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49화 (49/365)

49화. 수확 (11)

“놈들이 낀 반지가 보여, 디안?”

황금밭 인근.

근처 숲에 은밀하게 숨어있던 시몬이 내게 둥근 유리알을 건네며 말했다.

난 그것을 건네받아 앞서 그가 했던 것처럼 한쪽 눈에 댄 채 눈썹을 이리저리 찌푸리며 흐릿한 초점을 맞췄다.

그러자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마을이 확대되어 보인다.

동시에 시몬이 말한 대로 그 인근을 지키는 자들도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시몬이 말한 반지까지도.

반지엔 까마귀 같은 형상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까마귀 같은데요?”

“그래, 저건 엔트로피 급 용병대인 갈까마귀 단의 증표야.”

내 아리송한 표정을 읽은 시몬은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엔트로피는 기념비적인 트로피를 백 개 이상 수집한 개인이나 단체에만 주어지는 이름이야. 말 그대로 업계 내에서 불가항력의 힘을 가진 놈들에게만 붙는 수식어 같은 거지.”

“트로피라면…,”

“사냥꾼의 그것이라고 생각해라. 그런데 그거 알아? 사실 엔트로피는 우주를 읽는 천문쟁이들이나 쓰는 단어였어. 그런데 의미도 그렇고, 그 안에 담긴 트로피라는 단어까지 겹치면서 용병들이 써먹기 시작했지.”

“지금은 용병들에게 어떤 대명사 같은 게 된 거로군요.”

“그래, 맞아.”

시몬은 직후 얼굴을 있는 그대로 찌푸렸다.

“어쨌든 엔트로피 급 용병대라니. 이거 골치가 아파지겠는걸.”

“날이 어두워졌을 때 접근하는 게 좋겠어요.”

내 말에 시몬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금밭 인근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작은 모닥불을 피운 나와 시몬은 묵묵히 시간이 더 흐르길 기다렸다.

이미 해가 중천으로부터 기울어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둘 다 아직 때가 이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시몬,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일단 이거 받아.”

시몬은 안주머니에서 헝겊으로 쌓여있던 육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래, 뭐가 궁금하지?”

“지금의 가족들을 만나기 전에 시몬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내 물음에 시몬은 육포 하나를 마치 연초처럼 입에 물고는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

“농부였어.”

이어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가벼운 말투를 잇는 그는,

“노예는 아니었지만.”

끝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노예나 다름없었던…,”

“매튜 아저씨에게 어렴풋이 듣긴 들었어요.”

“그래? 매튜가 뭐라고 하든?”

“수확한 것에 9할을 빼앗겨 분개한 사람이었다고.”

내 대답에 시몬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 맞는 말이야. 내가 있던 곳은 그 1할 있고 없고에 노예와 평민이 갈렸던 미친 세상이었어.”

춤추는 모닥불에 그의 눈동자가 이따금 반짝인다.

“그렇게 살면 정말 죽겠다 싶더라고, 그러다가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기회의 땅이 존재한단 소식을 접했지.”

“그게 바로 중립지역이었군요.”

“그래. 우리 같은 놈들에게 기회란 무법이란 공평을 이용해야만 잡을 수 있었던 거야.”

어느새 입에 물고 있던 육포를 전부 먹어 치운 시몬은 이어서 벨트에 묶여 있던 작은 쇠 컵을 빼 들었다.

간단하게 컵 안에 바람을 불어넣은 그는 이어 품에서 검은 가루가 들어있는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커피 좀 마실래? 쓴맛에 눈이 확 떠질 거다.”

“저는 괜찮아요.”

짧게 고개를 끄덕인 시몬은 천천히 컵 안에 가루를 털어 넣고는 바지 주머니 안에서 투박한 모양의 물통을 꺼내 컵에 부었다.

“엔제이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이 물통을 주더군.”

“그는 어땠나요? 처음 만났을 때요.”

“지금처럼 유쾌하기만 한 놈이었지.”

“큭큭.”

쇠 컵을 모닥불 근처에 기울여 놓은 시몬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엔제이를 흉내 낸다.

