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수확 (7)
아르지스는 매튜와 버드를 저택에 들인 뒤 홀로 빠져나와 말을 몰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장정 넷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아르지스님, 무슨 일입니까?”
그중 하나가 아르지스에게 묻자,
“그 영감 놈, 내게 거짓말을 했어.”
그는 금빛 눈썹을 꿈틀거리며 이마에 굵직한 핏대를 세웠다. 그 표정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아름다운 얼굴과 더 대비되어 뒤따르는 장정들이 겁에 질릴 정도였다.
“너희들도 봤겠지. 라티아에 저놈들 패거리가 왔었을 때 말이야.”
아르지스의 말에 장정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중 하나가 큰 구름에서 훔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아르지스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뒤돌아 장정들을 노려보았다.
“그렇지, 너희들은 애초에 다른 쪽에 관심이 있었겠구나. 엔트로피에서 온 용병이라 다를 줄 알았는데. 확실히 그 천한 용병 태생에선 벗어나지 못하는군.”
이후 쏟아지는 심한 모욕에도,
장정들은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하지만 이해해, 너희들에게 돈을 주는 건 내가 아니라 세브리니까. 하지만 너희들을 지휘하는 게 나라는 걸 잊지 마라. 어차피 놈들이 먼저 접촉을 시도한 이상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될 거야.”
다시, 박차를 가해 말을 달린 아르지스는 아직 불편한 심기가 남아있었는지 밭에서 일하던 노예들을 발견하곤 멈춰 섰다.
“비르페, 가서 오늘 가장 많이 매질을 당한 노예를 데려와.”
단호한 명령에 장정 중 하나가 얼른 말에서 내려 밭으로 뛰어들었다.
그 기척을 느낀 노예들은 아르지스와 그 수하들을 발견하곤 공포에 물든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몸을 감싸 안은 채 쭈그려 앉을 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는다.
“너희들 중 오늘 가장 매를 많이 맞은 놈이 누구지?!”
볼에 큰 흉터가 있는 비르페가 소리쳤지만,
누구도 그에게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비르페는 당장 눈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사내아이를 발견하곤 허리에 매고 있던 가죽 띠를 풀어 인정사정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짝!
짝!
끔찍하리만큼 큰 소리와 함께 내리쳐진 가죽 띠가 소년의 등을 할퀴고,
동시에 붉게 물든 등 곳곳이 쩍쩍 갈라지며 피가 쏟아진다.
하지만 소년은 이를 씹으며 단 한 번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숨이 찬 비르페가 매질을 멈추고 이내 헐떡이는 목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자, 이젠 네놈이 가장 매를 가장 많이 맞은 놈이 됐구나.”
그 말을 끝으로 비르페가 소년의 뒷목을 잡고 끌고 가려 하자,
“나요, 내가 매질을 가장 많이 당했소.”
끝내 밭에서 한 장성한 남자가 걸어 나와 제지했다.
그의 몸은 오래전 맞은 매 자국 말곤 말끔한 상태였다.
당연히 오늘 맞은 매 자국 같은 건 단 하나도 없었지만, 비르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잡고 있던 소년을 내팽개친 뒤 그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나와, 아르지스님이 찾는다.”
밭 곳곳에선 대신 끌려가는 남자를 향한 아쉽고 애타는 신음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끌려 나온 남자는 곧바로 아르지스의 안장과 연결되어있는 밧줄에 두 손을 묶였다.
아르지스는,
끌려 나온 남자를 깔보며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노예, 네 본분을 잊지 마라. 방금 네가 한 행동은 노예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밧줄에 묶인 남자는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숙이곤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아르지스는 픽 웃더니 곧바로 박차를 가해 말을 자극했고,
곧이어 달려나가기 시작한 말에 이끌린 남자는 아슬아슬한 뜀박질을 이어가다가.
끝내 중심을 잃고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말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만 갈 뿐이다.
* * *
매튜와 버드는 저택에 들어서기 무섭게 바깥과는 전혀 다른 재질의 서늘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매튜, 이건…,”
“그래, 곳곳에 추위를 풀어놓았군.”
연금술사에게서 사들인 귀한 추위 조각.
그것으로 이 넓은 저택을 가득 채운 거다.
이것만으로도 세브리가 가진 부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체감한 매튜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특이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매튜와 버드는 제대로 눈뜨고 다니기가 힘이 들 정도였는데, 이유인즉슨 저택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복장이 하나같이 바다를 건너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이국적이고 외설적인 것들인 것도 문제였다.
