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44화 (44/365)

44화. 수확 (6)

“수확이 코앞이라고 했던가?”

매튜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저 멀리 떨어진 황금밭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죠, 시기상으로도 임박했을 겁니다.”

버드는 그런 매튜의 말에 밭쪽을 힐끗힐끗 바라보다가 얼른 고삐를 고쳐잡았다.

“잘 됐군. 적어도 세브리의 심기가 시작부터 불편해질 일은 없겠어.”

“오히려 더 예민한 상태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들은 매튜가 코웃음을 쳤다.

“젊었을 적 시몬처럼 본인이 직접 밭을 일궜다면 그랬겠지. 세브리에게 수확은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다가올 계절과 같은 개념일 거다.”

버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완만한 언덕을 지나쳐 마차가 본격적으로 세브리의 땅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부터,

방금까지 보았던 찬란한 황금밭과는 다른 광경들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매튜…?”

“보고 있어.”

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엔 밧줄에 매달린 뭔가가 비쳐 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그것은.

적나라한 표정으로 생을 마감한 시체였다.

일대에 새가 없는지, 뜬 눈으로 성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 시체는 종래에 겪었을 고통을 온전히 간직한 모습으로 목매달려 있었다.

“범죄자일까요?”

살짝 떨리는 버드의 목소리에 매튜는 유심히 시체를 지켜보다 고개를 저었다.

“목매달려 죽지 않았어, 온갖 능욕을 당하며 천천히 죽었지. 중립지역에선 한낱 범죄자의 죽음에 저런 공을 들이지 않아.”

그 말에 버드는 순간 시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일었지만 이내 아랫입술을 덜덜 떨며 포기해야만 했다.

생각보다 그는 비위가 약했으니까.

“여러 사상이 꿈틀대는 국가라면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세브리에게 본보기로 죽임을 당한 거야. 중립지역에서 목매달려 죽는 무법자가 하루에 몇인데 저런 수고를 해.”

“그렇다면 강제노역에서 탈출하려던 노예였을까요?”

“그럼 두꺼운 족쇄를 채워 일을 시키지 않았을까? 수확이 코앞인데 아까운 노동력을 그리 허무하게 없앨 순 없잖아.”

“그…그러네요, 생각해보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벌써 창백해진 얼굴로 달달 떠는 버드의 모습에 매튜는 혀를 차며 고삐를 빼앗았다.

“일단은 농민들이 있는 곳부터 가 보자고, 아무것도 모르고 가다간 세브리의 심기를 건들지도 모르니까.”

다시 마차 바퀴가 삐걱거리며 바닥 위를 구른다.

이내 한참을 더 가고 나서야 드러난 두 갈래 길에서 매튜는 정돈되지 않은 험한 쪽을 골라 고삐를 놀렸다.

* * *

안나 아주머니의 스튜로 차가워진 몸을 녹이던 나는 이후 엔제이가 사정없이 늘여놓는 황당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들어야 했다.

저속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문제는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고 재밌었다는 거다.

아마 본격적으로 엔제이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가 다 지나가 버렸을지도 몰라.

어느새 꽃단장하고 나타난 비질라가 아니었다면 그에게서 탈출할 수 없었을 거다.

“고마워, 비질라.”

“엔제이 삼촌은 끝이란 걸 몰라.”

비질라는 그 말을 하곤 작은 천막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그녀는 날 의식하듯 머리에 쓰고 있던 꽃 왕관을 자꾸 고쳐 쓰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이건 귀여워서 못 참지.

“왕관이 되게 이쁘다, 직접 만든 거야?”

“케니 언니가 도와줬어. 하지만 틀은 내가 만든 거야.”

“과연, 비질라는 공예에도 소질이 있네?!”

“그래? 정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되묻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기회가 되면 디안 오빠 것도 만들어 줄게.”

얼굴을 붉히며 씩 웃는 비질라는 괜히 부끄러웠는지 일부러 책을 세게 피더니 나와 눈도 안 마주치고 책에 몰두하는 척을 했다.

난 그런 그녀를 두고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날 쓱 올려본다.

그럼에도 내가 비질라 곁을 떠나버리자 그녀는 아쉬운 표정으로 얼른 책을 덮어버렸다.

안 봐도 그 소리로 알 수 있어.

그렇다면 조금 더 빨리 움직여줘야지.

서둘러 안드레와 같이 쓰는 천막 안에서 책 한 권을 빼든 나는 성큼성큼 비질라를 향해 돌아갔다.

