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수확 (16)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부어오른 한쪽 뺨을 출렁이며 지껄이는 세브리.
이에 시몬은 말없이 잡고 있던 그의 멱살을 팽개쳤다.
동시에,
쾅!
접견실의 문을 부수기 시작하는 세브리의 사병들.
“이제 어쩔까. 다 엿 된 것 같은데.”
재키가 침을 뱉으며 하소연하듯 말하자 매튜는 숨을 한 번 크게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캠프로 돌아가 가족과 합류해야지.”
“빈손으로? 그건 말도 안 돼! 금화를 가져가지 않을 거면 우리 물건은? 그거라도 다시 가져가야 할 거 아냐?!”
“진정해 재키.”
“매튜, 내게 더는 진정하란 소리 하지 마!”
둘의 언쟁이 가열되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세브리는 끌끌 웃었다.
“내가 말했지, 아직 기회가 다 날아간 게 아니야. 지금이라도 나와 거래를 할 수 있어.”
이어지는 그의 바람 소리 섞인 쇳소리에 매튜는 살벌한 표정으로 째려보며 일갈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멱을 따주지.”
그 살벌함에 세브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질질 흘리던 코피나 닦아야 했다.
그렇게 결과적으로 세브리 덕에 언쟁이 시시하게 끝나버리자 재키는 방향을 바꿔 자연스럽게 시몬을 쳐다보았다.
“보스! 이대로 가기엔 너무 허무하잖아!”
이에 매튜 역시 시몬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그르친 일이야, 일을 더 크게 만들 순 없어. 이 이상으로 넘어가 버리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돼. 시몬, 네가 말했지. 무엇이든 가족이 최우선이라고.”
“찾기만 하면 도망칠 곳은 언제든지 마련할 수 있어!”
“지금 이 자리에서 손 떼고 캠프로 돌아간다면 말이지! 여기서 더 진행해서 어쩔 건데, 여기 있는 깃발 모두를 적으로 돌리려고? 적은 이 등신 같은 돼지 한 마리로 충분해!”
다시 재키와 매튜의 언쟁으로 번질 때쯤,
연초를 꺼내 입에 문 맥레인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봐, 나도 그쪽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그럴 상황이 못 될 것 같거든?”
그 단단해 보이던 접견실 문은 이제 무쇠로 만들어진 경첩 대부분이 들렸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었다.
거기다,
맥레인이 파악한 문 너머의 적 수는 어림잡아도 스물 이상.
아무리 그라도 쏟아져 들어오는 스무 명을 틀어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인챈트의 힘을 사용한다면 저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지만.
글쎄,
이 저택 바로 아래에 웃음을 안주 삼아 대화를 삼키고 있는 수많은 세력이 가만히 있어 줄까?
그래서 그들을 상대로 또 인챈트의 힘을 빌리게 되면,
그땐 순례자 놈들이 냄새를 맡고 따라붙겠지.
그럼 끝이야.
아무리 맥레인의 실력이 출중하다 하더라도 순례자들로부터 가족을 지켜내는 건 불가능하거든.
차라리,
애초에 저들이 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그렇게 되면 오히려 승산이 있다.
벽을 등지고 둘씩 상대하면 충분해.
여덟? 아니 여섯만 베어도 놈들이 알아서 뒤로 물러나 대치해줄 거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맥레인이 쥐고 있던 아밍소드를 두 어 바퀴 돌리며 입을 열었다.
“밖을 진정시킬 테니 결정을 내리면 신호를 보내. 그리고 재키, 그 고약한 성질 좀 죽여라.”
“맥레인, 어쩌려고?!”
매튜가 급하게 맥레인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는 감색 연기를 한차례 내뱉으며 다 부서진 접견실 문을 발로 뻥 차버렸다.
그러자 방금까지 바깥에서 기세 좋게 문을 두들기던 병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문을 부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문이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부터 부서져 내렸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하지만 그 당황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부서진 문,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뿜어지듯 튀어나온 맥레인이 선두에 있던 둘의 목을 말끔하게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슬갑옷과 투구의 절묘한 틈새를 파고든 것도 모자라 그 베기가 얼마나 정교하게 들어갔는지 하나는 목이 완전히 분리되어 바닥을 나뒹굴자.
당황을 삼키고 경악을 토해낼 수밖에.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에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들도 알거든,
단칼에 목을 분리해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그것도 중무장한 상대의 목을 말이야.
예상대로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판단한 맥레인은 이제 자세를 살짝 낮춰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그러면서 무서우리만큼 초점 잃은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와, 죽고 싶으면.”
처음에는 호승심,
셋이 동시에 달려든다.
그러나 그중 둘의 신체가 엉키며 호흡이 틀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맥레인은 처음 유지한 자세 그대로 검을 몸에 바짝 붙여 제일 먼저 달려오는 병사의 겨드랑이를 찔렀다.
