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55화 (55/365)

55화. 수확 (17)

둘, 넷, 여덟…,

열하나 정도 베었나.

그쯤 되니 그 누구도 맥레인에게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병사들이 부서진 접견실 문을 등진 채, 암벽처럼 서 있던 그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다.

그런 그들이 더욱이 질려버린 이유는,

맥레인의 몸에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지 않았다는 거다.

숨은 약간 거칠어졌지만, 피에 흥건하게 젖은 검을 제외하면 그의 몸은 방금 둘을 연달아 더 베어버린 사람이라곤 보기 힘들 정도로 깔끔했다.

그 광경에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이질적인 공포감을 느낀 병사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쯤 되자 지휘권을 가진 듯한 병사 하나가 사색이 된 얼굴만큼 차가워진 심장으로 지시를 내렸다.

“총을 가져와, 얼른!”

“세브리님이 화약은 함부로 쓰지 말라고…,”

“이 새끼야 그 세브리님이 저 안에 갇혀 있잖아!”

“하..하지만 총을 쏘면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상황을 알게 될 텐데…,”

“그래서, 네가 저 괴물 같은 놈을 상대하겠다 이거냐?”

“다녀오겠습니다.”

“머저리 같은 놈!”

대치 상황까지 만들어진 것은 좋은데,

저들이 차갑게 식을 빌미를 제공해버렸군.

맥레인의 눈썹이 움찔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접견실 내부를 보니 매튜와 재키가 서로 열을 올리며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시몬의 표정도 심상치 않고.

하지만 알 게 뭐야, 중요한 건…,

“뭐 하자는 거야? 우리 이제 빨리 나가야 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맥레인은 접견실 안에 있는 이들을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덩달아 대치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떨어져 있던 병사들이 움찔하며 더욱 뒤로 물러났다.

결국엔 이 대치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저택 밖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저택을 포위하는 쪽으로 가겠다는 건가?

놈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더는 검을 가지고 뭘 할 수가 없는데.

물론 다행인 점은 저놈들이 총이라는 병기에 그리 숙련되어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애초에 일개 병사가 사치품에 가까운 화약을 낭비하며 총을 쏜다는 상황이 있을 리가 없겠지.

더군다나 모시는 주인이 주군이라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일개 지주 따위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은 존재 자체만으로 큰 압박이다.

용의 시대를 주름잡던 병기의 위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니까.

“젠장!”

마찬가지로 이곳에 서 있어봤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아는 맥레인 역시 뒤돌아 접견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접견실 안에 들어온 맥레인이 채 무슨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매튜! 당신은 항상 이런 식이야, 시몬 바스티유는 한 번도 직진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 왜? 당신이 늘 구닥다리 같은 방식으로 빙 둘러 가길 고집하니까!”

“우리는 단순한 집단이 아니고 가족이야 재키, 이 등신아! 우리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기 시작한 무법자 놈들이 몇이나 남았을 것 같아? 하나도 없어! 왜 그런지 알아?! 그 새끼들은 답 없는 범죄자 새끼들이니까.”

“그놈들과 우릴 구분 지으려는 그 시도 자체가 웃긴 거라고 매튜 영감!”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자체로도 충분히 구분 지을 수 있지, 차선은 다음 기회를 위한 준비일 뿐이야!”

“그만!”

쏟아지는 언쟁에 질린 맥레인이 일갈했다.

“다 집어치워!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

매섭게 몰아치는 맥레인의 말에 재키와 매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캠프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서요, 매튜. 지금 급한 건 그들에게 달려 가보는 것뿐이에요, 아시겠어요?!”

이어 맥레인은 재키의 멱살을 붙잡아 끌었다.

“그리고 재키, 이 씨발 넌 앞으로 가족에 대한 존중을 기르는 게 좋을 거다. 네 출신을 잊지마, 한낱 애송이 새끼를 받아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꼴이 같잖으니까.”

항상 맥레인에게도 거리낌 없이 굴었던 재키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의 살기 어린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게 누그러진 재키의 얼굴을 확인한 맥레인이 그의 멱살을 놓아주고는 곧바로 시몬에게 달려들었다.

“시몬, 캠프로 가야 해.”

“알아.”

시몬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런데 왜 떠나질 못하는 거야.”

“맥레인, 보여?”

