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수확 (10)
저녁.
캠프 근처.
대충 작게 피운 모닥불.
나는 맥레인에게 간단한 무기 정비법을 배웠다.
사실 그리 거창한 건 아니었다. 끽 해봐야 고운 결의 천이나 가죽으로 날을 닦는 게 전부였으니까.
날이라도 가는 법을 배우나 싶었지만 그건 전문가에게 맡기면 될 일이란다.
오히려 뭣 모르고 날을 갈다간 무기 자체를 버려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면서.
더군다나 내가 가진 무기,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무기들은 웬만하면 날을 갈 상황이 그리 쉽게 오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혹시나 관련된 정보를 찾기 위해 책을 펼쳐봤는데,
3대 숲에서 만들어진 무기들은 특정 별빛을 이용해 날붙이에 막을 씌우는 터라 기본적인 내구력이 출중하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같은 명품끼리 수십, 수백 합을 부딪치지 않는 이상 이가 빠지는 상황이 그리 쉽게 연출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다만 그렇다고 유용한 것들을 배우지 않은 건 아니다.
기름의 종류에 대한 것은 물론, 필요하다면 특정 기름을 얻기 위해 소위 괴물이라 불리는 녀석들을 사냥해야만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또 맥레인은 내게 시범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셀레어의 벗겨진 자루를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빈틈없이 감아주었다.
덕분에 자루를 풀 먹인 가죽 따위로 감싸는 법을 자세히 익힐 수 있었다.
슬슬 어둑해지는 하늘, 눈을 뜨기 시작한 별들이 보일 무렵.
맥레인은 포키스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렇게 나 홀로 모닥불을 지키고 있을 때를 기다렸던 걸까.
비질라는 버릇처럼 내 곁으로 다가와 꽃향기가 나는 시집을 탐독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며 읽는 시에 한창 귀 기울이고 있었을 때, 이번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모닥불 근처로 다가왔다.
“보스.”
“그냥 시몬이라고 불러, 디안.”
“시몬!”
시집을 읽던 비질라가 책을 덮고 대뜸 시몬에게 장난을 걸었다.
그러자 시몬은 그 거대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천진함으로 그녀를 힘껏 들어 장난에 맞장구쳐주었다.
“비질라, 디안과 잠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자리 좀 비켜줄 수 있겠니?”
“네, 시몬!”
한껏 오른 흥이 팍 식었을 테지만 눈치 살피기를 잘하는 비질라는 금방 수긍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제 불씨만이 반짝이는 작은 모닥불 주위엔 나와 시몬 뿐.
“디안, 요즘은 좀 어때. 가슴 쪽 상처는 괜찮고?”
“네, 시몬.”
“누가 괴롭히지는 않고? 하긴, 짓궂은 재키 쪽 식구들이 없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
단지 대화 몇 마디 주고받은 것뿐인데 어색한 기류가 모조리 휘발된 느낌.
시몬은 그런 사람이었다.
“근래 네가 보여준 것들은 정말 대단했어.”
“모두가 같이 한 일인걸요.”
“하지만 그중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한 건 디안 너야,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시몬의 결정이라고 들었어요.”
난 슬쩍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을 들어 보였다.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큰 구름에서 있었던 일이 모두 끝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검은 네 손에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애초에 그런 물건은 팔 때 위험부담이 크기도 하고.”
“전혀 부담스럽지 않아요,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게 이런 물건을 주셔서.”
“우리가 왜 서로를 가족이라 부르는 줄 알아?”
시몬이 다 죽어가던 모닥불을 건드려 불씨를 자극했다.
그러자 이내 기세 좋게 부활한 불꽃이 맹렬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분배라는 단어에 ‘당연’이라는 말을 붙이기 위해서야.”
“마치 피 섞인 가족처럼요?”
내 물음에 시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서 그 유대가 무조건 끈끈할 거란 고정관념은 버려야 해. 이 비정한 세상에선 가장 단단해야 할 가족이라는 울타리마저 아주 쉽게 무너질 수가 있거든. 반대로 피 하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도 그 유대가 끈끈해질 수도 있어. 마찬가지로 비정한 세상이니까.”
“마치 시몬 바스티유처럼요.”