가지에 앉은 작은 새의 숨처럼 간결하기 짝이 없는 그 일련의 동작에 군더더기란 없으리라.
힘없이 픽 쓰러진 병사 뒤로 이제 다시 호흡을 되찾은 둘이 보기 좋게 연계하며 들이닥쳤지만,
맥레인은 협소한 공간을 비웃듯, 검을 크게 휘둘러 일 합 만에 그들의 손목을, 다음은 무릎, 그리고 기울어진 상체에 맞춰 턱밑을 긁어버렸다.
상식적으로 다수와의 싸움은 무술에 일가견이 있는 자라면 더욱 지양하려 하거늘.
병사들은 오늘 처음 겪어봤을 것이다.
일가견을 넘어선 대가의 실력을.
* * *
포키스는 엎드려 두 눈을 감은 채 한쪽 귀를 바닥에 붙였다.
지금 당장 새를 날린다면 잠깐의 시야를 확보할 순 있겠지만, 그 잠깐을 위해 쉽사리 눈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해서 시야가 제공하는 그 광활함만은 못 하지만 그에 비견될 정도로 도움이 되는 청각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귀 기울이던 포키스는,
이내 두 눈을 번쩍 떴다.
“엔제이!”
“포키스?”
언덕 위쪽에 대기하고 있던 엔제이가 포키스의 부름에 즉답했다.
“케니에게 말해, 말을 타고 도망가라고. 바람기름 잔뜩 먹여 어디든 도망가라고!”
“젠장, 놈들이 오는 거지? 그런 거지?!”
“얼른!”
포키스의 닦달에 엔제이가 다시 캠프를 향해 미친 듯이 뛴다.
“케니, 지금 바로 가야 해.”
자신의 말 근처에서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서 있던 케니는 엔제이의 말을 듣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마, 우리가 널 찾을 테니까. 안전한 장소가 나올 때까지 도망쳐. 안나! 당신도 얼른 비질라를 데리고 떠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케니는 말 위에 올라타 무거웠던 미련을 짊어진 채 온 힘을 다해 고삐를 놀렸다.
그다음으로 안나가 비질라를 안은 채 짐말을 타고 사라지자,
캠프에 남은 이들은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촙은,
“안드레, 너도 가.”
멀어져가는 케니를 보며 안도하던 안드레의 등을 대뜸 밀었다.
“뭔 소리 하는 거야?!”
느닷없는 촙의 말에 안드레가 신경질을 부렸지만,
금세 촙의 표정을 보곤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케니는 네가 지켜야지, 뿐만이냐? 저들의 뒤를 네가 든든하게 막아줘야 할 거 아냐.”
촙은,
“이 형님 말 들어라, 안드레.”
안드레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등을 떠밀었다.
“이따 보자, 새꺄.”
“씨발, 알겠어. 내가 다 데리고 올 테니까.”
“잔말 말고 가, 임마.”
안드레는 이를 씹으며 얼른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그렇게 엔제이와 촙을 번갈아 보며 짧게 인사한 안드레는 앞서 떠난 이들을 따라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마지막 발굽 소리가 멎고,
무거운 정적이 다가오자.
엔제이는 말없이 재킷 안감에 붙여놓은 단도를 양손에 쥐었다.
포키스 역시 캠프 인근 나무 위에 숨죽인 채 시위를 만지작거렸고, 촙은 버드와 함께 마주 앉아,
저 멀리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굽 소리를 맞이했다.
* * *
“꽤 좋은 자린데? 지리를 보는 안목은 인정하겠어.”
말을 멈춰 세운 아르지스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안장 위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빈틈없이 온몸을 감싼 은빛의 갑주는 달빛을 머금어 더없이 신성해 보이고,
아찔한 곡선을 가진 투구 밑으로 드러난 말끔한 이목구비엔 진한 승자의 여유가 묻어있는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자루 위에 손을 얹은 채 한 걸음 나아가자.
양손에 단도를 가득 거머쥔 채 맞은편에 서 있던 남자가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나?”
이에 아르지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 인근은 모두 세브리의 땅이거든, 그건 내가 너희에게 해야 할 대사였지 싶은데.”
씩 웃으며 답한 아르지스는 슬쩍 상체를 기울여 멍청해 보이는 사내 뒤편을 둘러보았다.
“이런, 널 버리고 모두 떠난 건가?”
원래라면 세브리의 여인을 찾아야 하겠지만,
아르지스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아야 하거든.
“버리긴, 널 엿 먹이기 위해서 준비한 내 선물이야.”
멍청한 남자의 이죽거림에 아르지스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떠졌다.