시몬은 천천히 손가락으로 디안이 뛰쳐나간 깨진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그 너머엔,

두 대의 마차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자유가 눈앞에 있어.”

“시몬!”

“맥레인, 우린 저 자유를 손에 쥐기 위해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왔어. 세상으로부터 빌어 먹혀 진창으로 굴러떨어진 삶들이 모여 만들어진 시몬 바스티유가 저걸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다고.”

맥레인은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애초에 시몬과 맥레인은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

하나는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하나는 가족의 기둥으로서.

명백히 다른 위치에서 같은 걸 보고 같은 감상을 내뱉을 수는 없는 법.

그러니까 맥레인은, 가족의 기둥인 시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해서 한 번은, 직진해볼까 해.”

“시몬?”

시몬은 말없이 품 안에서 검은색 머스킷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미 탄알이 물려 있는 그 머스킷 권총은 언제든지 부싯돌을 때려 잠자고 있던 화약을 깨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내 총구가 세브리를 향하고,

이에 잠자코 있던 세브리가 발작하듯 바닥을 기어 뒤로 도망쳤다.

“뭐..뭐 하는 거야! 날 죽이면 네놈들도 다 끝난다는 걸 진정 모르는 건 아니겠지? 어?!”

맥레인은 얼른 시몬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시몬, 세브리를 죽이면 정말 끝이야. 중립지역 최대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거라고.”

“그전에 우린 자유를 쟁취해 떠날 수 있어.”

“저 많은 깃발을 적으로 돌리는 순간 도망칠 곳은 없어.”

“아니, 맥레인. 두 발 걷는 놈들의 탐욕은 끝이 없지. 깃발들은 세브리의 부제 속에서 서로 숨겨왔던 송곳니를 드러낼 거야. 저 거대한 황금밭을 차지하기 위해서.”

“동시에 두 발 걷는 자들은 교활하기도 하지, 황금밭을 얻기 위한 명분은? 그걸 위해서라도 놈들은 분명 우릴 제거하려 들 거야.”

“시몬 바스티유는 이제 확실한 것이 필요해.”

단호한 시몬의 표정에,

맥레인의 상처 난 입술이 살짝 떨렸다.

시몬은 이제 맥레인을 지나쳐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세브리 앞에 섰다.

“시몬?”

“보스?!”

매튜와 재키도 놀란 표정으로 시몬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묵묵히 방아쇠에 손가락을 댈 뿐이다.

“정말 미쳤군, 너희들은 정말 미쳤어! 지금 네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정확하게 인지하도록 해라! 여긴 내 땅이야, 내가 곧 법이고 규칙이란 말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거래 말이야. 거래!”

“넌 우리 가족을 건드렸어, 이 망할 새끼야. 그리고…,”

딸칵.

시몬의 엄지가 머스킷 권총의 콕을 당겼다.

“우린 무법자야, 병신아.”

이내 방아쇠가 당겨지고, 동시에 뒤로 물러났던 콕이 내리쳐지며 부싯돌을 때렸다.

탕!

총알에 그대로 머리를 관통당한 세브리는 뜬눈으로 절명했다.

“사치품에 맞아 죽었으니, 대지주에게 어울리는 최후라고 할 수 있겠군.”

재키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비아냥거렸다.

매튜와 맥레인은 말없이,

시몬을 한참이나 쳐다볼 뿐이다.

“매튜, 맥레인 둘 다 뭐해! 얼른 가야지!”

앞장선 시몬을 따라 재키가 서둘러 둘의 어깨를 치며 지나가자, 그제야 그 둘은 서로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내 묵묵히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 * *

총소리에 감미로운 음악으로 너울대던 거대한 정원이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평생 칼밥을 먹으며 살아온 잔뼈 굵은 기사들은 버릇처럼 허리를 매만지며 본인의 무기를 쥐었고, 각지에서 몰려든 깃발의 주인과 대변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피기 급급했다.

뒤이어,

탕! 탕탕!

저택 뒤편에서 연이어 총소리가 들리고, 그 직후 두 대의 마차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나가 입구 쪽 울타리를 부숴버린 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상황이 제법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급급했으나,

반대로 총소리가 났던 저택 쪽으로 달려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분명 커다랗게 쳐진 거미줄에 어느 정도 지분을 가진 자들.

