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47화 (47/365)

47화. 수확 (9)

들끓는다.

몸 안에 흐르는 피가 들끓고 있다.

그런 끓음을 품고 있는 신체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아.

어서 움직여 보라고 말이야.

펼쳤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천천히, 아직 마르지 않은 핏물에 흥건히 젖은 자루를 붙잡았다.

그러자,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동시에 앞으로도 두 번 다신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새로운 감각들이 내 몸속에서 폭발하듯 용솟음쳤다.

그러나 그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감각은 칼자루를 잡은 손에 맞물리기 무섭게,

지독히 잠잠해졌다.

검과 그 검을 잡은 손이 마치 수평을 유지하는 천칭의 중심이 된 것 같았다.

이제 슬쩍,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본다.

귀 큰 자들의 검답게 이질적으로 가벼운 무게감이 내 팔을 타고 느껴졌다.

변한 건 없다.

외적으로는 말이야.

하지만 검을 잡은 손에 정체된 그 힘은.

왜인지 마음만 먹으면 휘둘러 내뿜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휘둘렀다.

맥레인의 검술을 받아치며 익혀둔, 온전히 내 것에 해당하는 동작들로.

그렇게 첫 동작이 마무리되는 순간, 휘두른 검 끝이 한곳에 머무르는 그 순간.

손에 정체되어 있던 기운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며,

팍!

검으로부터 압도적인 위력의 풍압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어서, 그 반동으로 검을 놓치고 한참이나 뒤쪽으로 나뒹굴어야 했다.

“크헉!”

검을 잡은 어깨로부터 극렬한 통증이 느껴진다.

자루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면 그대로 팔이 뜯겨나갔을지도…!

떨리는 팔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그제야 눈 앞에 펼쳐진 광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젖은 땅 위,

내가 휘두른 검날의 궤적과 그 모양이 정확히 일치하는 거대한 흔적.

진정,

내가 내지른 휘두름이 이런 결과를 낳았단 말인가.

경이롭다기보단,

그 위력에 경계심이 먼저 들 정도다.

“허…,”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뼈저리게 느껴지는 단 한 가지의 소감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과연, 내가 제어할 수 있을까?

이 강대한 힘을?

이윽고 팔의 떨림이 멈췄다.

마찬가지로 내 머릿속을 흔들던 갈등도 뚝 그쳤다.

이제 난 평온한 표정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을 집은 채 맥레인에게로 향할 뿐이다.

두려움도, 갈등도.

이제는 다짐 앞에서 의미가 없으니까.

그렇게 머릿속을 비우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이번엔 의문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궁금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당장 풀고 싶은 의문이 너무나 많아 가슴이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야.

서둘러 맥레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그는 날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책에서 본 것은 너만이 알고 있어야 한다.”

“어째서죠?”

“해당 인챈트 안에 담긴 재해의 종류는 무엇인지, 그 재해가 가진 힘의 한계점은 어디까지인지 떠벌려봤자 너만 손해니까.”

“하지만…,”

“인챈트는 누군가의 가르침이 일절 통하지 않는 영역이야. 오롯이 홀로 감당해내야 하지.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알아봤자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야.”

단호하게 대꾸한 맥레인은 제법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어때, 첫 소감은?”

그의 시선이 내 오른쪽 어깨를 향해 있는 것을 보니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네.

“아파요, 엄청.”

솔직한 대답에 맥레인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재해를 품는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지, 그 힘은 사용할 때마다 철저하게 네 몸을 무너트릴 거다.”

“차라리 이용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그 말이 맞아, 가능하면 이용하지 않는 게 좋지.”

“하지만 이 정도 힘이라면 누구든 욕심을 낼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말도 맞아.”

맥레인이 입에서 연초를 땐 채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힘이란 건, 발휘됐을 때의 위력보다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위력이 더 강해. 그래서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거고.”

“그렇지만 바꿔 말하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기에…,”

“결국엔 가지고 있는 힘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지. 특히나 우리 같은 쥐뿔도 없는 무법자들에게 그 힘은 적극적인 발휘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어.”

“힘의 아이러니로군요.”