책 표지에 시선을 집중하는 척하며 다가가자,

저 멀리서 반색이 되어선 허겁지겁 책 읽는 척을 하는 비질라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못 본 척하며 그녀 옆에서 능청스럽게 책을 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녀는 상자에 걸터앉아 붕 뜬 두 다리를 흔들거리며 흥얼거린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나와 비질라는 각자 들고 있던 책에 슬슬 몰두하기 시작했다.

강철의 연대기는 말 그대로 광석에 관한 기록물이었다.

앞서 봤던 무기 연감처럼 각 광석의 특징과 쓰임새를 서술하고 있었는데 거기 적힌 글귀들이 하나같이 엔제이의 이야기처럼 재밌다.

예컨대 알베움이라는 금속은 대표적인 합금용 강인데 그에 대한 설명이 바람둥이란다.

어느 금속에 붙여도 잘 어우러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그렇다는데 그 밑엔 더욱 저속한 표현이 달려 있다.

난쟁이들이 말하기를,

난교하는 강철…, 이라고 한다는데.

난쟁이들은 하나같이 입이 험한가?

서둘러 책 표지를 다시 살펴보자 저자의 이름으로 적혀있는 것이,

‘오라스 윗핸드’

확실히 이름만 봤을 땐 꼭 난쟁이가 쓴 것 같기도 하다. 저런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은 보기 힘드니까.

다시 책을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내게 익숙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터누티.

내 검을 이루는 근간이라 말할 수 있는 광석.

일단 이름 옆에 별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상당히 귀한 소재인 것 같다.

그 내용은…,

이터누티는 ‘이터누아브르’라고 하는 나무의 수액이다. 이 나무는 귀 큰 자들의 의회가 존재하는 숲에서만 서식하고 있어 난쟁이로선 쉬이 취급할 수 없는 희귀한 금속이기도 하다.

상온에선 액체이지만 고열에 한 번 노출되면 단단한 고체가 되며 그때부터 가공 가능한 광석으로 취급된다.

강성과 강도는 물론이고 특유의 가벼움과 탄력까지 가지고 있어 어마어마한 성능을 가졌지만, 상술한 내용대로 난쟁이들은 쉽게 접촉할 수 없는 바람에 멸칭이 붙을 정도로 취급이 나쁜 광석이다.

그 멸칭은 바로 고약한 남의 애새끼…,

그러니까 이터누티는 귀 큰 자들만의 전유물이라는 거군.

바꿔말하면 난쟁이가 이터누티로 만든 물건은 굉장히 희귀하다는 소리겠지.

솔직히 이 책은 내겐 그리 크게 와닿지 않았다.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검에 대한 정보를 몇 개 건질 수 있는 것 말고는 그리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어.

그저 재미난 읽을거리가 가득한 도감을 쓱 훑은 느낌이다.

앞에 읽은 두 권의 책은 검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맥레인은 어째서 강철의 연대기를 읽으라 했던 걸까?

아마 그것도 내일이 되면 밝혀지겠지.

* * *

마차를 멈춰 세운 채 그 위에서 한참이나 주위를 살피던 매튜의 미간은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작은 마을 정중앙에 세워진 두 개의 기둥 아래엔 흥건한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수확을 위해 밭으로 나간 이들을 제외한 늙고 병든 노인들만이 간간이 거리에 나와 마차를 경계하듯 노려본다.

“매튜, 저 핏자국은 도대체 뭡니까…?”

그 무거운 기류에 압도당한 버드가 위축된 표정으로 매튜에게 속삭이자,

“저 두 기둥에 양팔을 묶고 매질을 하는 거야.”

매튜는 고삐를 매만지며 씁쓸한 말투로 대답했다.

“여기 모여있는 자들은 모두 노예로군. 대가를 받고 고용된 농민은 없어.”

“그렇다면 저들에게서 정보를 얻긴 글렀군요.”

“맞아, 어쩔 수 없지. 바로 세브리를 만나러 가자고.”

둘의 은밀한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멀찌감치 서성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노인들이 갑자기 헐레벌떡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 부산스러움에 퍼뜩 놀란 매튜가 뒤를 돌아보자,

저 뒤에서 말을 타고 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길가에 멈춰 서 있는 마차를 발견하기 무섭게 말을 재촉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버드는 잔뜩 긴장해서 수틀리면 당장이라도 매튜의 고삐를 뺏어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왜인지 여유로운 표정인 매튜를 보고선 마음을 고쳐먹고 태연한 듯 연기를 하며 다가오는 발굽 소리가 멈추길 기다렸다.