“완전 천국을 건설해 놓고 사는군요.”
버드가 속삭이자 매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햇빛과 구름 조각을 섞어 카펫처럼 깔아둔 바닥 위를 걷던 두 사람이 거대한 홀에 당도하기 무섭게,
“잘 오셨소.”
건너편 거대한 문 사이로 한 거구의 남자가 뒤뚱뒤뚱 걸어 나왔다.
툭 튀어나온 배, 터질 것 같은 손가락에 끼워진 수많은 반지.
처진 턱살에 파묻힌 수십 겹의 휘황찬란한 목걸이에 귓불을 무리하게 늘려 낀 거대한 귀걸이까지.
가히 이 만들어진 천국의 주인답다고나 해야 할까.
“반갑습니다, 세브리님.”
매튜가 얼른 인사를 올리자 버드도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세브리는 그런 둘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내 갈까마귀들이 지껄이는 소리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 그대들은 꽤 낭만적인 무법자 집단이라던데.”
그 말에 매튜가 재치를 부려 답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저 무법지대 위에서 세운 저희의 알량한 법에 따르다 보니 항간에선 그렇게 불러주기도 하더군요.”
“하하! 재미있군. 당신도 알다시피 낭만도 돈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지. 날 찾아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니겠나?”
“역시 이미 다 알고 계셨군요.”
“중립지역은 셈이 빨라야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잖소?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좋습니다, 이리 환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원한다면 곧 있을 수확제에 참여해 재밌게 놀다 가시오, 이 땅은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인 들쑤시지 못할 테니까 걱정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요.”
이내 세브리가 걸음을 멈추고 매튜와 버드를 번갈아 보며 쏘아붙이듯 입을 열었다.
“물론 앞서 한 얘기엔 당신들도 포함되는 이야기요, 이곳은 당신들이 잠시 쉬기 위해 거쳐 가야 할 곳일 뿐이란 걸 명심 하는 게 좋겠군.”
“물론입니다, 그 점을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겸사겸사 이렇게 세브리님을 만나 뵙기를 청한 게 아니겠습니까.”
“당신, 제법 맘에 드는군그래.”
“그보다 저희가 가져온 물건이 더 마음에 드실 겁니다.”
“하하하! 그래그래, 얼른 들어가자고!”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뒤뚱뒤뚱 걷는 세브리를 뒤로, 매튜와 버드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천천히 너머로 펼쳐진 거대한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늦은 저녁,
캠프 인근의 깊은 숲.
작게 형성된 평탄한 지대 한가운데엔 어둠을 밝혀줄 모닥불이 춤을 추고 있다.
그 불꽃을 조명 삼아 나와 맥레인이 마주 서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맥레인은 서슴없이 검집에서 낡은 아밍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맞춰,
나도 내 허리에 매달린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네게 할 얘기가 있다.”
“그런데 왜 검을 뽑으시는 겁니까?”
“겸사겸사 몸도 좀 풀고 하는 거지, 시간이 아깝잖아?”
“…, 알겠습니다.”
맥레인이 한쪽 발을 깊게 내밀며 날 압박하기 시작했다.
챙!
이윽고 내 검과 맥레인의 검이 서로 맞부딪치며 요란한 쇳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에 맞춰 맥레인은 검에 몸을 붙여 내게 불쑥 다가왔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따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움직여요?”
세게 맥레인의 검을 내팽개치려 했지만,
끼기긱!
“테이퍼를 읽으라고 했지!”
내 롱소드의 검날과 면을 타고 아밍소드를 놀리는 맥레인.
“네 몸으로 상대 검의 테이퍼를 읽고 검을 놀리는 순간, 넌 상대를 뒤집어버릴 수 있는 지렛대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도대체…!
마치 자석처럼, 그의 아밍소드가 내 롱소드에 찰싹 붙어있어.
“이렇게 말이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맥레인의 어깨가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잡은 검으로 어떻게든 맥레인의 다음 동작을 막으려 했지만, 그의 아밍소드가 철저하게 내 검날과 면을 타고 희롱하듯.
끼긱!
불똥을 튀기며 행동 자체를 가로막을 뿐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중심을 잃어버린 나는 바닥에 곤두박질쳤고, 그 기세를 놓치지 않은 맥레인은 내 목에 검을 겨누었다.
“이게 네 검술의 약점이야. 그리고 방금 내가 한 방식대로 그 약점을 극복해나가야 할 거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거지?
