러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요.”
“새끼, 까칠하긴.”
거칠고 사나운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제법 인간다운 표정으로 웃기도 하는구나.
촙과 안드레가 그랬지,
그는 과거에 흉악한 범죄자였다고 말이야.
과거에 어떤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그의 얼굴에 그려진 섬뜩한 문신만 봐도 얼마나 무시무시한 삶을 살았는지는 알 것 같아.
무엇보다 갑자기 내게 친한 척을 하는 저의가 뭘까?
그것만으로도 부담감과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다.
“살면서 심장을 꿰뚫리고도 죽지 않은 놈은 네가 처음이야.”
“저도 그렇게 되고 나서 다시 눈뜰 줄 몰랐어요.”
“안드레가 처음에 들어왔을 때, 고놈 신체라면 참 비싸게 팔리겠구나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네 몸이면 안드레보다 수십 배는 비싸게 팔릴 것 같았거든.”
재키의 비아냥에 난 대꾸도 하지 않고 모닥불에 남은 장작을 집어 던졌다.
“근데 넌 그보다 더 괜찮은 재주가 있는 놈이었어. 그러니까 큰 구름에서 제법 잘 해줬다는 얘기야. 어디서 그런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배운 거지? 세공소에서 배웠나? 인간 보석의 커팅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나?”
“재키, 닥쳐요.”
“하하! 이 새끼, 신경질 내기는!”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어쨌든 그도 시몬 바스티유라는 울타리 안에 속한 사람이잖아.
그리고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내가 그를 완벽히 이긴다는 자신이 있을 때나 행할 것이다.
“아무튼, 큰 구름에서 네가 잘해준 덕분에 지금 여기에 없는 식구들도 제법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됐어.”
재키는 다 태운 연초를 모닥불에 던지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 캠프에는 제법 가족의 수가 많았었지.
그들과는 제대로 통성명도 못 했었고.
이렇다 할 접점도 없어서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어.
그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기억난다. 초반에 내게 상처 주는 말들을 서슴없이 했던 사람들이. 그때 케니가 날 위로해줬었는데.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죠?”
“뿔뿔이 흩어졌지. 조직은 덩어리가 크면 뭘 하든 불편해지기 마련이야. 큰 거 한방이 끝난 뒤엔 이렇게 흩어져 있다가 잠잠해질 때쯤 다시 모이는 거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위험에 처하기라도 한다면요?”
“내 동료들이 그들을 보호해주기 때문에 괜찮아.”
일찍이 시몬을 따라 감정사에게 갔을 때, 그때 잠깐 봤던 두 남자가 머릿속을 스친다.
재키만큼이나 거칠고 매서운 자들이었지.
“아무튼, 맥레인에게 이것저것 배우고 있다지?”
그의 이어지는 질문에 난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혼자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짓다가 한참 뒤에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 *
안나 아주머니의 저녁 스튜가 끓기 시작했을 때쯤.
맥레인이 내게 다가와 말없이 인근 숲을 향해 턱짓했다.
난 묵묵히 안나 아주머니께 고개를 끄덕여 양해를 구하고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그렇게 숲에 들어서기 무섭게,
맥레인은 오래되어 썩은 그루터기 하나를 골라 앉은 채 내게 말했다.
“네가 새벽에 했던 말 있잖아.”
“네, 맥레인.”
“솔직히 별일 아니라 생각했거든, 근데 이젠 그게 아니게 됐어.”
“그게 무슨 말이죠?”
“포키스와 이야기를 좀 나눴지. 그가 말하더군, 라티아 인근을 포함한 일대 숲에서 한 마리의 새도 보질 못했다고.”
말을 마친 맥레인은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밭을 지키기 위해 일대에 새들을 모조리 쫓아내서?
아니, 그런 단순한 이유였다면 맥레인이 의미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도 않았겠지.
“잘 모르겠습니다.”
“군사교리를 익힌 자들에게 야전에서 날아다니는 새는 간사한 적들의 눈, 감시자, 파수꾼, 도둑, 죽음 등등…, 아주 안 좋은 것들을 의미해. 그래서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궁수를 시켜 일대 새들을 모조리 쏴 죽이지.”
“마치 라티아 일대의 모습처럼…?”
“그래 맞아, 덕분에 포키스는 이틀 동안 이 일대를 정찰조차 하지 못했어. 괜히 새를 날려 보냈다간 어디선가 날아온 살에 죽임을 당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그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있어서겠지, 또 세브리는 중립지역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이잖아? 혹시 모를 암살 위협에 대비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맥레인이 부싯돌로 연초에 불을 붙이곤 냉철한 표정으로 단언했다.
“그런데 어느 정신 나간 새끼가 세브리를 암살하겠냐고. 소국의 왕마저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할 일을 말이야. 분명히 숨기는 게 있는 거겠지.”
“그리고 거기엔 분명 라티아에 젊은 여인들의 씨가 마른 것과 깊은 연관이 있겠네요.”
“유력하지. 그리고 어쩌면 불행하게도…,”
통찰에 젖은 맥레인의 두 눈이 번뜩인다.
“마을에 들렀을 때, 세브리의 측근에 해당하는 무리가 케니를 점찍은 걸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 끈적한 시선도 어느 정도 설명이 돼.
“일이 복잡해졌어, 만약 세브리 측에서 맘먹고 케니를 노린다면 인근에 새를 풀어 샅샅이 뒤질 거야. 그리고 그 새들 가운데 어떤 것은 저격수의 눈일 테고.”
뭐랄까,
맥레인의 저 날카롭기 짝이 없는 사고를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
그는 벌써 몇 수를 앞에 두고 상황을 직시하고 있는 건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맥레인?”
