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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56화 (56/365)

56화. 수확 (18)

끓고 있던 감정이 휘발되듯 사라진 뒤에야 나는 뒤늦게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엔제이, 그런 그가 쓰러진 땅 주위엔 검붉은 피로 흥건하다.

“엔제이!”

나는 얼른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는 그 상황에서도 특유의 유쾌한 표정을 잃지 않으려는 듯 애써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디안…! 역시… 그… 근데… 먼저… 다…단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단검 하나를 주워들었고, 이미 그 과정에서 내 양손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분명 엔제이 혼자 흘린 피겠지, 출혈이 극심하다.

“그다음은요, 엔제이! 정신 차려요!”

“주머니… 있어… 그거…”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피에 젖은 그의 몸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의 몸에 손을 댄 순간,

찌익.

천으로 대충 둘러맨 엔제이의 잘린 손목으로부터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어.

주머니에 있을 무언가를 찾기 위해 집중한 나는 이윽고 작은 유리병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밝은 빛무리가 들어있는 그 유리병을 얼른 엔제이의 눈앞에 가져가 보이자,

이젠 대답하기도 지쳤는지 그는 말 대신 기침 섞인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이 이어서 튀어나와야 했지만, 내 본능이 그걸 가로막고 있었다.

유리병에 담긴 건 분명 날씨 조각일 거고, 단검을 꺼내 달라 했다는 건…,

난 본능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파각!

단검 위에 유리병을 얹어놓은 상태에서 그대로 주먹을 내리쳐 깨트린다.

깨진 유리병으로부터 너울대며 나온 빛무리는 단검의 면에 쏟아지고,

이어,

치익!

빛에 의해 단검의 날 부분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검 면을 들이밀어 엔제이의 손목을 틀어막았다.

치이익!

살가죽이 타고, 피가 끓는다.

걸쭉한 쇠 비린내를 품은 허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으…으으그윽!”

의식을 거의 잃어가던 엔제이는 맹렬한 통증에 두 눈을 부릅뜨며 파르르 떨었다.

끝이다.

피가 멎었어.

촙과 버드는? 포키스는?!

엔제이의 처치를 어느 정도 끝내고 찾아온 건 또 다른 걱정들.

서둘러 주위를 살피던 나는 역시나 미동도 없이 서로 엉킨 채 널브러져 있는 두 남자를 발견했다.

온몸에 피를 묻힌 상태로 그들에게 달려가자,

“…디안.”

한쪽 광대가 무너져 무서울 정도로 부어오른 촙이 힘없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런 그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정말이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건틀릿이랑 그리브를 맨몸으로 상대한다는 건 미친 짓이야.”

“정말 괜찮은 거야?! 촙?”

“괜찮아. 숨쉬기가 불편한 것 빼고는. 갈비도 몇 대 나간 것 같아. 그런데 디안… 있잖아 디안…”

갑자기 촙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의 그 어두운 목소리에 나는 자연스레,

촙의 옆, 미동도 없이 엎드려 누워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버드가 날 감싸주느라 자길 살피지 못했어, 이…씨발… 첫 발길질에 버드 머리가 크게 꺾였어… 이미 그때부터… 그런데도 그는 날 계속 껴안고.. 끅…끅…”

목에 엉킨 가래와 피에 헐떡이며 우는 촙,

그의 슬픔을 따라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를 조심스레 뒤집어 보자,

“…버드.”

빛 잃은 눈, 아직 덜 마른 입가의 피거품.

장성한 사내의 몸 위로 휘영청 꺾여 떨어지는 얼굴.

쓰라림을 삼키고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을 쓸어 눈꺼풀을 덮어 주었다.

“촙, 정말 괜찮은 거야?”

“그래.”

슬픔이라는 건 설익을 때가 가장 괴로운 거다.

지금이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케니는 잘 도망갔을까.

안드레는, 안나 아주머니는?

비질라.

모두 다 괜찮은 거야?

맥레인, 매튜 아저씨, 시몬…

재키 당신의 그 재수 없는 얼굴마저 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해.

내 설익은 슬픔을 누군가 익었으니 뱉어도 좋다고 말해줬으면…

스스로 투정을 부리고 난 뒤에야,

나는 한없이 차갑고 더 냉정해질 수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 곧장 촙을 부축해 천막 쪽으로 끌고 갔다.

엔제이는 그대로 기절해버린 것 같으니 무리하게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러고 보니 포키스는?

“포키스.”

나지막이 불러봤지만, 숲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아니,

한참 뒤에야.

찌르르,

새 한 마리가 작게 지저귀며 숲속으로부터 튀어 나왔다.

