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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53화 (53/365)

53화. 수확 (15)

서로 마주 보게끔 위치한 검은색 가죽 의자가 두 개.

그 두 개의 의자 뒤편으로 마련된 일렬로 늘어선 의자들.

어두운 접견실 한가운데 마련된 그 자리는 이따금, 벽난로에 담긴 불꽃이 춤을 추며 그림자를 엎질렀다.

시몬과 세브리는 자연스럽게 두 의자에 나눠 앉았다.

이어 우리 역시 그 뒤편에 마련된 자리에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동시에,

세브리 측 인원들이 접견실로 우르르 들어와 그의 뒷자리를 가득 채웠다.

역시 연회장에서 보았던 자들과는 확연히 다르구나.

발등을 보호하는 철제 사바톤에, 철제 손목 보호대.

안쪽엔 허벅다리까지 내려오는 사슬갑옷을 입었고, 겉에는 두터운 브리간딘을 걸쳤다.

무기로는 도끼와 워해머, 그리고 몇몇이 차고 있는 아밍소드가 끝인 걸로 보여.

눈동자 몇 번 굴리는 것으로 상대의 무장 상태를 확인한 나는 슬쩍 긴장을 풀었다.

저런 무기들과 직접 겨뤄보진 못했지만, 맥레인이 당부한 가르침들을 생각하면 마땅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행동에 건너편 장정들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버렸다.

내 반응을 읽을 만큼 잔뼈가 굵은 자들이라는 방증이겠지.

그렇게 양측 진영 간에 흐르는 숨 막히는 경계 속에서,

처음 입을 연 것은 세브리였다.

“페트뤼스, 최고급 와인이지. 한잔할 텐가?”

여유 넘치는 미소와 함께 둘 사이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미려한 모양으로 빚어진 검은 유리병.

그것을 집어 든 세브리가 슬쩍 시몬에게 내밀어 보인다.

그러나 시몬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짧게 답했다.

“본론만 말해, 세브리.”

“무법자들이란.”

그 반응에 세브리가 피식 웃으며 자기 앞에 놓인 유리잔에 병을 기울였다.

쪼르륵,

미끄러지듯 쏟아지는 한 과실과 맞물린 시간의 정수.

그 느긋한 적색 빛을 뽐내며 유리병을 이곳저곳 쓰다듬은 와인은 이내 정적인 모습으로 담겨 완연한 자태를 뽐냈다.

“어째서 진즉에 끝났어야 할 거래가 왜 아직도 끝날 기미가 없는 거지?”

재차 시몬이 묻자, 세브리는 작게 웃으며 유리잔에 그 도톰한 입술을 파묻으며 탐스럽게 와인을 넘겼다.

“너무 급하잖아, 이렇게 좋은 술 앞에선 좀 느긋해질 필요가 있다고. 안 그런가?”

뒤이어지는 그의 비아냥에,

곧 그 뒤편에 앉아있던 장정들도 하나둘 동조하며 피식 웃기 시작했다.

이에 재키가 발끈하는 듯싶었지만,

끔찍하리만큼 침착한 매튜와 맥레인에 의해 쉽게 저지되었다.

그런 재키를 보며 나 역시 속으로 끓고 있던 감정들을 감춰야만 했다.

좀 더 냉철하고 차분하게 정신을 유지할 필요가 있겠어.

이후 한창 더 느긋한 모습으로 비워진 유리잔을 내려놓은 세브리는 특유의 거친 숨이 느껴지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진즉에 끝났어야 할 거래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을까? 거래란 본디 상호 간의 의사가 완벽히 통했을 때 끝날 수 있는 거야. 그 말은 즉, 내가 아직 이 거래에 완벽히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시몬은 이에 살짝 비스듬히 앉아 한층 삐딱해진 자세로 턱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거래의 내용은 진즉에 합의된 것으로 아는데.”

“하지만 내 맘에 그리 들진 않았거든.”

“둘 중 하나가 일방적이기 시작한 순간 거래라는 건 성립할 수가 없어. 대지주인데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나?”

“미안하지만 이곳은 내 법대로 돌아가는 곳이야. 내 말이 곧 법이고 진리지. 마찬가지로 내가 거래라면 그건 거래가 되는 거다.”

“이쯤 되면 누가 무법자인지 모르겠군. 안 그런가?”

날카롭게 파고든 시몬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자, 기다렸다는 듯 재키와 맥레인이 의도적으로 큰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이번엔 세브리 뒤편에 있던 장정들이 얼굴에 핏대를 세운 채 움찔거렸다.