“처음에 대뜸 이 물통을 건네길래 목이 말랐나 싶더라고, 그래서 물을 채워줬거든.”

“그런데요?”

“엔제이 이놈이 고개를 격하게 젓는 거야.”

“왜죠?”

“알고 보니 녀석은 탈영병이었어. 그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소지한 군용품들을 처분하고 있었던 거였지.”

그런데 어떻게 엔제이가 가족이 되었을까.

“근데 내가 꽉 채운 물통을 돌려주려 했을 때, 녀석이 그렇게 허탈한 표정으로 웃더라. 물통이 그리도 쉽게 젖을 수 있는 것이었냐면서.”

이어지는 시몬의 말에 나는 잠시나마 참담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그는 단순히 목이 말라 탈영을 했다고 하더군.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도중에 문득 알아챈 거지. 자신은 이렇게 목숨을 다 바쳐 싸우고 있는데, 정작 자길 싸움으로 내몬 자들은 이 작은 물통조차 채워주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엔제이가 가족이 됐군요. 시몬은 그의 물통을 채워준 사람이었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소만 한 통에 물을 가득 채워줬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럼 지금처럼 멍청한 짓을 덜 했을지도 몰랐을 텐데.”

“하하.”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내 두 귀 끝이 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라티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예민해진 감각이 무언가를 포착한 것이다.

“시몬.”

내 표정과 말투를 읽은 시몬은 이제 막 한 모금 들이켰던 커피를 모닥불에 부어버렸다.

“디안?”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요.”

곧바로 자루에 손을 얹고서 몸을 낮춘 나는 감각이 가리키는 곳을 주시했다.

라티아 때보다 좀 더 예민해진 걸까,

이젠 다가오는 소리만으로 그 존재의 윤곽을 감히 판단 내릴 수 있을 정도야.

그러니까 내 감각은 이미 기척을 느낀 순간부터 그것을 사람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동시에 나는 몸에 잔뜩 베여있던 긴장을 풀어야만 했다.

“아이?”

내 등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시몬은 드러난 존재를 확인하고는 반사적으로 의문을 내비쳤다.

말 그대로,

어린 소년이 묵묵히 우리 근처에 멈춰 서서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줍고 있었다.

그런 아이는 한둘이 아니었다.

얼추 세보아도 열 명은 되어 보이는 소년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주운 땔감을 등에 멘 바구니에 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에게서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시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시몬도 같은 걸 느꼈는지,

“뭔가…,”

내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디안?”

“예, 시몬.”

좀 더 자세히 지켜보니 그 기시감은 아이들 여럿을 번갈아 봤을 때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와 시몬은 동시에 눈을 마주치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아이들,

부분부분 다른 점이 있긴 하지만 그 생김새들이 하나같이 너무 닮았다.

이윽고 우리 쪽으로 가장 근접한 두 소년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이레! 얼른 돌아가자,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야 해.”

“아직 땔감을 다 못 채웠어.”

“어차피 오늘 땔감은 식구들이 쓸 거잖아, 바구니를 가득 채우지 못해도 혼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까마귀들이 검사하는걸?”

“요즘은 곧 있을 수확제 때문에 밤만 되면 다들 어디론가 사라지니까 괜찮아.”

“정말?”

“응, 얼른 가자.”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두 소년을 시작으로,

아이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모여 숲을 내려갔다.

우린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뒤따랐다.

* * *

어두워진 하늘 아래,

허름하고 냄새나는 판잣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

소년의 말대로 마을 근처에 보초를 서고 있던 용병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보다,

마을은 마치 버려진 것처럼 그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소년들이 각자 흩어져 집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곳곳에서 작은 불빛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앞장을 서기 시작한 시몬은 조용히 내 얼굴을 살피곤 마을을 가로질러 움직였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마을에서 가장 큰 판잣집을 발견한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그렇게 그를 따라 판잣집에 들어선 순간,

무섭게 들이닥치는 역한 냄새가 내 코를 후려쳤다.

하지만 얼굴을 찌푸린다거나, 코를 막지는 않았다.

그보다 눈에 들어온 광경이 더 충격적이었으니까.

