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수확 (12)
깊은 밤.
시몬 바스티유의 일원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있다.
갑작스러운 소집에 모두가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시몬의 심각한 표정을 확인한 가족들은 중대한 상황임을 인지한 듯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침묵을 지켰다.
이름 모를 곤충의 반복되는 노랫소리만이 몇 번이고 은은하게 퍼져가던 와중.
드디어 시몬이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디안과 함께 라티아 인근을 돌아보고 왔어. 그리고 거기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냈지.”
“그게 뭐지, 보스?”
재키의 물음에 시몬은 거기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설명 사이사이에 우리는 라티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나누며 시몬의 말에 살을 붙여갔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은,
세브리는 여색에 미친 색정광이다.
고로 거래를 승낙한 이유는 단순히 케니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세브리가 자신의 씨로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노예로 처분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땐 특히나 맥레인과 엔제이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천하의 개새낄세.”
“간만에 엔제이가 옳은 소리를 하는데.”
재키는 그런 둘의 반응에 비아냥거렸다.
“천하는 못 돼도, 우리 역시 만만찮은 개새끼들인걸.”
그 말을 시작으로 순간 언쟁이 오갈 뻔했지만,
이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시몬 앞에서 모두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이어서 매튜와,
“시몬, 잘 생각해. 세브리는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버드가,
“엔트로피 급 용병대뿐만이 아니에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세브리의 영지 내에서도 웬 기사 같은 놈들이 돌아다니는 걸 봤습니다. 애초에 트와드도 비공식적인 일정을 파고들었기에 가능성이 있었던 거예요.”
이번 일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재키가 반대하고 나섰다.
“보스, 잘 생각해. 이번이야말로 무법자 짓을 청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안드레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재키에게 일갈했다.
“재키, 이 씨발 지금 케니를 넘기겠다는 소리야?!”
“멍청한 애새끼 같으니, 난 지금 큰 구름에서 했던 것처럼 세브리를 등쳐먹자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재키의 으르렁거림에 이번엔 맥레인이 쏘아붙였다.
“버드 이야기 못 들었어?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야.”
“까놓고 말해보자, 너랑 포키스만 있어도 손쉽게 털어먹을 수 있을걸?”
나는 그 말에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세브리를 털어먹다간 무법자 짓을 청산하기는커녕 평생을 쫓겨 다녀야 할걸요. 그와 연관된 모든 깃발이 우릴 향해 펄럭일 테니까요.”
“디안, 이 새끼. 혓바닥이 꽤 길어졌구나?”
“그러는 재키, 당신은 어째 점점 내 눈에 작아지는 것 같은데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키가 벌떡 일어나 득달같이 달려든다.
“가족이 된 지 반년도 안 된 핏덩어리 새끼가! 우리가 얼마나 자유에 목말라 있는지 알아?! 안다면 그딴 개소리를 함부로 지껄이지도 못했을 거다!”
그러나 촙과 안드레가 그런 재키를 막아섰다.
이에 매튜는,
처음으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앉아, 재키. 너희 둘도.”
그의 중재로 순식간에 소강에 접어든 천막 안.
무거웠던 기류는 이제 서늘하기까지 하다.
아까부터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케니와, 이제 슬슬 모두의 시선이 시몬 쪽으로 옮겨지는 와중.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짙은 그림자에 반쯤 파묻힌 얼굴로 고심하던 시몬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린 절대로 가족을 버리지 않는다.”
이어지는 그의 단호한 말과,
“하지만 코앞에 있는 자유 역시 버리지 않을 거다.”
대답으로,
“계획이 있는 거야?”
“그래, 매튜. 내게 계획이 있어.”
다시금 모두를 기대감에 빠트렸다.
* * *
이른 새벽.
“저게 다 금화라는 거지?”
아르지스는 팔짱을 낀 채 저택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마차들을 보며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곁에 있던 장정 하나가 이죽거리며 답했다.
“예, ‘대부분’은요.”
“이번엔 몇 명이나 온 건가?”
“마차로 네 대가 왔으니까 대략 서른 명 정도는 될 겁니다.”
험악한 인상을 한 남자의 말에 아르지스는 혀를 내둘렀다.
“얼마 안 가 또 저택을 증축하겠군, 짐승의 발정도 한때인 것을…, 두 발 걷는 돼지의 발정은 평생을 가는구나.”