“아니, 힘의 진리다. 반대로 네가 거대한 세력에 속해 있는 자였다면 누가 가지고 싶다 해서 그 힘을 감히 노릴 수 있었을까?”

힘의 진리.

생각지도 못했다.

뭔가 그의 입에서 힘과 관련된 반면교사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과거를 거슬러 올라온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 과거를 거슬러 올라왔기 때문에 힘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던 거야.

“자 이제 이런 실없는 이야기들은 그만하고.”

맥레인은 좀 더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인챈트에 관련해서 궁금한 게 많지 않나?”

“다 질문해도 됩니까?”

“당장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잖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웃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였다.

“인챈트의 실체는 글귀였던 겁니까?”

칼집에 물린 자루를 그에게 내밀며 묻자 그는 감색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현자가 자신의 기억으로 쓴 글귀지.”

맥레인은 그 말을 하고서 금방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기억 그 본질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그래. 물감이라고 생각해라. 기억이라는 물감으로 쓴 글귀.”

“일종의 마법으로 구현해낸 것이 인챈트란 소리군요.”

내 말에 그가 이마의 주름살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 말이야. 마법이란 건 참 설명하기가 엿 같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본질을 왜곡시켜야만 설명할 수 있거든.”

그의 말이 어느 정도는 공감이 간다.

기억을 물감 삼아 글을 썼다고 해봤자…,

내 머릿속엔 지팡이 같은 물건으로 관자놀이를 푹 찍어 글을 적는 묘령의 노인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현자가 시간을 주무르면서 격동하는 용의 시대를 관통했고, 그 안에서 목격한 재해를 기억이라는 매개체로…, 씨발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맥레인은 재차 내게 설명을 해주려다가 곧 다 핀 연초를 바닥에 내던지며,

“인챈트는 아무튼 그런 거야.”

대충 결론을 내버렸다.

“그런 거, 알겠습니다.”

“비아냥거리는 거냐?”

“절대 아닙니다.”

진심이에요, 맥레인.

솔직히 그냥 인챈트는 그런 거라 하는 게 속 편할 것 같네요.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그저 평범한 기록물인 줄 알았던 책이 사실은…,”

“한 가지 확실한 건 현자는 장난기가 많은 작자였다는 거야. ‘용의 시대’라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에 마찬가지로 자신이 그 시대에 보았던 것들을 숨겨놓은 걸 보면.”

“다음 질문하겠습니다.”

내 열성적인 물음에 맥레인은 콧대를 주무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것만 확실히 해줘, 오늘 안에 끝나기는 하냐?”

“장담 못 하겠는데요.”

“그럼 하지 마.”

“아뇨, 끝날 것 같아요.”

내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맥레인은 할 말을 잃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날 내려보다가 본격적으로 말에 기댄 채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그 낡은 검.”

슬쩍 그의 말 안장에 채워져 있는 낡은 아밍소드를 가리키자 그는 입술을 움찔거렸다.

“거기에도 인챈트가 걸려 있다는 건 이제 알겠어요.”

“해서?”

“이제 이해가 어느 정도 되네요. 이 검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된 이유 말이에요. 인챈트를 두 개 이상 다루는 것도 규칙에 어긋나기 때문이죠?”

“두 개 이상의 인챈트를 다루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야.”

“그렇다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영역이 그만큼 커지는 것뿐. 너도 그 힘을 몇 번 써보면 이해가 될 거다.”

맥레인은 이어서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게 검을 준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야.”

“그러면요?”

“큰 목적은 시몬 바스티유를 지키기 위해서지.”

“그렇다면 작은 목적도 있나요?”

“너 자신으로부터 너를 지켜내라고.”

담담한 그의 말에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특별히 널 경계하거나, 싫어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오히려 널 생각하고 가족으로서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지.”

바닥에 던진 연초를 발로 비벼 끈 맥레인은 이제 안장을 어루만지며 말에 올라탈 준비를 했다.

“의도와는 달리 세공소를 불태워버린 건 분명 네가 한 일일 테고,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래요, 맞아요.”

