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수확 (14)
다가오는 아침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다름 아닌 귀였다.
이곳에 온 이후부터 새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해 다소 생소하다 느껴질 정도였는데.
귀로 깨는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구나.
종소리?
귓가에 은은하게 퍼지는 그 소리는 분명 굉장히 먼 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을 나서자,
한층 더 선명해진 종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이어 종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보니,
어느새 나는 캠프 뒤쪽 절벽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매튜 아저씨?”
“일어났니, 디안?”
절벽에 우두커니 서서 라티아가 있는 방향을 주시하던 매튜 아저씨는 특유의 너그러운 표정으로 내게 손짓했다.
“저길 보렴, 이제 막 수확제에 참여하기 위해 배들이 들어오고 있단다.”
서둘러 그 옆에 다가가 가리킨 곳을 향해 목을 빼 들고 보니, 저 멀리 희미한 라티아의 항구에 줄지어 서 있는 배들이 보인다.
“어마어마하네요.”
“그렇지? 이 거리에서도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보인다는 건 그만큼 배들의 크기가 굉장하다는 뜻이겠지.”
하늘을 날았던 큰 구름도 굉장히 거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저 배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측에 속할 정도일지도.
“종소리도 저기서 나오는 거겠죠?”
“그래, 분명 ‘앙 실러 데우스’의 종소리일 거다. 일개 항구에서 저런 청명한 종소리가 날 리 없으니.”
“앙 실러 데우스? 그게 뭐죠?”
“신권국가인 데우스의 기사들을 말하는 거란다. 저들은 항상 성스러운 종을 지니고 다니거든. 당연히 그들이 탄 배에도 그에 걸맞은 크기의 종이 달려있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매튜는 눈썹을 찌푸린 채 턱을 매만졌다.
“참 의외야, 저들까지 세브리와 엮여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떤 이유에서요?”
“일단 거리가 아주 멀거든, 두 개의 바다를 건너야 할 정도로. 무엇보다 저들이 무엇을 위해서 그 머나먼 길을 나서서 이곳까지 왔냐는 거야.”
“오늘 있을 일에 저들이 문제가 될까요?”
내 걱정 가득한 물음에 매튜 아저씨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아니, 그들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세브리 하나뿐이야.”
* * *
“앙 실러 데우스?”
맥레인은 내 말을 듣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매튜 아저씨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은데. 그 고지식한 놈들은 말 그대로 거래를 위해 온 걸 테니까.”
“맥레인은 그들과 직접 만나본 적이 있나요?”
“만나 본 적은 없어, 들어 본 적은 있지. 뭘 말하는 건지는 너도 잘 알겠지?”
“네, 알 것 같네요.”
“참, 녀석들을 겪어본 적은 있다.”
맥레인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말을 이었다.
“옛날에 한 번 완전히 불에 타버린 마을을 본 적이 있거든. 근데 일반적인 화재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광경이 너무 끔찍했었어. 후에 지나가다 만난 나무꾼이 말하길 마을이 활활 불타고 있었던 당시에 내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더라고. 아마 정화니 뭐니 하는 걸 빌미로 놈들이 저지른 일이겠지.”
생생한 목격담을 전하던 그는 이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광신도들이란.”
그러면서 맥레인 역시 매튜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말을 내뱉는다.
“문제는 세브리야. 시몬은 지금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어. 이제 그 선택의 결과를 쥐고 있는 세브리가 우리의 바람대로 움직여주느냐가 관건이지.”
그래,
그의 말이 맞아.
결국 모든 문제는 세브리에 귀결되어 있다.
자리를 옮겨 캠프 바깥쪽 말이 묶여있는 곳을 향하자 그곳엔 케니와 안드레, 촙이 모여있었다.
“디안!”
제일 먼저 날 발견한 촙이 손을 흔들어 반겼고, 그런 그의 인사에 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케니, 좀 어때?”
곧바로 그들과 합류해 케니의 상태를 살폈는데,
걱정관 달리 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는 괜찮아. 어쨌든 이런 쪽 일엔 자신 있으니까.”
그러나 그 끝엔 내가 알던 장난기 많은 케니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엇보다 안드레가 날 지켜줄 거잖아?”
그 말에 안드레는 곧장 얼굴을 붉히며,
“그…,렇지, 그래.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모두를 웃음 짓게 해주었다.