“상대가 한 호흡에 내지른 동작 그 자체로 죽음을 선사하는 네 검술은 틀림없는 무적에 가까운, 기행으로 봐도 될 정도로 대단한 것은 맞아. 하지만 서로 부딪치기도 전에 그 특성을 파악한 실력자가 네 상대였다면? 한 호흡을 전체적인 호흡으로 바꿀 줄 아는 상대였다면?”
“…, 지금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죽겠지요.”
“그래, 맞아. 물론 그만한 상대가 중립지역에 존재할 일은 희박하겠지만 꼭 명심해야 할 거다. 너 같은 놈이 이 세상에 수두룩하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은, 너 같은 놈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이내 맥레인은 검을 거두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진짜 골 때리는 상황이 뭔지 알아? 바로 서로가 모든 걸 인지한 채 싸움에 임했을 때야.”
난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
“왜죠?”
그러자 맥레인은 날 번쩍 일으켜 세워 주며 말했다.
“그때부터는 모든 요소를 상정하고 싸움에 임해야 하거든, 검의 모습, 재질, 특징 그 모든 것을 말이야.”
그러니까 맥레인은,
언젠가 나보다 더한, 아니면 나와 같은 이와 싸우게 될 상황을 위해 그 책들을 읽으라 했던 거구나.
그리고 지금, 그는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내게 제시해주고 있었던 거야.
그러고 보니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옛날, 어느 대단한 창술가와 싸웠을 때.
그 상황에서 자신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기행 하나뿐이었다고.
그 말이 이젠 또 새롭게 느껴진다.
맥레인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상대는 얼마나 강한 존재였을까?
감히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꼭 명심하겠습니다만…, 그 얘기를 하려고 절 이곳에 부른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 말에 맥레인의 두 눈이 크게 떠진다.
그는 얼른 검을 검집에 넣고선 담담히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 했더라? 그렇지! 그러니까 포키스를 포함해 우리 셋이서 그 상황에 대비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려고 했었어.”
그리곤 그는 버릇처럼 품에서 작고 둥근 부싯돌 두 개를 꺼내 손안에 쥐고 굴렸다.
“시몬은 지금 이쪽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아무튼, 너에게 해줄 말은…,”
맥레인이 뒷머리를 긁적거린다.
“네 약점을 얼른 극복하라 이 말이야.”
뭔가 날 불러낸 목적이 주객전도 된 느낌.
“그리고, 내일은 인챈트에 관해서 설명해야 하니까 아침 일찍 말을 탈 준비를 해라.”
맥레인은 그 말을 마치곤 캠프 쪽으로 걸어가며 연초를 태웠다.
난 그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모닥불을 끄고 천천히 캠프 쪽을 향했다.
맥레인의 검이 내 검과 딱 붙어 떨어지지 않던 그 생생한 감각들을 상기하면서.
그리고 그 생각에 빠진 채 캠프에 도달했을 땐,
매튜와 버드가 돌아와 있었다.
이미 가족 모두가 도착한 그 둘에게 몰려와 한바탕 질문 세례를 하고 있는데,
매튜가 마차 위에 올라서서 모두를 진정시킨 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나까지 불러모아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브리와 만났어, 그리고…,”
그리고?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매튜는 슬쩍 웃으며 입을 연다.
“그가 우리가 가져온 물건 대부분을 사주겠다 하더군.”
그러자 곳곳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나 아주머니의 웃음, 시몬의 미소.
안드레와 촙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발을 구르는 모습.
그러나 그 사이에서 냉철한 표정을 유지한 매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직 말을 다 하지 않았다는 듯한 뉘앙스로 모두를 빠르게 침묵시켰다.
이내 자연스럽게 다가온 침묵 속에서 매튜가 나지막이 말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어. 수확이 끝나는 시점, 그러니까 수확제가 시작될 때쯤 물건을 매입하겠다는군.”
거기에 더해 버드가 사족을 붙인다.
“아마 우리도 축제에 참여해 즐길 수 있도록, 세브리 쪽에서 신경을 써준 것 같아.”
드디어 약속을 받은 것인가.
우리에게 자유를 팔아줄 사람에게서.
하지만 그 사실에 마냥 기쁘다기보단 살짝 허무한 기분이 들 뿐이다.
애초에 난 세공소의 함 속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었기도 하고…,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한구석에 기대어 서 있던 맥레인 역시 나와 같은 표정이다.
이윽고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린 서로를 향해 뭔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