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수확 (5)
‘숲’에서 만들어진 무기는 모든 무기를 통틀어 예리함이 으뜸이다.
거기에 더해 ‘귀 큰 자’들은 선천적으로 불꽃과 바람을 달랠 수 있어 가공하기 힘든 금속을 쉬이 제련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의 무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벼움과 탄력을 자랑한다.
덕분에 순수한 살상력으론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지만, 중장갑을 상대로는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인다.
등급은 숲, 깊은 숲, 높은 숲으로 나뉘며 높은 숲을 최고로 친다.
‘낮은 모루’에서 만들어진 무기는 모든 무기를 통틀어 단단함이 으뜸이다.
거기에 더해 ‘난쟁이’들은 오랜 세월 축적한 기상천외한 야금술로 이론상 도달할 수 없는 합금을 주조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의 무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성과 내구성을 자랑한다.
덕분에 중장갑을 상대로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대부분이 상당한 무게를 자랑하여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등급은 낮은 모루, 검은 모루, 백색 모루로 나뉘며 백색 모루를 최고로 친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기술적 체계 대부분을 단일화시킨 두 종족과는 달리 그 문화와 문명의 수가 많을뿐더러 개성 역시 워낙 다양하고 뚜렷해 간략한 서술이 불가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러한 인간들 사이에서도 만들어진 무기에 등급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 등급은 오롯이 능력과 희소성이 대단한 금속들로 이루어져 있다.
등급은 가장 크게 야르강, 이터누티, 제리드강으로 나뉘며,
그 중 제리드강을 최고로 친다.
‘볼스피티의 딱딱한 도감’
그 책의 초반부에 실린 정보는 이러했다.
그리고 그 내용 중 몇몇은 내게 매우 친숙한 것들이었다.
깊은 숲.
이터누티.
가벼움.
예리함.
앤서니 트와드에게서 훔친 이 검의 대부분을 알게 된 기분이 드는구나.
그 느낌이 제법 새롭고 자극적이다.
내게 주어진 소유물에 대한 이해와 그 정확한 기원을 알아간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인 것 같아.
이후 책 내용은 대부분 앞에서 설명한 것 외,
그러니까 그 이하 품질을 가진 물건에 대한 설명뿐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책 끝부분에서 나오는데,
등급이 매겨진 물건들은 소위 명품으로 통하며 때문에 극소수만이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대다수가 접할 수 있는 쪽에 설명을 집중했다는 것이다.
난 그런 저자의 설득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검만 하더라도 아무리 인챈트 값이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 가격이 무려 금화 20만 개였으니까!
20만 개면 그걸 실을 마차만 해도 몇 대는 필요할 거다.
하지만 확실히 그 값어치는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초반 맥레인에게 훈련을 받을 때 들었던 녹슨 검과 비교하자면 손에 잡히는 감각부터가 달랐으니까.
이질적인 가벼움 속 끔찍할 만큼 정돈된 밸런스는 물론이고, 책에 적혀있는 대로 그 예리함이며 탄력이 내가 진정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을 들고 있었나 되짚게 만들 정도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차라리 이렇게 좋은 물건이라면 맥레인에게 주는 것이 조직으로서 가장 좋은 결정이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이 검이 내 손에 쥐어졌을까?
얼핏 엔제이가 했던 말이 생각나기도 해.
인챈트가 걸린 물건이 드러나면 순례자라 불리는 무리가 뒤쫓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맥레인이 시킨 대로 책의 내용을 흡수하는 데에 집중하자.
다음은,
‘오스페리지의 무기 연감, 991’
딱 보아도 여러 무기의 정보를 수록한 도감인 것 같은데.
그 안에 내용은…,
재밌다.
희미한 어렸을 적 기억 속, 그림 동화책을 읽는 기분이 떠오르는 기분.
각종 무기의 부위별 명칭, 특정 무기들의 세부적인 사항.
용도, 기원, 역사 등등.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정보가 내 눈동자 위에 굴러다녔다.
“테이퍼라는 건 칼날 폭의 변화를 의미하는구나.”
이제야 내가 가진 검의 형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군.
깎아지르듯 쏟아지는 은빛 폭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칼날은,
칼끝으로 갈수록 폭이 급격히 줄어드는 ‘프로파일 테이퍼’가 심하게 적용된 칼날이었던 거야.
거기다 종잇장처럼 얇은 칼날의 두께 역시 극단적인 ‘디스털 테이퍼’가 적용된 거였고.
