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수확 (8)
아무도 깨지 않은 이른 새벽.
제법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캠프를 가로지른다.
그렇게 구석에 간단히 차려놓은 마구에 도달하자,
그곳엔 맥레인이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챙겨오라는 건 잊지 않고 잘 챙겨 왔겠지?”
그의 말에 난 대답 대신 옆구리에 가죽띠로 단단히 고정된 한 권의 책을 보여주었다.
“좋아, 출발하자.”
그는 새벽부터 아주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알던 무법자 맥레인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과거의 맥레인 같은…,
“바람 기름은 안 발라도 됩니까?”
“얼어 죽을 일 있냐?”
내가 알던 맥레인 맞네.
제법 능숙하게 안장을 잡고 말 위로 올라탄 나는 고삐를 쥐어 잡고 벌써 저 멀리 나아가 있는 맥레인을 따라가기 바빴다.
그렇게 캠프를 벗어나 숲에 들어서기 무섭게,
“맥레인, 디안. 사냥이라도 가나?”
“오전 중엔 올 거야, 포키스. 그럼, 수고하라고.”
“그래.”
보초를 서고 있던 포키스가 나무 위에서 인사를 건네왔다.
“포키스, 이따가 봐요.”
“잘 다녀와, 디안.”
짤막하게 그와 인사를 나눈 뒤, 사정없이 고삐를 놀려 달려나가는 맥레인을 따라잡기 위해 나는 서둘러 말을 보채야만 했다.
다그닥 다그닥!
땅을 치대는 발굽 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샛노랗게 질린 나뭇잎들은 세상을 쓸쓸함으로 채워간다.
한바탕 수확을 한, 저 먼 밭에서부터 올라오는 농익은 볍씨 냄새는 점점 옅어져.
이내 새롭고 낯선 숲 냄새만이 내 코를 가득 채웠다.
대충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도 맥레인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가는 길목에 얕은 개울을 만나버렸다.
“워, 워.”
맥레인의 목소리에 맞춰 달려나가던 말이 걸음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덩달아 따라오던 내 말도 자연스레 멈춰 달달한 숨을 들이켠다.
“물살이 그리 세진 않아, 천천히 따라와라.”
“네.”
다각, 다각.
우아하게 걷는 두 마리의 말이 개울에 발을 담근다.
이윽고,
차박, 차박.
발굽이 얕은 개울을 짓밟으며 별안간 소란을 일으켰다.
난 그 잠깐의 여유를 이용해 맥레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나도 몰라.”
“예?”
“적당히 멀리, 적당히 넓은 곳.”
그의 대답에 난 더는 질문하지 못했다.
애초에 뭘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을 테니까.
그저 묵묵히,
개울을 벗어나 다시 달려나가는 맥레인의 뒤를 따를 뿐.
새벽하늘을 품은 구름은 퍼즐 조각처럼 인위적인 모습으로 조각나 있고, 곧 다가올 태양에도 부릅뜬 별들이 점점이 빛나네.
살짝 북쪽으로 올라간 건지 나무는 꺼멓게 물들어, 가진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한 모습들.
하지만 사이사이 색 잃지 않은 꽃들이 망울진 모습으로 피어 있다.
만일 내가 세공소에서 꽃과 같은 밝은 보석으로 만들어졌었다면, 밤하늘의 별이 아니라 저런 꽃을 보며 살아갔겠지.
그러면 저 이름 모를 꽃들의 꽃말까지도 모두 다 알았을 거야.
스쳐 가는 풍경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가며 끝 모를 이 순간의 무료를 달래가던 와중.
드디어 맥레인이 어느 가파른 언덕 위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군.”
언덕 위, 누구도 발들이지 않은 평야.
그 위에서 식은 낙엽들을 짓밟으며 첫 발자국을 남기는 맥레인을 따라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탁 트인 것이 마치 산 정상에 올라 그 여운을 만끽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입니까? 인챈트를 이해하기 위한 장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꿇어라.”
다소 생뚱맞은 맥레인의 요구.
하지만 그의 표정을 살핀 나는 묵묵히 그 말에 따랐다.
“지금부터 옛날이야기 하나를 해주겠다.”
양 무릎을 꿇은 내 앞에 우두커니 선 맥레인은 그렇게 운을 떼곤 낮고 느긋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의 시대보다 더 이전에, 용의 시대 이후가 다가올 것이란 걸 알고 있던 누군가가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내 예상을 뒤엎을 만큼 오래된 것이었다.