안장 위로 단숨에 올라간 맥레인은 시무룩한 날 보며 피식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래서 너에게 준 거야, 말했지? 재를 거름 삼으면 뭐가 됐던 피어날 거라고. 사실 내가 보기엔 이미 새싹이 돋아난 것 같기도 하거든, 어쩌면 그것이 활짝 피었을 때 그 찬란함을 네가 들고 있는 그 검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도.”

그 말에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끈한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뜨거운 감자를 삼키듯 꾸역꾸역 넘겨야 할 정도로.

“여기까지 하자고,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내려오기 전까진 캠프로 돌아가자. 저녁엔 검을 정비하는 걸 가르쳐주마.”

“네, 맥레인.”

난 서둘러 그를 따라 말 위에 올라탔다.

가는 길이 차갑고 무겁게만 느껴졌었는데,

오는 길은 무겁지만 따듯하기만 하구나.

포근하게 모습을 드러낸 해처럼.

* * *

시몬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매튜의 설명을 묵묵히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말이야.”

이윽고 매튜의 설명이 끝나자, 시몬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다시 팔짱을 낀 채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쨌든 맹점은 곧 있을 수확제라는 건데.”

“그래, 시몬.”

“세브리가 통이 큰 걸까, 아니면 그 음흉함이 깊은 걸까.”

“그건 나도 정확히 설명하기가 힘들어. 그 버드조차 세브리의 얼굴을 보고 아무런 설명도 못 할 정도였으니까.”

“수확제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캐봐야겠어.”

“동감이야, 누굴 보내지?”

“포키스는 우리 캠프를 지킬 중요한 인물이니 지금은 차출할 수 없어. 맥레인도 이곳을 지키는 게 더 나아.”

“촙과 안드레는? 케니도 제법 이쪽 일엔 능숙하잖아?”

매튜의 말에 시몬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돼.”

그 단호함에 놀란 매튜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냥,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지. 오랜만에 내가 직접 움직여야겠어.”

“그건 너무 위험해. 이 지역까지 수배가 떨어지지 않았다뿐이지 네 목에 걸린 현상금은 유효하다고.”

“괜찮아, 디안과 함께 갈 거니까.”

“디안?”

“요즘 조직의 중대사를 결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어,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 같아. 그중에서도 디안이 해준 일을 생각하면 내가 정말 안일했지.”

“정말 괜찮겠어?”

“매튜, 괜찮대도! 그냥 살짝 라티아 인근을 돌아보다 올 거야. 이 정도 규모의 밭이라면 수확제 역시 굉장히 성대하게 치러졌을 테니 조금만 조사해도 다 나올 거야.”

“조금만으론 안 될 거야, 앞서 말했듯이 세브리는 노예를 부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은 어느 제국 정규군만큼이나 중무장한 자들뿐이라고.”

“그렇다면 좀 더 진득하게 돌아보다 와야겠군.”

매튜가 혀를 찬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그 반응에 시몬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제 좀 적응할 때도 됐잖아, 매튜?! 하하!”

“적응될만했으면 진즉에 했겠지!”

“하하하하!”

이젠 배를 잡고 웃는 시몬의 모습에 매튜는 쓰고 있던 단안경을 벗고서 한숨을 픽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디안 그 녀석 하루가 다르게 장성해서 지금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할 지경이거든.”

이어지는 매튜의 말에 시몬이 눈을 반짝였다.

“맥레인이 꽤 정성 들여 가르치던데.”

“말도 마, 최근에서야 부쩍 그렇지 시작부터 애를 쥐 잡듯이 두들겨 팼다고.”

“하지만 너도 봤잖아 매튜, 큰 구름에서 그 아이가 보여줬던 것들을! 마치 노랫소리 같은 말로 천연스럽게 사람들을 홀리는 것도 그렇고 그 신묘한 검술 같은 건 아직도 꿈에서 나올 지경이야.”

매튜는 부정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디안이 보여준 놀라운 능력들 앞에서 수긍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해서 매튜는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디안이라면 시몬과 함께 다녀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럼 간만에 디안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다가 돌아와.”

“그래, 매튜.”

말을 마친 매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곧 손안에 쥐어질 자유에 천진한 모습으로 흥분한 시몬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는,

천천히 캠프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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