“하하, 그래. 우린 제법 그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 울타리는 무너지지 않을 거예요. 시몬이 있으니까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어쨌든, 네가 그 검을 갖게 된 이유에 거창한 것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저 당연한 분배의 결과물이었을 뿐이란 걸 알아둬.”
시몬은 한창 모닥불에 장작을 던지며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 천천히, 어색한 기류가 다시 모일 때쯤 입을 열었다.
“맥레인에게 들었다. 라티아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네, 시몬.”
“내가 직접 그것에 대해서 좀 알아볼 생각이야. 그래서 말인데, 디안 네가 나와 동행해줬으면 해.”
“좋아요, 그 문제에 대해서 저도 알아보고 싶었거든요.”
내 흔쾌한 답에 안심이 들었는지 시몬은 활짝 핀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아침 일찍 출발하지.”
* * *
새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캠프는 두 장정에 의해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간소한 준비를 마친 뒤, 말을 타고 출발한 둘은 곧 캠프 외곽에 보초를 서고 있던 맥레인과 인사를 나눈 후 라티아로 향하는 굽이진 길목을 향해 움직였다.
그 풍성했던 황금밭은 이미 수확을 거의 다 마쳤는지 대지가 다 드러나 황량해진 모습으로 우릴 반겼다.
확 달라진 풍경 탓일까.
그 고소한 냄새가 넘치던, 풍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던 땅이 텅 비니까 제법 쓸쓸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구나.
라티아 쪽으로 길게 뻗은 길을 따라 좀 더 깊숙이 들어가자,
새벽부터 아직 미처 다 수확하지 못한 밭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자들이 보였다.
간간이 모인 여러 무리의 사람들은 그렇게 반복되는 노동에 맞춰 제법 구슬픈 가사로 가득 찬 노래를 흥얼거렸다.
“매튜가 말한 대로라면 저들은 세브리가 부리는 노예일 거야. 저들과는 접촉하기가 어렵겠어. 일단 도시 쪽을 먼저 찔러보자고.”
시몬은 그런 자들을 애써 외면한 채 저 너머 보이는 거대한 건들을 가리키며 박차를 가했다.
그 뒤를 따라 말을 몰려 하는데,
찰나의 순간 밭에서 일하던 소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소년의 몸은 가혹한 채찍질로 인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굉장히 맑아서, 날 바라보는 소년에게서 어떤 묘한 감정을 느낄 정도였다.
소년은 날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선망? 부러움?
어쩌면 그저 초연한 상태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쫓아 시선을 옮겼을지도.
제법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렇게 나와 시몬은 따로 외벽이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도시인 라티아에 도착했다.
이른 새벽임에도 곧 있을 수확제를 준비하는 듯, 골목마다 분주한 사람들로 가득하구나.
“디안, 인근 주점부터 가 보자.”
“네.”
말을 몰아 도시 중앙에 크게 뻗은 길을 따라가길 몇 분.
꽤 큰 주점을 발견한 우리는 그 앞에 박혀 있는 나무 기둥에 말을 묶은 뒤 조심스럽게 내부로 들어섰다.
코를 찌르는 독한 술 냄새, 그것을 한 바가지 담은 채 썩은 이를 드러내며 수다를 떠는 자들의 악취.
그 악취와 한데 섞인 화장품과 향수 냄새.
구석에선 낡아빠진 기타를 튕기며 무미건조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그 앞엔 우스꽝스러운 복장 한 난쟁이가 느긋하게 춤을 추고 있다.
그런 난쟁이의 몸 곳곳에는 매질을 당한 듯한 멍 자국이 선명했다.
시몬은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가 지저분한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그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 발을 뗐지만,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자기야, 자기라면 나랑 베티 둘이서 오입질해 줄 수 있는데. 어때? 반값만 받을게!”
대뜸 달려든 여인이 내게 노골적인 미소와 함께 추파를 던지고,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몇몇 장정이 매서운 눈빛으로 날 쏘아보았다.
난 그런 그들의 눈빛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검 자루에 손을 얹자,
경박하게 추파를 던지던 여인은 물론,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자들이 하나둘 황급히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리로 와.”
