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수확 (13)
용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정립되어 있던 세상의 공식들도 하나둘 바뀌기 시작했다.
화약의 멸종이 그 대표적인 예다.
본디 불 먹은 나무는 숯이 되어 화약의 재료로 쓰였지만,
용이 사라진 이후 숯은 더는 화약의 재료로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 그 비워진 성질을 채운 건 나무의 영혼이었고, 덕분에 용의 시대 때 세가 약했던 귀 큰 자들은 용의 시대 이후 전례 없는 종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정령의 출현도 그 기점에 맞추어 나타났다.
그렇게 용의 시대 때 이룩했던 모든 화학적 공식이 거세되다시피 뒤집히자,
학자들은 헌 시대가 허물을 벗고 새 시대가 되었다 말했다.
그러나 공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공식의 결과물까지 바뀐 건 아니다.
용의 시대를 관통한, 세상을 도약시킨 파격적인 연료.
화약은 용의 시대 이후에 이르러서도 그 존재감을 과시했으니까.
‘먹을 수 없는 후추’라 불리며 사치품으로 그 위용을 떨치기도 했고,
용의 시대를 주름잡던 끔찍한 무기들에 숨결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갈이라는 이름 앞에 영원이란 건 존재할 수 없는 법.
화약은 이 순간에도 조금씩 조금씩 분명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별을 이해하려면 하늘을 봐야 하듯이.
세상을 이해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시몬의 결정이 떨어진 지 5일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맥레인이 구해오라 했던 책들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두 다 탐독했다.
앞서 필요한 부분들만 읽고 넘겼던 그 책들을 이번엔 모두 다 말이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도 하나 있었는데,
내가 가진 독서력이 꽤 무서울 정도로 대단했다는 거다.
처음엔 의식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인식이 될 리가 있겠나.
그러한 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나흘 전부터였다.
문득 이미 완독했던 두 권의 책 내용이 낱장 하나 빠짐없이 내 머릿속에 들어갔음을 인지해버린 거다.
혹시나 해서 책을 수도 없이 펼쳐 들며 머릿속의 내용과 대조해보기까지 했는데,
그 행위 자체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것만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틀 전,
나는 이 독서력의 근간이 무엇이었는지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별을 이해하려면 하늘을 봐야 한다.
그래서 난 하늘을 봤다.
물론 오롯이 타의로 자행된 행위였지만.
결국엔 그 덕에 알게 된 거다.
내가 책을 소화하는 공식을.
책은 내가 외웠던 밤하늘과 반대였다.
하얀 우주를 가지고 있고, 검은 별이 빼곡하게 박혀 있지.
이따금 재미난 그림도 나온다, 마치 별자리처럼.
난 아주 자연스럽게 밤하늘을 보듯 책을 보았던 거다.
내가 헤아리고 있는 별의 개수만큼, 이 하얀 우주에 속한 검은 별들을 헤아릴 수 있었던 거야.
맥레인이 그랬었지.
날 얼룩지게 만든 그 재마저 거름으로 삼으라고,
그저 찬란히 꽃피우라고.
이젠 그렇게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어쩌면,
그날 내가 들어있던 함이 열렸던 그 순간.
나는 허물을 벗고 새사람으로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
* * *
“이제 내일이네요, 수확제.”
“그래.”
캠프 인근 숲 너머,
작은 공터 한가운데서 나는 한 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나와 마주 서 있는 사람이 맥레인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겠지만.
솔직히 그의 존재감은 어떻게 적응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육체적, 정신적 성장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다는 걸 스스로 체감하고 있음에도.
그는 딱 내 성장치 만큼 더 거대해진 상태로 날 맞이할 뿐.
오롯이 날 가르치기 위해 한 발자국씩 물러서고 있는 느낌이야.
그래서 두렵다.
하지만 두렵기에 유감없이 내가 가진 모든 기량을 뿜어낼 수 있어.
땅을 박차 내가 가진 검술을 펼친다.
부딪침을 마중하듯 부드럽게 나아가는 칼끝, 탄력을 머금은 손목, 흘러넘치는 어깨와 그 어깨를 따라 돌아가는 절제된 허리.
비록 안전을 위해 검집을 씌운 채 휘두르지만,
그것마저도 위협적이기 짝이 없으리라.
카각!
이내 맥레인의 검과 부딪치기 무섭게 내 몸이 물 흐르듯 허공에서 회전하고.
종래에 하나의 호흡 안에서 상대에게 ‘격’을 내민다.