보라색 깃을 가진 걸 보니 포키스의 새가 확실해.

손목을 내밀자 새는 기다렸다는 듯 앙상한 두 발로 내 팔 위에 안착했다.

새의 한쪽 발목에 작은 통이 걸려 있는 걸 보니, 그가 우리에게 글을 남긴 것 같다.

통을 열어보자 그 말대로 작고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나왔다.

[안나, 비질라 쪽으로 까마귀 넷이 붙음.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겠다.]

저 금발 남자가 끌고 온 자들 말고도 더 있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금발 남자는 케니를 찾을 생각도 없어 보였지.

오히려 날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었어.

하지만 이젠 상관없다.

놈은 내 손에 죽었으니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모두 무사하길 바라는 것뿐.

* * *

“놈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아?!”

바쁘게 고삐를 놀리고 있던 매튜가 맥레인에게 물었다.

맥레인은 그런 매튜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나도 몰라요, 시몬 말대로 세브리 몫을 두고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있을지도요.”

하지만 그런 맥레인의 말에 매튜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어.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지 맥레인?”

“역설적이게도 떳떳하지 못한 일이 명분은 확실한 법이거든요. 더럽게 돈 버는 놈들이 가장 먼저 사려는 게 자길 정당하게 만들어 줄 합리화라는 걸 생각하면.”

“어떻게든 우릴 싸잡아 죽이는 방식으로 명분을 만들 거다?”

“그래야 본인들이 사업을 접수해도 잡음이 안 생길 테니까요. 우린 그놈들에게 정말이지 둘도 없는 명분을 제공한 거나 다름이 없으니…,”

맥레인은 눈썹을 가득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젠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몬 역시 당연한 행동을 했잖아요, 그렇죠?”

“그래, 우린 가족을 건드는 놈을 용서하지 않아.”

“세상이 우릴 지우고자 하는 것인지,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지워지려 하는 건지, 이젠 모르겠어.”

“너무 낙담하지마,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우린 아직 자유에 도전할 기회가 남아 있잖아!”

매튜의 말에 맥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감을 품은 일말의 미소를 입술에 머금고서.

이제 앞장서 달리던 마차에서 시몬의 거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캠프에 도착한다! 도착하는 즉시 떠날 준비를 할 거니까 준비 단단히 해! 이젠 정말 자유가 눈앞에 있어!”

* * *

“맥레인.”

“디안.”

도착하기 무섭게 마차에서 뛰어내린 맥레인이 내게 달려왔다. 그는 내 몸에 묻은 피를 살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것이 내 피가 아니란 것을 알아차리고 차분해졌다.

매튜 아저씨는 도착하자마자 엔제이의 상태를 파악하곤 그 옆에 달라붙어 조치했고,

시몬 역시 큰 천막 안에서 지도를 꺼내 들고 와 재키와 숨돌릴 틈 없이 빠져나갈 길을 고민했지만,

그것 보다,

중요한 것이 있잖아?

“버드가 죽었어요.”

나는 그들 모두에게 선포하듯 말했다.

그러자 각자 바쁘게 움직이던 가족들이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얼어버렸다.

“케니와 안드레, 안나 아주머니와 비질라도 떠났어요, 그 뒤로 추격자가 있어 포키스가 그들을 쫓아갔고요.”

“…시발.”

맥레인이 고개를 떨군 채 연초를 입에 물었다.

시몬은 한동안 지도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서 있고,

매튜 아저씨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손등으로 땀과 함께 슬픔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너무나 차가운 것이어서, 금세 달아오를 것 같았던 슬픔은 금방 식어버렸다.

이제 맥레인은 내가 제거한 자들의 시체를 진지한 표정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이윽고 금발이 인상적이었던 이의 앞에 멈춰 선 그는 몸을 숙여 한동안 관찰하다가 대뜸 날 불렀다.

“디안.”

“예, 맥레인.”

“몇 합이었냐.”

범상치 않은 표정.

그건 혹독한 수련 속에서도 몇 번 본적이 없는, ‘과거의 맥레인’이라면 짓지 않았을까 했던 표정이었다.

“합은 없었습니다.”

“기습이라도 한 건가?”

“아니요.”

“바꿔 질문하겠어, 넌 모두 아홉을 베었다. 이 아홉 전부를 베는 데 몇 합이 들었지?”

“맥레인, 솔직히.”

그래,

그땐 순간 이성이 날아가 뭘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지금에 와선 제법 떠오르는 것들이 많아.

해서 느낀 대로 대답하겠어.