때마침 그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시몬이 손을 번쩍 들어 나를 불러주었다.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시몬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거기에 더해 그 누구도 나와 시몬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첫날의 그 유순한 소년은 어디로 갔는지!”
“비정한 세상이잖아요. 저도 거기에 맞춰 변해야죠.”
시몬의 능청을 여유롭게 받아넘기자 그는 내 어깨를 팍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바텐더!”
이어지는 시몬의 말에 바 안쪽에서 컵을 닦던 중년의 사내가 부랴부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레드 에일로 한잔 부탁해.”
“네, 나으리.”
한쪽 눈이 하얗게 질린 바텐더는 주문을 접수하기 무섭게 내 쪽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전 주스로 하겠습니다.”
내 주문까지 접수한 바텐더는 고개를 천천히 숙여 예를 갖추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컵을 준비했다.
“이렇게나 빨리 오시는 나리님들은 처음입니다요.”
동시에 이어지는 바텐더의 사담에,
시몬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보통 나리님들은 수확제가 한창 진행될 때 오시거든요.”
“나리님이라는 게 어디서 온 나리를 말하는 거야?”
“렌부크, 요함, 세부어…, 라티아 인근에 깃발을 가진 곳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옵니다요.”
“무엇을 위해?”
“그야 당연히 곡식을 낙찰받기 위해서지요. 티바르와 라이튼은 긴 전쟁 때문에 항상 식량이 부족하거든요.”
시몬이 눈썹을 찌푸리며 따지듯이 물었다.
“그거 이상한데, 그쪽이 말한 곳 모두 양측 제국에 속한 영지가 아니잖나?”
이에 바텐더가 거품이 잔뜩 낀 에일을 시몬 앞에 내밀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소문으로는 낙찰받은 곡식들 모두가 웃돈이 더해져 티바르와 라이튼에 팔린답니다.”
그 말에,
나와 시몬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아리송한 표정을 교환해야만 했다.
두 사람이 목격한 국경 도시의 풍경은 바텐더가 말한 것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으니까.
앤서니 트와드를 털기 위해 들렀던 국경 도시에선 마치 금방이라도 쨍쨍거리는 금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그 사치스러움이 대단했었다.
심지어 귀 큰 자들에겐 귀한 상징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나무를 일개 여관 주인이 사들여 복도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는가?
뒤이어 내 앞에 주스가 나오기 무섭게,
시몬은 조용히 고개를 내밀어 내게 귓속말을 했다.
“냄새가 좀 나는데, 국경 지역 놈들이 아주 거대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아.”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것 같은데요.”
세브리가 타 영지 주인들에게 곡식을 판다.
곡식을 사들인 자들은 웃돈을 받고 각각 티바르와 라이튼 제국에 팔아넘긴다.
양 제국은 소강에 빠진 전쟁이지만 국경 정비를 소홀히 할 수 없기에 사들인 곡식으로 전방을 지원한다.
그렇게 지원받은 물자들을 국경의 유지들은 꿀꺽 처먹는다.
세브리와 타 영지 주인들의 유착.
타 영지 주인들과 국경 유지들과의 유착.
국경 유지들과 세브리와의 유착.
전쟁으로 빚어낸 거미줄, 그 속에 매달린 탐스러운 사업.
비록 머릿속에 떠오른 추측일 뿐이지만,
감히 상상만 해도 그 규모를 어림잡을 수 없을 정도다.
시몬의 얼굴은 아주 단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까딱하다간 해와 달 사이에 낀 별 신세가 되겠어.”
그러면서도 그의 눈에선 통찰이 흘러나왔다.
“세브리가 우리 물건을 사려는 데엔 분명 어떤 목적이 있어.”
“시몬, 앤서니 트와드는 국경 지역에서 이름난 사업가예요.”
“세브리는 앤서니 트와드를 돕기 위해 움직일 놈이 아니야. 그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어.”
이내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그 목적을 알기 위해선, 디안 네가 제기한 그 문제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겠어. 틀림없이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야.”
그런 그를 따라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우린 이 거대한 판의 꼭대기에 서 있게 될 거야.”
확신에 찬 듯한 시몬의 음성에 덩달아 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세브리의 노예들과 접촉해보자.”
“예, 시몬.”
그렇게 우린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와 다음 목적지를 향해 말을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