“그 누군가는 ‘현자’라는 이름으로 불렸지. 용의 시대 이전부터 용의 시대 이후인 지금까지도 그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내 귀가 받아들이기를, 현자라는 존재는 내 상상이 최대로 그려낸 수평선 그 너머에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현자는 용의 시대 이후에 찾아올 불균형을 억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챈트다.”
“어떤 불균형으로부터 말입니까?”
“마법사.”
맥레인은 담담하게 내 물음에 즉답했다.
“용의 시대가 끝나면서 많은 것이 사라졌어. 그리고 그로 인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기 쉬운 세상이 만들어졌지. 현자는 그것을 견제하고 싶었던 거다. 세상의 균형! 그걸 이루고 싶었던 거야.”
한쪽으로 편향되기 쉬운 세상이란 말은 즉,
“용의 시대 이후 날씨를 관장하게 된 마법사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 본래 인챈트는 그런 마법사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힘이다. 절대적인 존재에 가까운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지.”
곧 맥레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 힘이 오롯이 본연의 목적에 맞게 쓰이는 일은 없었어. 아주 당연하게도 말이야.”
밤하늘만을 보며 살아왔을지언정,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뼈저리게 알고 있다.
왜,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조차 두 발 걷는 자들의 욕망이 나오질 않는가?
“지금 이 세상에 대다수 인챈트는 수많은 이들이 내세우는 한 종류의 힘에 불과해. 하지만 마법사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스스로 탑에 갇힌 채 날씨만을 어루만지고 있지.”
해서, 궁금합니다.
“그 인챈트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용의 시대 이후에 사라진 것들.”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맥레인의 단호한 두 눈을 보고 알았다.
“용의 시대를 관통했던 모든 자연적 재해. 그것이 바로 인챈트다.”
이제야 알겠어.
인챈트라는 것이 가진 힘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네 검의 이름이 뭐지?”
“87년 셀레어입니다.”
“그것은 곧 현자가 정한 100년의 단위 속 87번째에 포함된 재해를 의미한다.”
이내 맥레인은 허리를 숙여 무릎 꿇은 내 허리로부터 셀레어를 뽑아 들었다.
“100년이란, 현자가 용의 시대를 살아가며 인챈트, 즉 재해를 기록했던 시간이자 그 세기를 구분하는 단위다. 0에 가까울수록 그 세기가 강하다는 뜻이고 반대로 100에 가까울수록 약하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셀레어는…,
“네 검에 깃든 인챈트가 약할 것 같으냐?”
맥레인이 내 생각을 꿰뚫듯 물어왔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쭈그려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춘 채 단호하게 속삭였다.
“천만에, 100년 단위 안에 들어가는 인챈트 모두가 마법사를 죽일 힘을 가지고 있다. 바꿔 말해볼까? 이 검이 전쟁터에서 쓰이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실감하지 못해 잘 모르겠습니다.”
“전장의 판도 자체를 바꾼다. 상대 진영은 활을 쏠 생각조차 못 하게 될 것이고, 날씨 파편을 이용한 병기에조차 기댈 수 없게 되지. 왜냐고? 살아있는 재해 앞에서 만들어진 날씨의 파편 따위는 모두 쓰레기가 되어 버리거든.”
그 모든 것이 그저 인챈트 하나만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진정,
용의 시대 이후 자체를 부정하는 힘이로구나!
검 자체가 명품이라 금화 수십만 개를 호가하는 게 아니었어, 대부분이 저기에 깃든 인챈트가 가진 파급력에 매겨진 값이었던 거야.
이젠 오히려,
매겨진 가격이 인챈트에 비해 볼품없이 느껴질 정도다.
맥레인이 하는 말이 슬슬 이해되는군.
지금 세상이 인챈트를 어떤 식으로 취급하는지.
“어때, 이제 어느 정도 정보를 갈무리했으니 좀 알 것 같나?”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힘이라면 왜 누구나 적극적으로 쓰질 않은 겁니까?”
“당연하게도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제약?”
“우선 어지간한 규모의 국가, 가문, 기업 등등 자신을 비호 해줄 단체가 없는 자가 인챈트의 힘을 가지게 된다면 순례자로부터 평생을 쫓기며 살아야 한다.”
들어본 적 있다.
“순례자는 정확히 어떤 자들이죠?”
“마법사가 고용한 사신, 인챈트를 추적해 소거하는 자들이지.”
맥레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용자가 인챈트에 휘둘렸을 때야. 인챈트의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주했을 경우, 사용자는 발휘된 재해에 필연적으로 잡아먹힌다.”
“그게 대체…,”
“만약 그 재해가 태풍이라면 마땅히 그 태풍을 다스릴 눈이 되어야 할 테고, 지진이라면 그 지진을 감당할 진원지가 되어야 할 테지. 그래서 대부분은 인챈트가 가진 최대의 힘을 사용하길 꺼린다. 그건 자살행위니까.”