“지켜봐야지.”
“지켜본다고요? 이미 지금 벌어진 상황 대부분을 인지하셨잖아요?!”
“가정과 확신은 같은 단어가 아니야.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나대다가 목이 달아난 놈이 역사서에 몇이나 적혀있는지 알아?”
맥레인은 잠시 숨을 고르며 입 밖으로 감색 연기를 내뱉었다.
“애석하게도 세브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팔아줄 유일한 인물이기도 해, 디안. 우린 이 극과 극을 가지고 저울질을 해야만 한다고.”
“그럼 그중 하나에 저울이 기울 때까지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 물음에 맥레인은 씩 웃으며 딱 한숨 남은 연초를 빨아들이곤 거나한 연기와 함께 나지막이 말했다.
“어제와 똑같이, 어제가 별났다면 엊그제와 똑같이. 하던 일을 똑같이 하는 거다.”
* * *
유독 오늘 밤에 박힌 별들이 밝다.
붉은 별, 이투루비어.
녹색 별, 이투비리디.
주황 별. 이투아리크
유독 빛나는 저 별들도,
누군가가 그 별빛이 필요로 해서 저리 반짝이는 건 아닐까.
어쩌면 맥레인이 알고 있을지도.
“집중해.”
잠시 밤하늘에 한눈을 판 사이,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맥레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말해봐, 지금까지 몇 개의 검술을 익혔지?”
“11개입니다.”
내 즉답에 맥레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좋아, 이쪽 땅에 있는 모든 검술을 다 배웠다고 해도 무방하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엄청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늦은 밤, 맥레인은 검을 뽑지 않았다.
다만 그는 나와 마주 앉아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놓쳐선 안 될 것들이었다.
“바꿔 말하면 네 검술의 골격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완성됐다는 말이야. 자세, 걸음, 토대라 부를 수 있는 기초 동작들이.”
말을 마친 맥레인은 제법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참 웃기지? 11개의 각기 다른 스탠스를 하나의 검술이 잡아먹고 고작 골격을 완성 시켰다는 게.”
“제 것을 검술이라 부를 수나 있을까요?”
“당장 비질라가 검을 잡고 휘둘러도 검술이라 말할 수 있다. 검술에 범주 같은 건 없어, 범주가 없다는 것은 기준도 없다는 소리지.”
맥레인은 날 노려보며 단언했다.
“잘 들어, 이 세상엔 너만큼 특별한 자들이 있다. 비전이라는 개념으로 고독한 신념을 이어가는 이들이 그렇고,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고대부터 명맥을 지켜온 자들이 그러하지.”
그의 눈빛은 너무나 살벌해서 감히 눈 마주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런 자들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그땐.”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허리에 매달린 볼품없는 아밍 소드의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둘 중 하나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아. 한 명맥, 한 의지의 소멸까지 각오하며 싸워야 해.”
해서 궁금해진다.
“맥레인은 그런 싸움을 몇 번이나 해보셨습니까.”
내 물음에 맥레인은 생각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다 찬사가 아깝지 않은 자들이었지. 해서 말해줄 수 없다. 지금은 비록 내가 빌어먹을 무법자이지만, 그럼에도 검을 든 검사라면 지켜야 할 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뭐죠?”
“사라진 것을 뒤늦게 욕보이지 말라. 이미 소멸한 것을 탐닉하지 말라. 망각만이 스러진 자에 대한 최고의 존중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와 했던 투쟁이 생각난다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존경이니 자책하지 말라.”
씁쓸하구나.
무기를 든 자들의 세상은.
“명심해. 이젠 너도 지켜야 하는 것들이니까. 널 쓰러트릴 누군가도 그 존중만은 지켜줄 거다.”
“네, 맥레인.”
“책은 다 챙겨 왔겠지?”
“물론이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챙겨온 책들을 그 앞에 내놓았다.
그러자 이제,
맥레인의 표정이 한층 더 나아가 근원적인 진지함을 품기 시작했다.
이에 덩달아 무거워지는 기류에,
나는 얼른 마음을 고쳐먹고 자세를 고쳐 앉아 그를 마주했다.
“지금부터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게 될 거다. 부디 널 가두고 있는 우물이 넓고 깊지 않기를 기도해라.”
“잘 알아들었습니다.”
“또 이후부터는 은화 한 개짜리가 빚어낸 호승심으로 널 대하지 않을 거다. 그 말은 즉,”
“저에게 앞서 말한 그 존중을 지켜주시겠다는 소리겠지요.”
“그래 맞아. 그리고 약속해라, 그렇게 배운 검으로 우리 가족을 지켜주겠다고.”
내가,
누군가를 지킨다.
지킬 수 있다.
기필코 지켜 낼 것이다.
“약속합니다.”
* * *
욕심이 난다.
그를 완성 시켜 보고 싶다.
상극끼리는 극명하게 통한다지?
모든 검술을 부정하는 그의 재능은.
모든 검술을 통달한 나로 인해 만개하게 될 것이다.
세상 참 아이러니하지.
“처음은 검을 이루는 철에 대해서 배울 것이다.”
디안에게 설명과 동시에 책 중 하나를 골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은 그 철을 두들긴 손에 대해서 배울 것이고.”
동시에,
“네가 앞으로 맞닥뜨릴 수많은 병기에 대해 알아야 할 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허리춤에 잠들어 있던 낡은 아밍 소드를 뽑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곧 도신 주위에 푸른 빛이 일렁거린다.
“나는 너에게 ‘인챈트’를 이해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