물론 세브리가 슬쩍 등받이 너머로 손을 흔들어 제지하긴 했지만,

본인 역시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았다.

“말조심하는 게 좋아, 시몬.”

“생각을 잘하는 게 좋을 거다, 세브리. 우리 가족은 네 생각보다 강하거든.”

이제 세브리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서 그 풍만한 체구를 뒤뚱뒤뚱 이끌어 의자 뒤를 향했다.

이윽고 등받이 위에 양팔을 괸 채 시몬을 깔보듯 내려다본 세브리가 기다렸던 본론을 꺼내 들었다.

“미리 말하지만 난 말이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아. 그리고 너희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

“해서?”

“그것을 넘기면 너희들이 생각하는 액수에 두 배를 더 쳐주지.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남쪽으로 무사히 내려갈 수 있도록 신경 써주겠어. 그렇게 되면 기다리던 완벽한 자유를 확실하게 쟁취할 수 있겠지.”

“조건은?”

세브리의 파묻힌 두 눈이 일순간 번뜩였다.

“네 가족 중에 어린 계집이 하나 있는 걸 알고 있다. 그 아이를 내게 넘겨.”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니 그 역겨움이 배가 되는 것 같구나.

꾹 참고 유지해왔던 무표정한 얼굴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살짝 일그러졌다.

“약속하지, 그 아이에게 최고의 인생을 선물하겠다고 말이야. 평생을 마음 졸이며 무법자로 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때맞춰,

그의 저택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연달아 들리기 시작했다.

최소 수십은 됨직한 아이의 울음소리에 이어 여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소리는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사내아이들은 노예들에게 넘겼나 보군?”

시몬의 같잖다는 비아냥에 세브리의 눈썹이 크게 휘청인다.

“대답해, 어떻게 할 건지.”

“좋아, 말해주지.”

이제 시몬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거대한 덩치가 꼿꼿이 세워지자, 방금까지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세브리는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 올려봐야만 했다.

“그런 정신 나간 거래에 응할 생각은 없다, 세브리. 오히려 내가 너에게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지.”

이어 시몬은 품에서 손가락에 끼는 작은 인장 하나를 그 앞에 던졌다.

“이미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점에 네가 그토록 원하던 아이는 말을 타고 이 인장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세브리는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유심히 살펴보자,

거기엔 분명 선명한 늑대 모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라이튼 제국의 인장?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우리 가족 중에 재주가 많은 친구가 하나 있거든.”

비테시안 기사단의 종자이기도 하고, 아무람므 사교계의 이름난 유명인사이기도 한 신출귀몰한 사람이 하나 있긴 하지.

라이튼 국경의 앤서니 트와드조차 속였던 그가 라이튼 제국이라고 못 속일까?

심지어 속이는 것도 아니고 국경에 만연한 부정을 고발하려 하는 것이라면, 그의 입김이 과연 어디까지 닿을까?

능히 라이튼의 왕관까지 닿을 거다.

“세브리, 네가 어떤 사업을 하는지 난 잘 알아. 이상했거든. 한낱 지주 따위인 네가 어떻게 각기 다른 깃발을 두른 여인들을 받아 처먹고 왕처럼 살 수 있었는지. 그런데 이제 그 의문이 풀렸어. 알고 보니 네가 전쟁에 들러붙은 기생충 새끼였기 때문이야.”

세브리의 낯빛이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결정해라, 물건을 받고 거래를 깔끔하게 끝내서 이 꿈같은 삶을 조금이나마 더 영위할지. 그게 아니면 스스로 모든 것을 끝내는 짓을 할 건지.”

사실,

이것은 기만이었다.

큰 구름 건이 끝난 직후, 조이와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지 못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지도 못한 상태였으니까.

애초에 큰 구름 건이 끝나고 앤서니 트와드를 회유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위와 그 위치를 버리고 세탁하기 위해 조이 스스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불가피하게 잠적했을 테니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얘기다.

그러니 역시 말을 타고 출발했다던 케니 역시 사실은 캠프에 온전히 남아있는 실정.

그러니까 이건,

본인이 탐하던 것이 멀어짐과 동시에 자신을 옥죄고 있다는,

그 견딜 수 없는 압박감을 조성하기 위한 시몬의 완벽한 기만술인 거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세브리의 집착이 그 모든 것을 능가했다는 것.

“갈까마귀들을 다 풀어.”

“세브리,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잘 들어, 시몬. 이 덜떨어진 범죄자 새끼야. 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가져.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내 것을 놓친 적이 없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브리 측 장정 중 하나가 품에서 작은 뿔피리를 꺼내 불었다.