그렇게 마차 바로 앞에서 멈춘 한 무리의 사람들은,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장비들로 무장한 군인들이었다.

아니, 심지어 그 무리의 선두는 어느 이름난 가문의 기사로 보일 정도다!

관리를 잘해 번쩍이는 백마, 그 위로 능숙하게 고삐를 놀려 말을 옆으로 회전시킨 금발의 남자.

그가 매튜와 마주 보도록 말머리를 돌리더니 불쑥 가죽 건틀렛 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요튼의 아르지스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얼른 손을 물린 그가 싱긋 웃으며 내민 팔을 뒤쪽에 따르던 장정들에게 내밀었다.

“뭐해, 벗겨.”

매튜에게 했던 상냥한 말투와는 정반대의 언행.

뒤따르던 장정들은 그런 아르지스의 명령에 허겁지겁 달려들어 그가 끼고 있던 가죽 건틀렛을 벗겼다.

그러자 그 안에서 드러난 부드럽고 허연 손.

그 손의 소지엔 인장을 찍는 반지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맨손으로 공손히 인사를 청하는 아르지스의 모습에, 매튜는 태연한 표정으로 응했다.

“매튜 가버드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에게 떠들어대고 돈을 받는 갈까마귀들이 꽤 많거든요. 그 유명한 시몬 바스티유가 아닙니까? 두 전쟁 사이에 핀 무법의 꽃!”

푸른 눈을 번뜩이며 노래를 부르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열거하던 아르지스의 모습에 매튜는 애써 느껴지는 섬뜩함을 감춰야만 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유심히 지켜보던 아르지스는 매튜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그 작고 어여쁜 입술을 놀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 공교롭게도 북쪽에서 뜬 큰 구름이 털렸고, 또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북쪽에서 낯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오다니요! 이 정도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스물, 많이 쳐줘야 스물셋은 되려나.

매튜는 이 젊은이가 풍겨대는 무거운 중압감을 빠르게 인정하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히려 당당하게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저희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아시겠군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르지스가 크게 웃는다.

“그럼요, 알다마다요. 이미 세브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마차를 끄는 말이 멍청한 건지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이나 잘못 들었어요.”

버드는 식은땀을 줄줄 흘려야만 했다.

그는 사기를 쳐도 되는 인간과 그래선 안 되는 인간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르지스는,

사기는커녕 말을 잘못 섞는 것만으로도 목이 달아나는 부류라는 걸 그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반대로 안심이 들었다.

매튜는 그런 부류마저 선을 지키며 대화를 나눌 줄 아는 현명한 사람에 속했으니까.

* * *

인장을 손가락에 걸고 있는 걸 보면 가문에 속한 상태라는 건데.

어찌 방랑기사인 것 마냥 다른 자를 섬기고 있단 말인가.

그것보다,

가문의 기사마저 휘하에 둘 정도라니.

과연 중립지역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가답구나.

“참, 매튜 씨. 깜빡했는데 말입니다.”

마차를 끌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와중에, 말을 뒤로 물린 아르지스가 다가와 대뜸 말을 걸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아르지스는 천진한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곧 있을 수확을 맞아 큰 축제가 열릴 예정입니다. 아마 어디서도 보지 못한 수확제가 열리게 될 텐데 기회가 된다면 꼭 참석하십시오.”

“그거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세브리님의 관대함을 실로 절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혹 큰 구름에서 가져온 물건들 가운데 무기는 없었습니까?”

“무기라면…?”

“아, 용의 시대 무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장식용이 더 어울리는 그런 골동품엔 관심이 없거든요.”

그 말을 하곤 아르지스는 대뜸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상아를 깎아 만든 은빛 검집으로부터 뛰쳐나온 검은,

그래.

매튜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보통 검이 아니라는 것을.

“검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폴암이나 메이스여도 상관없습니다. 도끼나 워 해머라면 좀 아쉽겠지만…,”

“그것참 아쉽게 됐군요, 우리가 가져온 물건들 가운데 무기는 없었습니다.”

“하! 그러겠지요. 기업가 놈들이 다 그렇지, 웬만한 미끼에도 입질하지 않는 그 좀생이가 무기를 그리 쉬이 내놓을 리가 없겠지요.”

아르지스는 이후로도 한참이나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앤서니 트와드를 힐난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양 갈래 길에서 이번엔 가지 않은 반대편 길로 접어들어서야,

매튜와 버드는 겉을 옥으로 마감한 엄청난 규모의 저택을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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