그런 아르지스의 힐난에 남자는 경악에 물든 낯빛으로 속삭였다.
“아르지스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군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하지만 아르지스는 그런 남자의 말을 그저 무시할 뿐이다.
애초에 그에게 세브리에 대한 충성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세브리는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사실 세브리도 이미 알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지스를 곁에 두는 이유는 하나뿐.
아르지스 역시 세브리에게 유용한 수단이었으니까.
요튼의 사생아, 아르지스.
남쪽을 대표하는 4대 가문 중 하나인 그 요튼의 피를 이어받은 게 바로 그였다.
물론 잡종의 피가 섞여 지금 꼴을 면치 못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단지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쫓겨난 것이 아니란 것을.
사실 사생아라 할지라도 요튼 정도의 가문이라면 다른 가문의 시동으로 들어가 어렵지 않게 기사 선임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설령 기사로 선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요튼이라는 이름만 있다면 수준 높은 용병대에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테지.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요튼이라는 이름보다 사생아라는 낙인이 더 커진 이유는.
질투 때문이었다.
적장자보다 아르지스가 더 밝고 완벽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도 맞는 말이지, 요튼 가문의 상징 중 하나니까.
하지만 고작 그런 연유로 요튼의 피가 섞인 자를 이런 식으로 추방하진 않는다.
사생아라 할지라도 엄연한 요튼의 핏줄.
오히려 가문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치기 위한 수단으로서 중요한 요직에 앉혔을 거다.
아르지스가 요튼 가문에서 추방당한 결정적인 이유는,
적장자보다 뛰어났다는 것을 들켰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나다는 것을.
덕분에 아르지스는 가문 내 적장자를 등에 업은 세력에게 내몰려 방랑자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가 달라졌다.
절묘한 순간, 그의 앞에 놓쳐선 안 될 중요한 기회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챈트가 스며든 무기.
그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모든 상황이 달라질 거다.
과거 요튼은 두 개의 인챈트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하나를 잃는 바람에 막강했던 세력이 위축되어 버렸지.
위축되었음에도 아직 건재하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요튼은 과거의 영광을 바라고 있다.
그런 요튼에 쫓겨난 사생아가 인챈트 무기를 들고 돌아오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인챈트는 막강한 힘이다.
그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외교가 성립될 정도로!
힘은 거짓과 진실을 무분별하게 만들어 주지.
그 말인즉슨 반쪽짜리 피를 마치 이미 완벽한 피를 가졌던 것처럼 만들어 준다는 소리다.
그 검만 손에 넣으면 그렇게 되는 거다.
곧바로 적장자를 물리고 요튼 가문의 후계자로 우뚝 서는 거야.
참 재미있어졌다.
아르지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무기.
검의 한 종류인 펄션에 해당하는 그 무기엔 열화된 인챈트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열화된 인챈트란,
연금술사들이 가져온 날씨의 파편을 조립해 인챈트를 흉내 낸 것.
한마디로 반쪽짜리 인챈트란 소리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현재 신세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바꿔 말하면,
완벽한 인챈트를 거머쥐는 순간, 본인의 신세 역시 완벽해진다는 사실이.
그를 즐겁게 만든 거다.
“큭, 큭큭.”
무장한 자들이 바쁘게 마차를 오가며 금화를 셀 동안,
생각에 빠져 있던 아르지스는 나지막이 웃음을 내뱉었다.
정말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닌가 싶을 정도지.
라티아에서 그 계집을 발견한 순간부터 말이야.
“아르지스님, 세브리님께서 찾으십니다.”
한창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아르지스에게, 곧 무장한 군인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를? 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젠 세브리가 슬슬 걸림돌처럼 느껴지는구나.
어차피 상관없다, 그의 명령을 들을 필요도 없으니까.
그 검을 얻는 순간 곧바로 이 썩어 문드러진 땅에서 탈출할 거니까.
“그래, 간다고 전해.”
그 말을 전한 뒤, 아르지스는 천천히 자택을 향해 걸었다.
그런 그의 앞엔 막 마차에서 내린 수십의 여인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줄지어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망토엔 영지를 상징하는 갖가지 문양들이 새겨진 채 펄럭이고 있다.