그것은 저 볼품없는 사내의 도발에 반응한 게 아니라, 그가 찾고자 하는 게 여기에 없다는 걸 알았기에 한 행동일 뿐이었다.
“여기는 더 볼일 없겠어.”
심드렁한 표정을 한 아르지스는 곧장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뒤돌아섰고,
동시에 그의 뒤편으로 여덟이나 되는 장정들이 성큼성큼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개중 넷은 엔트로피급 용병이었고,
나머지 넷은 아르지스와 함께 가문을 나온 견습 기사들이었다.
과연 세브리가 가진 용병들과 병사들 가운데 최정예라 할 수 있겠으나,
맞은편의 남자는 위축되기는 커녕,
“내게 등을 보이지 마라, 멍청한 새끼야!”
들고 있던 단도를 던져,
깡!
보기 좋게 뒤돌아 물러나는 아르지스의 뒤통수를 맞췄다.
그 순간,
아르지스는 애써 상대에게 보여줬던 우아함을 내려놓고 대번에 바뀐 격앙된 표정으로 뒤돌아 남자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갔다.
이에 건너편 남자는 뒤로 물러서며 쉴새 없이 단도를 던졌지만,
그 정교한 실력이 무색하게 은빛 갑주 앞에 무력화될 뿐이었다.
“이 광대 새끼가.”
이어 남자의 근처에 다다르자,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달려든 아르지스는 금세 그의 코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과연,
귀 큰 자들이 만든 갑주.
방어력은 플레이트 아머와 같으나 그 무게가 옷과 같구나.
이제 무표정한 얼굴로 펄션을 뽑아 든 아르지스가 묵묵히 엔제이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팍!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정확히 아르지스의 심장 부근을 강타했다.
“꺽!”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순간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그것이 오히려 아르지스를 자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화살은 갑주의 벽을 넘지 못했다.
“크윽!”
공격이 실패한 것을 알게 된 눈앞의 남자가 마지막 단도를 들어 투구 속 드러난 안면을 향해 내질렀지만,
아르지스는 침착하게,
몸을 돌림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팍.
남자의 손목을 말끔히 잘라버렸다.
“으...아아악!!”
절단된 손목이 바닥에 나뒹굴고, 남자의 고통 섞인 신음이 나오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어디선가 튀어나온 잔챙이 둘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이내 따라온 용병과 병사들이 들러붙어 그들을 무참히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제, 아르지스가 손목 잘린 남자의 머리맡에 서서 외친다.
“셋을 세겠다. 그동안 이 화살의 주인이 나타나질 않는다면 놈의 이 더러운 머리를 몸에서 떼어주지. 그리고 그다음에도 셋을 세겠다. 마찬가지로 나타나지 않으면 저 둘 중 하나의 머리를 똑같이 베겠어. 잘 생각해. 네겐 기회가 세 번밖에 없다는 걸.”
곧 아르지스의 펄션이 손목 잘린 남자의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지고.
“셋.”
자루를 잡은 손에 힘이 가득 실려,
“둘.”
내리쳐질 찰나.
“하…,”
아르지스는 느꼈다.
아르지스 뿐만이 아니라 일당 둘을 붙잡고 패고 있던 장정들 역시 같은 것을 느꼈을 거다.
그것은 제법 날카로운 맹수의 시선 같은 것이어서,
처음엔 화살을 쏜 자가 나왔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
그 남자는 어느샌가 도착해서 우두커니 선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눈에 담은 아르지스는,
허연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제 발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잡아.”
눈을 부라리며 입을 벌린 아르지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정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어느새 남자는 아르지스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천연스럽게도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그림자를 한바탕 삼킨 듯한 어두운 낯빛을 유지한 채 롱소드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
아르지스는 순간 자신이 놓친 의식을 붙잡아야만 했다.
뭔가가 생략되었거든.
생략되어도 너무 생략되었어.
그러니까,
뭐였지 방금?
씨발, 그게 뭐였냐고.
합?
아니, 합도 아니야.
단순히 무기와 육신이 부딪치는 걸 합이라 할 순 없잖아.
그래, ‘문자 그대로’
놈은 그저 저 여덟의 손과 발을 잘라내며 내게 걸어왔다.
제법, 살쾡이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군.
“재밌…,”
아르지스가 이죽거리며 입술을 실룩였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륵…,?!”
남자는 아르지스의 입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 검은 아르지스의 입을 관통해 뒤통수와 그 뒤통수를 보호하는 투구까지 꿰뚫고 나왔다.
“르륵…,”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걸까.
아르지스는 입 밖으로 가래 섞인 피거품을 연거푸 내밀다가, 이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사실 아르지스의 판단은 꽤 정확했다.
상대는 제법 발톱을 세운 살쾡이 정도 되는 급이었거든.
다만,
그와 비교했을 때 자신은 개미에 불과했다는 걸 몰랐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