물론 그러한 호흡 자체를 부정할 줄 아는 맥레인의 귀신같은 몸놀림 앞에선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자루를 잡은 손바닥의 부분, 손가락의 위치, 손목의 움직임, 날의 동선.
모두가 각기 다른 검술들이 더해진,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 검술은 호흡은커녕 흐름조차 파악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는 방금 보폭도, 어깨도, 허리도 쓰지 않았어.
축 자체를 배제하고 한쪽 팔과 검 한 자루로 미지를 그려 낸 거야.
이윽고 한 호흡이 끝났다.
그 찰나의 시간,
내가 내민 격은 보기 좋게 맥레인의 어깨 위로 스쳐 지나가 있었다.
반면,
톡톡.
검집에 물린 맥레인의 아밍소드는 내 옆구리를 톡톡 두들길 뿐이다.
“크윽.”
“다시.”
두 호흡 이상을 나누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한 호흡조차 넘어서지 못하니 이 이상 겪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영역인 거다.
나는 아직 한 호흡의 영역조차 벗어나지 못한 거구나.
오기가 끓는다.
다시 땅을 박차 기세 좋게 맥레인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내가 흐름을 주도해 볼까.
큰 동작으로 호흡을 늘려 맥레인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순식간에 가로막기를 한 맥레인이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테이퍼 읽기를 해온다.
심지어 검집을 씌운 상태인데도 득달같이 붙어오는구나!
거걱, 거걱.
두 나무 검집이 비벼지며 격렬한 소리를 냈다.
맥레인의 검은 내 검날에 기생하듯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관절기에 걸린 것처럼 맥레인의 움직임에 끌려다니던 나는 끝내,
그에게 옆 공간의 침범을 허용하고 말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덩굴처럼 얽혀 들어온 맥레인이 순식간에 어깨로 내 겨드랑이를 들어 쳐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린다.
“아악!”
“다시.”
“끄으윽…!”
등으로 바닥을 포옹하는 것만큼 숨 막히고 고통스러운 것도 없을 거다.
얼마나 고통스럽냐면 입에 머금고 있던 침조차 간수 하지 못하고 밖으로 질질 흘릴 정도거든.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선 나는 이를 까득 씹었다.
이제 오기가 다 증발해버려서 더 끓일 것도 없을 지경이야.
뜨거웠던 몸이 차갑게 식었어.
그런데,
애석하게도 식고 보니 슬슬 보이는 것 같아.
딱딱한 도감에 적혀있기를,
쇠는 식어야 제모습을 찾는다고 했었지.
“후우.”
마지막 온기마저 털어내고 한결 가벼운 몸놀림으로 스텝을 밟으며 맥레인에게 접근한다.
맥레인은 그런 날 보곤 씩 웃으며 대놓고 손짓했다.
“들어와.”
호흡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부딪쳐야만 나오는 템포를 억지로 만들어 보는 거야.
이렇게.
오른발 끝을 축 삼아 그 자리에서 몸을 회전한다.
마치 춤을 추듯 가볍고 유려하게, 내가 불렀던 그 화려한 곡들의 음율처럼.
카각!
내 호흡을 맞받아친 맥레인이 다음 수를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호흡은 아직 내 것.
마찬가지로 모든 일련의 행동이 한 박자씩 앞서 있다.
카가각!
두 번째 호흡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야,
팍!
파박!
세 번째, 네 번째.
맥레인이 내 호흡을 감당하며 맞받아치기 바쁘다.
슬슬 그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고, 이제 호흡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숨이…,
“허억…!”
차다.
“허어억, 허어억.”
그대로 제자리에서 굳어버린 나는 허리를 숙인 채 한참을 헐떡여야만 했다.
맥레인은 그런 내 목 위에 덤덤하게 검집을 얹을 뿐.
그런데 이후 당연히 들려야 할 그의 비아냥이 들리지 않는다.
“제법.”
오히려, 약간 벅차오르는 듯한 목소리다.
“제법이야.”
겨우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보자,
맥레인이 본인의 박살 난 검집을 내게 흔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숲에서 만든 검으로 이 정도 파괴력이면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놈들도 통째로 베어버리겠어. 대체 그 움직임은 어떻게 나오는 거냐?”
이거다,
이거.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성취감.
* * *
해가 중천에서 떨어질 일만 남은 오후.
캠프는 다가올 내일을 위한 준비로 한창 분주했다.