뒤이어 촙이 내 검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참, 잊지 말고 오전 중에 검은 천으로 덧대는 걸 잊지 마.”
“알고 있어, 촙.”
한눈에 봐도 특별해 보이는 검을 굳이 노출하고 다닐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누군가의 눈에 띄어 관심을 끈다면 귀찮아질 수가 있어.
하지만 반대로 내가 이 검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맥레인의 ‘기준’상 내가 이 검을 들고 있어야만 전력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시몬은 늘 그렇듯 큰 천막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늦게 들어간 매튜 아저씨도 오랜 시간 동안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미 정해진 계획 앞에서조차 생각할 것이 많은 것 같다.
누군가를 이끌어야만 하는 위치에 있을 때의 그 기분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고심에 젖어있을 그를 떠올릴 때면 항상 드는 생각이다.
시간에 빠름과 늦음을 매길 순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체감할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해와 달을 통해서 말이지.
오늘이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해가 떨어져 저만치 떨어져 있다.
가족들은 말없이 준비해 놓은 정장을 걸쳤고, 별다른 말 없이 캠프에 남아있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 간에 인사를 담담히 나눈 후에야,
마차는 출발했다.
매튜 아저씨가 고삐를 잡고, 그 옆자리에 재키가 앉아있으면.
뒤엔 나와 맥레인, 그리고 시몬이 덜컹거리는 마차에 맞춰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한 것도 없는데 출세한 기분이군, 그렇지?”
그 답답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해소하고 싶었을까?
재키가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자 안에 있던 시몬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재키, 넌 평생 그런 옷을 못 입을 줄 알았는데.”
“내가 뭐 어때서, 보스!”
재키가 발끈하며 되묻자 옆에 있던 매튜 아저씨도 껄껄 웃었다.
“일단은 그 인상부터 바꿔보는 게 어때? 테리라스에 가면 제일 먼저 난쟁이한테 그 이상한 문신부터 지워달라고 해.”
“이 문신은 내 내면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거라고!”
눈 밑에 그려진 검은 점을 가리키며 열변을 토해내는 재키.
그러나 시몬과 매튜 아저씨의 웃음소리에 금방 파묻힐 뿐이다.
재키가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또 처음인 것 같네.
슬슬 라티아 초입에 다다랐을 때쯤.
“워워.”
마차는 한 번 멈춰야만 했다.
라티아와 세브리의 땅으로 가는 갈림길에 중무장한 군인들 여럿이 길을 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길을 막는 겁니까?”
매튜가 곧장 정중한 목소리로 묻자,
군인 중 하나가 다가와 걸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시몬 바스티유에서 오셨습니까?”
그러자 안에 있던 시몬이 근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소.”
“곧바로 세브리님의 저택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미 연회가 한창입니다.”
마치 우릴 기다렸다는 듯 반기는구나, 세브리.
갈까마귀 용병대뿐만 아니라 어느 제국의 정규군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그런 사병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마차는 세브리의 영지를 향해 곧장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내 가슴도 크게 두근거렸다.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었다는 걸 직감한 듯이 말이다.
세브리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굉장히 잘 닦여 있었는지 가는 내내 마차에 흔들림이 없을 정도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길옆의 울타리는 어제 막 쌓아 올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짝였고, 곳곳에 솟은 쇠기둥의 끝엔 작은 벼락 조각이 춤을 추며 어둠을 밝혔다.
이윽고 세브리의 저택이 보이는 정원 입구에 마차가 멈춰 서자, 시종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헐레벌떡 따라와 마차 문을 열었다.
동시에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마차에서 걸어 나와 정원을 향했는데.
그 모습이 제법 그럴싸했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갈 만큼 자신감이 생길 정도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정원으로 발을 들이는 와중, 맥레인이 심하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큰 구름도 그렇고 왜 돈 있는 놈들은 용의 시대에서나 할 법한 연회 방식을 고집하는지 모르겠어.”
옷매무새를 정돈한 시몬의 대답을 끝으로,
“화약이 왜 사치품이 됐겠어. 놈들에게 용의 시대는 그저 소비의 대상일 뿐이야. 그 시대조차 향유 하려는 거지.”
우리는 조각처럼 재단된 엄청난 규모의 정원을 마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정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브리간딘, 갬비슨, 저건 장식용 리넨 갑옷인가?