집 안에 있던 노인은,

불쑥 찾아온 두 장정의 모습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담담하게 우릴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노인 앞엔,

젊은 청년이 누워 있다.

전신이 말 그대로 참혹하게 갈려버린 상태로.

시몬은 그런 청년을 내려다보며 진심으로 위로를 담아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대들어서 이렇게 됐지.”

“대들다니요?”

“같은 노예를 감싸는 행동을 했어.”

“그게 어떻게 대드는 게 되는 겁니까.”

“노예니까.”

시몬은 청년의 머리맡에 앉아 조용히 외투 주머니에서 작고 둥근 철제 함을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연고입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테니 받으십시오.”

“우리에겐 너무 값비싼 친절이구먼.”

노인은 시몬이 건넨 연고를 받아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이나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불행하게도 그에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거야. 내장이 쏟아질 때까지 끌려다녔거든. 어떻게 봉합하긴 했지만 터진 인형을 꿰맨 수준이라 이젠 시간 문제네.”

주름진 얼굴, 그 주름을 가득 메운 그림자 속엔 쓸쓸하고 허무한 해탈이 묻어 있다.

“그래서, 외지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온 이유가 뭔가.”

노인은 연고를 조심스럽게 청년의 머리맡에 내려두고는 말을 이었다.

이에 시몬은 담담히 대답했다.

“당신의 주인과 관련해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 말에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몬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값비싼 친절을 받았으니 말해줘야겠지. 그래, 뭐가 궁금한가?”

“우리가 제시한 거래를 그쪽 주인이 흔쾌히 승낙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혹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시몬의 말에 노인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누군가, 도망자? 무법자? 아니면 이곳에 있는 끔찍한 사생아 같은 부류인가?”

“정확히는 도망치는 무법자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세브리에게 팔 물건이 있어서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거겠군,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거든.”

“해서,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대부분이 물건을 팔지 못했지, 애초에 그는 물건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아.”

“그럼…?”

시몬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노인은 고개를 들어 매서운 얼굴로 말했다.

“자네들이 제시한 거래를 흔쾌히 승낙한 이유는 단 하나야, 사람. 그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지.”

“무슨…?”

“여자.”

노인은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단언했다.

“여자?”

“세브리는 여자를 원해. 자네들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거고.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 그저 자네가 제안한 거래를 승낙한 거야.”

나와 시몬은 노인의 말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도망치게, 미련 없이. 그게 아니라면…, 그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줘야만 할 거야.”

그 침묵 속에서,

노인은 우리에게 섬뜩한 경고를 이어갈 뿐이었다.

이제,

모든 게 다 이해되는구나.

라티아에서 느껴졌던 노골적인 시선.

젊은 여인들을 보기 힘들었다는 촙과 안드레의 말.

더 나아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숲에서 땔감을 주워갔던 묘하게 닮은 아이들.

모두 다 소년이었지.

그 소년들은 어떤 방식으로 여기까지 끌려와 노예가 되었을까?

혹시…,

내 예상이 맞다면…,

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시몬은 갑작스레 이마에 굵직한 핏대를 세우며 노인에게 물었다.

“말해 봐, 수확제가 진행되면 당신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지?!”

노인은 그 질문을 하는 이유를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이미 자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우리의 의심이 사실이었음을 알려줬을 뿐.

“뿌린 씨를 거두는 수확제에 맞춰, 세브리는 자신의 씨로 낳은 사내아이들을 우리에게 보낸다네. 그에게 사내는 필요 없는 종자거든.”

어렴풋이 그려본 역겨운 상상이 실체가 되는 순간.

“허…, 씨발.”

시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 역시 속에서 역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걸 겨우 참아내야만 했다.

“동료 모두를 지키고 싶다면 지금 바로 도망치게나,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도망쳐.”

노인의 마지막 경고를 끝으로, 우리는 서둘러 마을을 벗어났다.

이내 다시 숲을 거쳐 외진 길로 나온 우리는 미리 묶어놓았던 말에 올라타 거침없이 고삐를 치댔다.

시몬은 그 과정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짐을 짊어진 듯, 경직된 표정으로 앞장서 달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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