“그들은 너무 느렸습니다, 그들이 내게 부딪쳐오길 기다렸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느렸어요. 해서 합 자체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셀레어의 힘을 사용하기라도 한 거야?”

“아시다시피 아직 다루는 방법도 잘 모릅니다.”

“…그래, 그랬었지.”

말을 마친 맥레인은 은빛 갑주를 입은 시체 옆에 놓인 펄션을 집어 들었다.

“열화된 인챈트라 하더라도 그 힘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야. 특히나 그 재해의 종류가 ‘벼락’이라면, 더더욱 무시할 수 없지.”

이어 맥레인이 펄션을 거꾸로 집어 바닥에 자루를 내리치자, 그 우악스러운 힘에 폼멜이 튕겨 나가고 자루가 부서졌다.

“재해 중 벼락에 해당하는 인챈트는 그 힘이 다른 재해와는 달리 사용자 자체를 강화시킨다. 거기다 귀 큰 자들이 만든 명품 갑옷까지 걸쳤다? 그쯤이면 한 깃발을 섬기는 기사 정도가 아니면 상대하기 힘든 존재였을 거다.”

이제 부서진 자루, 거기에 덧씌워져 있던 검붉게 물든 나무 덮개를 집은 그가 말을 잇는다.

“잘했다, 디안. 네가 가장 큰 일을 해줬어. 모든 상실의 탓을 너에게 돌리지 말란 말을 하는 거야. 오히려 네가 있었기 때문에 엔제이와 촙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어.”

“고맙습니다, 맥레인.”

예상치 못한 위로에 순간 울컥했지만,

그보다는 당장 올라오는 씁쓸함이 크구나.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매튜 아저씨는 천막들을 한데 모아 그곳에 불을 질렀다.

이제는 집처럼 느껴졌었는데, 그것들이 타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다.

이어서 내 말을 포함해 이제는 주인이 없는 버드의 말까지 동원하여 마차 두 대 모두 4두 마차로 바꾸는 작업까지 순식간에 끝마쳤다.

그 과정에서 매튜 아저씨와 맥레인, 그리고 내가 버드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비록 그와는 그렇게 가깝게 지내진 못했지만,

언젠가는, 아니 내일이라도 당장 가까워졌을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그제야 텁텁하게 익은 슬픔을 살짝 입 밖으로 뱉어본다.

이제 자신의 말을 탄 시몬을 필두로 매튜 아저씨와 재키가 선두 마차를, 그리고 나와 맥레인이 후미 마차를 맡았다.

중상자인 엔제이는 선두 마차에, 비교적 경상에 해당하는 촙은 후미 마차에 싣고서,

시몬 바스티유는 이제 이곳을 벗어나려 한다.

* * *

요함의 남작.

지드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목 위엔 움브라라는, 먼 거리도 순식간에 오가는 희귀한 맹금이 올라타 있었다.

“라이튼과 티바르 국경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의 말에 렌부크의 남작 에비송은 당연하다는 듯 맞장구쳤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그들이니 당연히 우리 부름에 응해야지!”

에비송의 말대로, 이 사업이 대외적으로 까발려졌을 때 가장 피똥을 싸는 건 라이튼과 티바르의 국경 쪽이 될 것이다.

적과 내통, 군비 횡령, 편취, 폭리.

아니 이 정도 급이면 그냥 손쉽게 반역에 해당한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국경에 영지를 가진 남작급 이상의 가문은 이 일이 알려지면 모조리 멸문을 당하고 그 잘린 사지와 머리는 끝없이 조리돌림 되겠지.

“그래서 그들이 협조해 주겠답니까?”

에비송의 말에 지드세는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일대 모든 지역에 관문을 설치할 겁니다. 그래봤자 본국에선 군사 활동으로 보이겠지만요. 그리고 국경 영지에서도 세브리의 죽음을 그리 아쉬워하지 않더군요. 놈이 요구해서 빼앗긴 여인의 수가 몇인지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도 이 순간을 바라고 또 바랐을 겁니다.”

“그럼 서둘러 출발합시다! 아무리 그래도 관문에서 걸러지는 것보단 우리가 직접 몰아 사냥하는 게 더 모양새가 살지 않겠습니까?”

“에비송 공,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을 하시는군.”

“그보다 얼른 시험 해보고 싶단 말이지… 용의 시대의 정수라 불릴만한 병기 말입니다!”

“저도 보고 싶군요, 과거를 주름잡았던 힘 일부가 어떨지.”

무장 형편이 제법 좋은 사병만 육십.

그리고 그 앞에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가 둘.

두 남작은 그렇게 그들을 이끌고 세브리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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