뒤에 이어지는 기능적 내용까지 합쳐 결론을 내리자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상의 베기 능력을 지녔음에도 베기에 강한 갑옷을 상대하기 위해 찌르기까지 상정한 검이라는 건데.
보통 이러면 그 내구성이 굉장히 취약해질 테지만,
이 검은 금속 재질로 그 내구성의 한계마저 극복해버린 것이다.
과연 명품이란 건가?!
그러면 이제 또 궁금해진다.
높은 숲에서 만들어진 검은 어떤 모습일지 말이야.
* * *
새벽까지 책을 읽다 어느샌가 잠이 들면,
그 녘에 눈을 떠 홀린 듯 맥레인이 기다리고 있는 숲속을 향한다.
오늘도 맥레인은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레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상대의 테이퍼를 읽어라, 그러면 부딪치기도 전에 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너라면 그 흐름을 쉬이 읽을 수 있을 거야.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네 움직임은 그 흐름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까.”
맥레인은 내가 읽고 이해한 부분을 귀신같이 콕 찍어 설명을 계속했다.
“난쟁이가 만든 무기와 부딪칠 땐 반동을 조심해라. 그 육중한 무게에 한 번 휩쓸리면 걷잡을 수가 없어진다. 귀 큰 자들이 만든 무기와 맞닥뜨리게 되면 십중팔구 속도전으로 귀결될 거니까 이 점을 명심하고.”
앙상한 기반에 확신을 붙여 지극히 개인적이고 확고한 이론을 구축한다.
지식을 소화한다는 건 그런 느낌.
“오늘 설명은 이쯤하고, 내일까지 강철의 연대기를 완독해 와라. 인챈트는 마지막으로 설명해 줄 것이다.”
“네.”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맥레인은 날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게 정확히 어제부터였을까?
아니,
라티아에 도착한 첫날.
늦은 밤 둘이서 낙오됐었던 그때부터였을지도.
맥레인의 수업을 마치고 캠프로 돌아왔을 땐 해가 새벽을 물리친 뒤였다.
매튜 아저씨는 아침 일찍 버드와 함께 마차를 끌고 길을 나섰다.
슬슬,
세브리와의 접촉을 준비하시는 거겠지.
한참이나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가는 마차를 보니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되는구나.
안나 아주머니는 풍성해진 식료품 앞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덩실덩실 몸을 흔들며 음식을 준비하신다.
일거리를 찾아 그 옆을 서성이는데,
“디안!”
대뜸 엔제이가 날 부른다.
“엔제이?”
“잠깐 이리로 와 봐!”
슬쩍 안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땐, 그녀는 날 보고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서둘러 그에게로 달려가자 그는 잔뜩 고취된 표정으로 말없이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엔제이? 어딜 가는 거죠?”
“너무 책만 읽다간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몰라.”
“예…?”
“진짜야! 어디서 들었는데 너무 책을 많이 읽어서 대갈빡이 문자 그대로 뻥 터져버려 죽은 학자가 있었데!”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통에 쉬이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왜인지 그 이야기가 그럴싸하기도 하고 말이야.
“간만에 이 엔제이 삼촌이 재미있게 놀아줄 테니 기대하라고! 내가 꽤 재밌는 놀이를 발견했거든.”
“그게 뭔데요?”
“가 보면 알아.”
말을 마친 엔제이는 미리 말을 해둔 듯, 이미 저 멀리 모여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촙, 케니, 안드레.
그리고 비질라까지.
모두 이른 아침부터 기대 만발인 표정들이다.
“엔제이! 도대체 뭔데 그래요?!”
안드레가 멀리서 큰 목소리로 묻자 엔제이는 근엄한 표정으로 자길 따라오라 손짓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를 따라 캠프 뒤편으로 한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을 땐.
“허…,”
나는 탄성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캠프 뒤편으로 한참 걸어간 그 끝엔 아찔한 높이의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아래엔 하늘을 담은 거대한 호수가, 저 멀리엔 구름을 꿰뚫은 산봉우리들이 허옇게 질린 채 반짝인다.
절경.
진짜 보는 순간 마음이 아려올 정도로 멋진 절경이야.
한참 한눈에 들어온 풍경에 넋이 나가 있는데,
옆에 있던 엔제이가,
“뭐…하는 거예요, 엔제이?!”
웃옷을 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재밌는 놀이!”
그러자 안드레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반문했다.
“무슨 재밌는 놀이?”
그 물음에 엔제이는 당연한 목소리로,
“생각해 봐,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재밌지 않겠어?!”