그리고 그 순간.

* * *

캠프 인근,

나무 위에서 잠자코 대기하고 있던 포키스는 저 멀리서 일어난 어느 변화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라티아쪽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새때가 일거에 일어나 사방으로 퍼지듯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엔제이!”

그러나 포키스는 금세 차가워진 표정으로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엔제이를 불렀다.

“캠프에 모든 불을 다 꺼!”

심각한 포키스의 말에 막 꺼낸 사탕을 우물거리던 엔제이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엄청난 속도로 캠프를 향해 달려나갔다.

“촙, 안드레! 캠프에 불을 다 꺼! 안나! 모닥불을 죽여!”

득달같이 달려들며 외치는 엔제이의 모습에,

촙과 안드레는 재빠르게 캠프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불들을 꺼트렸다.

안나 역시 본인이 요리해놓은 스튜 냄비를 엎어 이죽거리던 모닥불을 단숨에 잠재웠다.

그렇게 서서히 빛이 하나둘 소거되기 시작한 걸 멀리서 목격한 포키스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밤이라는 장막이 쳐진 이 어두운 날,

새들의 눈으로 사방을 살핀들 발견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몇몇 새들이 장막을 꿰뚫는 눈을 가졌다고 한들, 결국 인간의 눈으로 시야를 빌려보는 것이기 때문에 한계는 명확하다.

그러니까 빛이 없으면…,

포키스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찰나,

이변.

그래 표현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는 없다.

쾅!

하늘이 번쩍였다.

콰릉!

그것은 순간 세상을 밝히는 굵직한 번개였다.

* * *

땅에 박아 넣은 펼션의 자루를 한 번 더 세게 쥐자,

검날로부터 푸른 기운이 너울대기 시작한다.

이내,

쾅!

세상을 일순간 밝히는 번개가 내리쳤다.

비록 열화된 인챈트, 난잡하게 붙여넣은 날씨 조각이라 하나 어쨌든 하나의 현상을 나타내기엔 부족함이 없으리라.

펄션에 들어가 있는 그 한 줄기의 번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이제 땅에 박힌 펼션을 뽑아 든 아르지스는,

휘날리던 찬란한 금발을 손으로 한차례 정돈한 뒤 귀 큰 자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투구를 썼다.

“위치 확인했습니다, 아르지스님.”

그에 맞춰 앞에서 하늘을 주시하고 있던 애꾸눈 장정 하나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고,

“가자, 토벌이다.”

이에 아르지스는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고삐를 놀렸다.

* * *

바깥에 한차례 소란이 일어났다.

아마도 많은 일이 일어났겠지.

이곳, 세브리의 저택처럼.

“이게…,?”

접견실,

황망한 표정을 한 세브리가 넋 나간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은,

단 두 사람에 의해 자신이 대동한 장정들이 모두 힘없이 절명해 있었다.

낡은 검을 든 맥레인과 양손에 단검을 쥔 재키.

그들은 방금 일어난 싸움에 숨도 차지 않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날에 묻은 피를 털어낼 뿐이었다.

이제 시몬은 맹수의 표정으로 돌변해 세브리의 멱살을 잡아 올린다.

“말해, 무슨 짓을 했지?”

이어 세브리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매튜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캠프가 위험해.”

그런 매튜의 말에 세브리는 입술을 다물다가,

다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해. 지금 이곳에 얼마나 많은 깃발이 모여있는 줄 알아? 여기서 어떤 짓이라도 저지르는 순간, 너희들이 찾던 그 자유는 영영 찾을 수 없을 거다.”

그러나 그 말에 다가오는 것은 대답 대신,

시몬의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주먹뿐.

빡!

“쿠학!”

“입 닥쳐, 발정 난 짐승 새끼야.”

시몬이 눈썹을 찌푸리며 앞니 두 개를 뱉어낸 세브리를 노려보았다.

곧 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소란.

이에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맥레인은 낡은 아밍소드를 고쳐잡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접견실 문 앞에 우두커니 섰다.

그리곤 뒤돌아 날 보며 말한다.

“디안, 캠프로 가. 가족들을 지켜. 나와 재키는 이곳에서 시몬과 매튜를 지킬 테니까.”

“맥레인?”

“얼른.”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즉시 몸을 던져 접견실 창문을 통해 저택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곧이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말에 올라타 고삐를 잡아당겼고, 주위에 당황한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친 채 맹렬히,

맹렬히 캠프 쪽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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