정말이지 강력한 힘에 따른 강력한 제약이로구나.
“물론 그보다 더한 마지막 규칙이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네 생각을 묻고 싶어. 네가 사양한다면 난 무조건 그 뜻을 따를 생각이야. 인챈트가 없어도 네가 가진 검술이라면 충분히 세상에 통할 테니까.”
맥레인은 다시,
내가 알던 맥레인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직도 아리송할 뿐이야.
내게 주어져도 마땅한 힘인지, 아니면 과분한 힘인지.
“맥레인.”
“그래, 디안.”
“제가 재 속에서 눈을 떴을 때, 저는 이미 자유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는 내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아직 잘 모릅니다. 가진 자유를 어떤 식으로 빼앗기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해서 그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 자유를 지킬 수 있다면. 그 힘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그러면 기쁘게 그 힘을 감당해볼 생각입니다.”
해보자.
나는 이제 타인의 입맛대로 세공되는 그런 편리한 도구가 아니니까.
나는 디안.
스스로 깎고 다듬을 줄 아는 사람이다.
“좋다, 네 뜻에 따르지.”
내 답을 들은 맥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87년 셀레어를 땅에 박아 넣었다.
그리곤,
자루 끝에 달린 폼멜을 잡고 돌리기 시작한다.
이내 돌아가던 폼멜이 나사처럼 빠져버리고, 그 안에서 날카롭게 솟은 가시가 드러났다.
그러나 맥레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자루를 감싸던 가죽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가죽 안에서 각진 나무로 된 자루의 뼈대가 드러났다.
흑색 나무 일부엔 조각칼로 정성스럽게 파낸 어떤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제 맥레인이 경건한 말투로 선언한다.
“인챈트를 머금은 무기를 쥐기 위해서는 세 종족의 손길을 거쳐야만 한다. 이 검은 귀 큰 자들이 두들겼고, 인챈트는 난쟁이들이 새겼으며, 주인이 될 자는 인간이리라.”
마지막 규칙이란 게 저것이었나.
세 종족의 손길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
인챈트라는 힘이 발휘되기 위해선, 억지로라도 화합이 가담되어야 한다는 거로구나.
어찌 보면 가장 지켜지기 힘든 규칙일지도.
“디안, 일어나라.”
맥레인의 말에 따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는 내 움직임에 맞추어 땅에 박아넣은 검을 놓은 채 뒤로 물러났다.
이제 마른 땅 위에 한 자루의 검만이 덩그러니 박혀있다.
“검 앞에 서라.”
천천히,
맥레인의 손짓에 따라 박힌 검 앞에 섰다.
“자루 끝에 손바닥을 찔러 네 피로 맹세하라.”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은 채.
자루 끝에 솟은 가시를 손바닥으로 품었다.
욱신거리는 통증, 그리고 손바닥으로부터 흐른 피가 가시를 타고 자루의 뼈대인 나무에 스며든다.
이윽고,
검이 박힌 땅을 중심으로.
강대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죽어 빛바랜 낙엽들이 검으로부터 도망치고, 그 안에 있던 젖은 흙마저 덩어리진 채 날아갔다.
동시에,
손바닥을 찌른 가시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뿜어져 나와 내 몸속을 들쑤셨다.
그 힘이 워낙 강해 가시로부터 손바닥이 떨어질 것 같아 나는 더욱 단호하게 가시에 손바닥을 밀어 넣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통증은 더욱 심해져서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끝내,
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바람이 멎었다.
“되었다.”
맥레인은 천천히 다가와 자루 끝에 박힌 내 손을 손수 떼주었다.
그리곤 묵묵히 챙겨온 붕대로 내 손을 단단히 감아주었다.
“이제 가져온 용의 시대를 펼쳐 87년 셀레어의 정체를 이해하라.”
맥레인은 그 말을 끝으로 홀연히 말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나는 그런 맥레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폼멜을 자루 끝에 끼워 맞춘 뒤 가지고 온 용의 시대를 꺼내 들었다.
어디서나 쉽게 보일 법한 낡은 책.
그 내용도 얼핏 읽어봤지만, 그저 따분한 기록물에 불과했었는데…,
어찌 셀레어의 정체를 이해한단 말인가?
나는 반신반의하며 그 낡은 책을 펼쳤다.
그러자,
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글귀가 밝게 빛나고 있어…!
서둘러 땅에 엎드린 나는 밝게 빛나는 글씨만을 추려 머릿속에 나열시켰다.
[87년 셀레어, 두 개의 산을 깎은 세상의 소용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