특히 렌부크, 그리고 요함의 남작들은 아연실색한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저택 내부에 들어선 순간 그들의 얼굴에 그나마 남아있던 생기도 완전히 가셔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세브리님은, 세브리님은 어디에 있는 거지?!”

헐레벌떡 시체가 즐비한 접견실을 향한 그들은 끝내,

뜬 눈으로 절명한 세브리를 발견하곤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사업이 박살 나버렸다.

세브리가 뒤진 것보다 그게 더 큰 충격이었던 그들은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끔뻑거릴 뿐이다.

“어떻게 해야…,?”

렌부크 쪽 남작이 울상을 지었지만,

아까까지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요함의 남작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가지런히 자른 턱수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애초에 우리의 사업은 너무 분할된 채로 운영되어왔어요. 게다가 세브리 이놈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맞추는 것도 슬슬 버거웠지 않습니까?”

“무슨 수라도 있는 거요?”

“각 영지에서 믿을만한 인재를 하나씩 차출해서 황금밭을 관리하면 됩니다. 병사들도 우리 인물로 채워 넣으면 그만이지요, 노예를 관리하는 건 애초에 갈까마귀 용병대가 했던 일이니 똑같이 돈만 주면 충성을 보일 겁니다.”

미쳤다.

렌부크의 남작은 요함의 남작이 말하는 그 달콤하기 짝이 없는 계획에 하마터면 실금할 뻔했다.

“그럼 그때부턴 우리가 사업의 주체가 되는 거군요.”

“원래 위대한 상단인 ‘코르마가’도 합동 조합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끼리 똘똘 뭉치면 이 끝나지 않는, 아니 끝날 수 없는 전쟁을 이용한 사업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끝을 모르는 성장만을 거듭할 겁니다.”

“해서, 다음 계획은 뭡니까?”

“우리가 황금밭을 이어받기 위한 명분을 얻어야지요.”

“그렇다면..?”

“놈들, 세브리를 죽인 놈들을 찾아 없애야지요. 이 불쌍한 돼지의 복수를 우리가 해 주는 겁니다.”

요함의 남작은 이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그 마차가 틀림없을 겁니다, 놈들 말입니다. 완전히 이곳에서 벗어나기 전에 붙잡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서둘러야지요, 얼른!”

“라티아에 끌고 온 병사가 몇이나 됩니까?”

렌부크의 남작이 눈썹을 잔뜩 찌푸린다.

“대략 사십 정도 되오.”

그 말을 들은 요함의 남작이 콧방귀를 끼며 말을 이었다.

“전 기사 둘에 병사 이십 정도 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뭔가 잘 모르시나 본데,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기사 둘에 병사 이십이라 했습니다.”

“그게 뭐...,”

요함의 남작이 하는 이야기를 곱씹던 그는 이내 할 말을 잃은 채 아랫입술을 씹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나눌 지분의 윤곽이 꽤 선명해진 것 같습니다만?”

“크흠..,”

요함의 남작이 하는 이야기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결국엔 반박할 거리가 없던 렌부크의 남작은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 병사들을 굳이 희생시킬 필요까진 없지요, 저택을 수색해 봅시다. 세브리 놈이 탐닉한 재산 중에 이 일에 도움이 될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니.”

어느덧 소강에 빠진 연회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할 때쯤.

위쪽 저택엔 은밀히 진입한 두 무리의 병사들이 내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렌부크 쪽 남작의 병사 하나가 낡은 바닥 문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은 본의 아니게 모든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는 패를 가지게 되었다.

소식들 들은 두 남작은 지하 창고에 있는 물건을 보곤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그들도 그건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용의 시대,

백색 모루 위에서 만들어진 병기의 결정체.

그리고 그 주위에 빼곡히 쌓인 화약들.

과거엔 영광스러운 무기고로 통했을 그 공간은 용의 시대 이후인 지금은 그저 세브리의 은밀한 수집품 창고였으리라.

“책으로만 보던 병기를 눈앞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크흠, 어째 우리가 나눌 지분의 윤곽이 다시 그려지는 것 같지 않소?”

렌부크의 남작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묻자 요함의 남작이 화들짝 놀라 되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 병기, 저희 병사가 발견했습니다만.”

“지금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잖소?! 놈들이 우리의 사정권 밖으로 완전히 도망치기 전에 붙잡아야 한단 말이오!”

요함의 남작은 그 말을 하곤 서둘러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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