이는 마치 상품의 원산지를 붙인 것처럼,
세브리에게 바친 여인의 출저를 밝히려는 것이다.
과연 무법지대라 불리는 중립지역 답지.
세브리는 이 무법의 땅 위에서 왕보다 더 왕 같은 삶을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 봤자 무법 위에 피어난 썩은 권력의 줄기일 뿐.
이윽고 아르지스는 줄지어 선 여인들을 제치고 홀을 따라 거대한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올라가 마주한 복도 끝 방에선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저들 중 사내들은 수확제가 되는 날,
노예들에게로 보내져 같은 노예로 자라나게 되겠지.
밭을 일구는 노동력으로 그 거름의 역할을 다 할 거다.
그리고 태어난 여아들은,
이곳의 부를 먹고 유복하게 자라며 그들을 낳았던 여인들처럼 성숙해지기 무섭게 세브리의 씨를 품어야 하는 밭이 될 운명에 빠지게 될 거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노예 하나와 세브리의 여자 하나가 몰래 만나다가 걸렸었지.
아르지스는 묵묵히 복도를 걸으며 최근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내 손수 노예의 사지를 베었는데,
지금도 그 핏자국이 다 사라지지 않았을 거야.
얼마나 긴장했는지, 몸에 힘을 얼마나 많이 줬으면 벨 때마다 피가 아주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 애를 좀 먹었는데.
피식.
그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웃던 아르지스는 이제 광택이 느껴지는 거대한 백색 문을 양손으로 활짝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엔,
비싸다는 봄기운 파편을 잔뜩 먹여 만든 테이블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테이블 위엔 난잡하게 어질러진 수많은 편지와,
뒤뚱거리며 그 편지의 봉인을 뜯고 있던 세브리가 있었다.
그는 상의를 탈의한 모습으로 손가락마다 걸린 반지를 반짝이며 편지의 봉인을 푸는데에 열중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숨이 찬지 성가신 소리로 연신 헐떡였다.
“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세브리.”
“오, 왔군. 요튼 공.”
아르지스의 눈썹이 살짝 치켜 떠졌다.
세브리는 색정광이지만, 동시에 입으로 사람을 사탕처럼 구슬릴 줄 아는 대단한 수완가이기도 하다.
애초에 거대한 황금밭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저 수완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세브리는 아르지스를 고용한 순간부터 줄곧 요튼 공이라는 존칭을 써왔다.
그리고 그건 아르지스에게 아주 잘 통했다.
가문에 대한 열망이 있는 아르지스에겐 아주 달달 하거든.
“일단 앉게나.”
“뭔가 길게 말씀하실 거라도 있나 봅니다?”
아르지스는 내심 기대했다.
라티아에서 봤던 계집 건에 대해 말하려나 싶어서.
“길어진다면 길어지겠지만, 요튼 공의 실력을 생각하면 굳이 길게 설명해야 할까 싶기도 하고.”
그러더니 세브리가 방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노인을 향해 손짓했다.
“금화 실은 마차 두 대는 따로 빼놔, 그게 얼마쯤 되지?”
지극히 사무적인 세브리의 말에 노인은 넙죽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10만 개가 채 못될 겁니다.”
“그만하면 충분하겠어, 수확제에 맞춰 써야 하니까 마차째로 보관하도록 해.”
“네.”
세브리의 지시에 곧바로 자리를 뜬 노인,
그리고 노인이 자리를 뜨기 무섭게 아르지스가 세브리에게 묻는다.
“금화를 따로 빼놓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세브리가 씩 웃으며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답했다.
“이곳에 찾아온 무법자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려 하는데…, 요튼 공이 그 일의 보험이 되어 줬으면 해.”
아르지스의 입꼬리가 아주 미묘한 차이로 올라갔다.
“그 여인 때문입니까.”
“길들임에 보람을 느끼기 위해선 먼저 야생마를 잡아야지 않겠나. 더군다나 그 야생마가 보기 드물게 아름답다면 더욱 놓치지 않게 잡아야지.”
이유야 어쨌든,
아르지스는 세브리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로 말미암아 꼭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를 쟁취해야 하거든.
“좋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아르지스의 말을 끝으로,
세브리는 테이블에 있던 편지를 옆으로 치운 채 넓은 방 안에서 울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길고 은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