“이런 세상에, 엔제이.”
촙의 탄식과,
“그게 무슨…,”
케니의 한숨.
그리고.
“그게 무슨 병신같은 생각이에요?”
안드레의 일침까지.
그러나,
정말 우스꽝스럽게도.
네 남자의 시선이 묘하게 맞물린다.
결국엔 촙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단언했다.
“당장 해보자.”
그 순간 우린 뭐에 홀린 듯, 낄낄거리며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이내 호승심과 호기심이 그걸 억눌러버리고, 우린 상의를 탈의한 채 곧바로 낭떠러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케니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질린 건지 이미 비질라와 함께 한창 꽃을 꺾고 있었다.
“누가 먼저 뛰어내리지?”
엔제이의 말에,
촙이 어이없다는 듯 일갈했다.
“당연히 주동자가 제일 먼저죠!”
“그나저나 떨어져도 안 죽겠지?”
안드레의 자조적인 물음에,
“설마 죽겠냐? 물이잖아!”
엔제이의 확신에 찬 대답까지.
환장의 환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엔제이가 숨을 후후 몰아쉬더니,
“물의 신 아쿠스여 날 받아주소서!”
괴성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다음부턴 모르겠다,
나는 자연스레 촙과 안드레 사이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저 아래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빠져버린 엔제이는 금방 얼굴을 내밀고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봤냐! 봤냐고! 아쿠스가 내 궁둥이를 애무했다니까! 하하하! 다음은 누구냐!”
세상에, 엔제이.
당신은 정말 병신이에요.
근데 미칠 듯이 멋있어, 그래서 이상하다고.
“다음은 나다! 촙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솟은 광대에 햇살 하나 걸친 채 낭떠러지에서 크게 뛴 촙이 아래로 쏜살처럼 떨어진다.
이에 질세라, 안드레도 짧은 금발을 휘날리며 연달아 뛰어내렸다.
그리고 이젠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처럼,
나도 그 낭떠러지를 향해 있는 힘껏 뛰어내렸다.
낭떠러지로부터 허공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철렁 주저앉은 몸속의 무언가.
귀에 내려앉은 침묵.
그 귓구멍 밖을 뛰쳐나오는 심장의 박동.
이내 찰나의 순간이 지난 뒤에 찾아오는 아찔한 추락.
그리고 종래에 내 몸을 휘감는 차가운 물살.
덜컥 겁이 나서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들면,
그제야 먹먹한 귓속을 뚫고 들어오는.
“하하하!”
“크하하하하!”
큼지막한 웃음소리,
그럼 나는 거기에 더해 손으로 안면을 쓸어내린 직후 더 크게.
“하하하하!!!”
웃는다.
시원하다.
마음속 모든 것이 뻥 뚫린 기분이야.
* * *
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맥레인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그와 나란히 서 있는 시몬 역시 작은 술병을 기울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테리라스에 가면 수영장도 하나 만들어야겠어.”
시몬의 말에 연초에 불을 붙인 맥레인이 피식 웃었다.
“저놈들을 감당하려면 우물보다 깊은 수영장이어야 할걸.”
“까짓거 만들면 되지. 자유를 얻으면 뭘 못하겠나.”
잠시 뒤, 둘 사이에 짤막한 침묵이 흐른다.
뒤이어 맥레인이 감색 연기를 내뱉음과 동시에 시몬에게 물었다.
“매튜와 버드가 아침 일찍 출발했던데.”
“그래, 세브리와 접촉을 시도하러 갔지.”
“정말 우리가 자유를 살 수 있을까.”
“이번 일이 끝나면.”
“테리라스까지 앤서니 놈이 쫓아온다면?”
“그 정도 집념을 가진 용병을 고용하려면 앤서니 트라이던트라도 파산을 면치 못할걸.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내게 다 계획이 있으니까.”
다시 짤막한 침묵.
이후 맥레인이 진지한 얼굴로 작심한 듯 질문한다.
“시몬, 할 말이 있어.”
“그게 뭔데?”
“애들이 라티아에 갔을 때 어떤 일을 겪었는데, 그게 예삿일 같지 않아. 나와 포키스가 상황을 인지하고 알아보는 중인데 이젠 너에게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에 시몬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크게 걱정하지 마, 어차피 이후부터 벌어질 일들에 애들은 접촉할 일이 없을 테니까.”
맥레인은,
그런 시몬의 반응에, 한참이나 연초를 태우다가 이윽고 알겠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