걱정과 들뜸이 공존하는 가운데,
안나 아주머니는 늘 그렇듯 주도적으로 준비 작업을 개시했다.
옷과 마차, 장신구, 털에 바를 기름까지.
이번에 채택된 옷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무광으로 통일된 정장이었다.
각자 본인의 옷을 입기 바쁜 와중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엔제이는 혼자서 큰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나도 꼭 한번 입어보고 싶은 옷이었는데! 왜 내가 대기조인 거야?!”
이에 엔제이 옆에 은근슬쩍 다가와 앉은 안드레 역시 팔짱을 낀 채 부러운 눈으로 정장을 빼입은 촙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안드레,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전 대기조여도 상관없는데요.”
“케니랑 같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아…아니거든요!”
안드레의 격한 반응에 방금 막 안나 아주머니를 돕고 돌아온 케니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랬구나?”
그러자 안드레의 낯빛이 달처럼 창백해진다.
“그게 아니야! 케니, 그러니까 그게!!”
케니는 애써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얼굴을 감췄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혓바닥을 낼름 내밀어 보인다.
“디안, 이 옷은 셔츠 위쪽 단추까지 잠가야 해.”
어느새 불쑥 찾아온 안나 아주머니는 얼른 내 셔츠 깃을 붙잡고 손수 단추를 잠가주기 시작했다.
“디안은 정말 아무거나 걸쳐도 잘 맞는구나.”
투박하지만 그보다 더 따듯할 수 없는 손으로 내 머리를 쓸어넘기는 그녀,
“이런 옷은 머리를 깔끔하게 넘겨야 멋이 사는 법이야. 앞머리 몇 가닥 흘리면 더 좋지.”
안나 아주머니께 한창 머리를 만져지고 있는데,
큰 천막에서 덩치 큰 남자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온다.
“왜 이런 옷을 고른 거야, 차라리 난쟁이가 만든 갑옷을 입겠어.”
맥레인,
그가 깃에 달린 리본을 잡아당기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모습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아니 그 전에,
대부분이 그의 모습에 시선이 빼앗겨 있었다.
“맥레인, 너 뭐야?! 진짜 못 알아볼 뻔했어!”
옆에 있던 매튜 아저씨가 깜짝 놀라 맥레인의 어깨를 두들겼다.
물론 맥레인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질 뿐이었다.
“내게 저주를 거는 것 같아, 이 씨발 직조 덩어리 새끼.”
기어이 손으로 리본을 뜯어버리는 맥레인,
동시에 안나 아주머니의 손바닥이 맥레인의 등에 벼락처럼 꽂혔다.
“뭐 하는 거야!!”
“저주의 근원을 제거했지.”
“이런 맙소사, 이건 저주의 근원이 아니고 정장의 핵심이라고!”
“아무튼, 죽어도 그 리본은 안 달겠어.”
“그냥 죽어, 죽어! 이 화상아!”
짝짝.
맥레인의 등짝이 타악기처럼 울린다.
결국엔 맥레인은 안나 아주머니에게 쫓겨 도망 다녀야 했다.
한바탕 소란이 이는 와중에,
이번엔 시몬이 정장을 쫙 빼입은 채 우아한 걸음걸이로 나타났다.
“아직 잘 맞네. 뱃살이 늘어나서 안 맞을 줄 알았는데.”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시몬이 정장까지 갖춰 입으니까 새삼 다시 느낀다.
저 사람은 진짜 우리의 보스구나 하고.
반면 그 뒤에 나타난 재키는,
정말 우리가 무법자 집단이 맞구나 하고 실감이 날 정도로 살벌한 인상을 자랑했다.
이제 시몬이 모두에게 들리도록 소리친다.
“다들 들어.”
복장 덕분일까.
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나도 마찬가지고.
“옷은 다들 잘 맞지? 무기를 소지할 인원들은 내일은 날이 밝자마자 무기 집 겉에 검은 천을 덧대는 걸 잊지 마. 다시 한번 말하는데, 수확제에 오는 자들은 하나같이 성의 주인이나 기사들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우린 세브리와 대화를 하기 위해 참석하는 거지 일 벌이기 위해 가는 게 아니니까.”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연설을 시작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포키스와 엔제이는 캠프를 잘 지키도록 해. 내일, 계획대로 우린 세브리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다. 큰 구름에서 그랬듯 마음 단단히 먹고 잠을 푹 자둬라. 알겠지? 시몬 바스티유의 문제아들아!”
내일이면 진짜로 그 자유라는 것을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