책에서 보던 거랑은 다르게 다들 지나치게 화려한 걸 보면 연회용으로 따로 만든, 소위 보여주기식으로 만든 갑옷들 같은데.
마찬가지로 저건 의전용 아밍소드같고,
저게 그림으로만 보던 세이버로구나, 말 그대로 손잡이 전체를 보호하는 가드의 모양이 정말 특이해.
하얀 우주 속, 검은 별들이 내 머릿속에 속속들이 연상된다.
내가 보고 익혔던 글과 그림들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기분.
“한눈팔지 마, 임마.”
한창 눈 돌아가던 와중, 맥레인이 내 뒤 목을 잡고 끌었다.
“맥레인?”
“그런 차림새로 어벙한 표정 짓고 다니지 말라고.”
리본을 악마의 직조 덩어리라고 하시던 분이?
“뭐야 그 표정은?”
“아닙니다. 가죠 맥레인.”
이크, 속마음을 간파당할 뻔했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정원은 그 층마다 수십의 사람들이 모여 간간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시몬은 그런 무리 주변을 스쳐 지나가며 듣고자 하는 무언 가를 찾는 듯 윗층 정원으로 향했고,
이내 시몬을 포함한 우리는 원하는 내용의 대화가 오가는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깃발의 문양을 보니 렌부크에서 오셨군. 어떻소, 이번 낙찰은 성공적이었소?”
“누구…,? 아 요함에서 오셨군?!”
“하하!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어깨에 감아놨던 휘장이 언제 뒤로 넘어갔을까. 그래도 절 알아봐 주시다니 이거 영광입니다? 요함의 보내쉬입니다.”
“전 렌부크의 아부보쉬라고 합니다. 하하 같은 사업 동료로서 서로를 못 알아보면 큰일이 아닙니까?”
“이거 참 면목이 없소, 그래서 아부보쉬 공. 이번 낙찰에는 좀 만족하셨소?”
“보시다시피 이번엔 그리 큰 수확을 거둬들이지 못했소. 갑작스럽게 앙 실러 데우스가 나타나는 바람에…,”
“황무지를 전전하던 배척자들이 어찌 이런 먼 땅까지 와서 패악질을 일삼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들 때문에 이번 수확은 완전히 물 건너갔어요.”
렌부크, 요함.
모두 시몬과 함께 라티아에서 들었던 이름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열렬히 주고받고 있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그러니까 시몬은 확신이라는 준비가 필요했었던 거다.
“가자, 세브리를 만나러.”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시몬의 뒤로,
우리는 양옆에 펼쳐선 채 거대한 저택을 향해 직진했다.
성문과도 같던 저택 문은 우리가 다가오기도 전에 활짝 열렸고, 그 안에선 마찬가지로 용병대와 사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웬걸, 용병대와 사병들 사이에서도 날카로운 신경전이 오갔던 듯 내부 분위기가 제법 날카롭기 짝이 없다.
결국엔 우리가 저택에 진입하면서 모든 시선을 독식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인지 매튜 아저씨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삐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의아해 조심스럽게 속삭여 묻자,
“매튜 아저씨? 뭘 찾기라도 하시는 거예요?”
매튜 아저씨는 나지막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보이질 않아, 분명 이런 자리에 빠질 위인처럼은 안 보였는데.”
그것을 끝으로, 저택의 중앙 현관을 건너 거대한 접견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시몬이 호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세브리.”
그러자 긴 테이블 끝에 앉아있는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여유 가득한 목소리로 응한다.
“시몬 바스티유! 그쪽이 바로 시몬이신가? 만나서 반갑군.”
차가운 공기 속 드러난 세브리의 모습은…,
생각보다 너무나 평범하게 생겨서 깜짝 놀랐다.
아니, 후덕한 살에 가려져 그 얼굴이 뚜렷이 보이지 않아서 내가 그렇게 판단한 것일 수도.
“앉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같이 데려온 친구들은 다른 방으로 가줬으면 좋겠는데.”
“아니, 세브리.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허허, 사납긴. 저택 뒤에 있는 마차 두 대에 그쪽이 넘길 물건에 상응하는 금화가 가득 실려있어.”
“우리가 타고 온 마차에 물건이 있다. 이걸로 거래는 끝이군?”
“아니, 시몬. 거래는 지금부터 시작이지.”
그래, 거래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으로 마무리될 거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