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수확 (19)
마차에 실린 금화의 무게만큼이나 고삐를 잡은 자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무르익은 밤은 뿌옇게 묽어 진한 새벽 냄새를 풍기고, 그 가운데 별빛들은 서서히 뭉개져 눈감을 준비를 하는데,
고삐를 잡은 이들의 눈꺼풀은 사납게 들려 있구나.
맥레인은 신랄해진 마음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어.
분명히 좀 더 고민했더라면, 숙고했더라면 완만한 길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과.
무슨 심경의 변화를 느낀 건지 대번에 변해버린 시몬의 모습이 겹치니 차분하기만 했던 그의 마음이 휘청거리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버드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덜컥, 다른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마음이 잡아먹힐 뻔도 했지만.
오랜 세월, 이 무정한 땅을 같이 살아온 가족들이라면 그들끼리 어떻게든 살겠지.
살아 돌아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늘 그랬던 것처럼…,
하는 막연한 자신감도 생긴다.
물론 빛바랜 것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반짝여 눈 시릴 정도로 찬란한 것도 있었어.
디안의 재능이 그렇다.
맥레인은 평생을 살면서 많은 걸 틀려왔다.
하지만 같은 대상에게서 여러 번 틀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맥레인은 벌써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디안을 틀렸다.
정정하고 또 정정해도,
내민 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불확실성만 얻는다.
그래, 디안의 재능은 난제다.
만약 맥레인이 그것을 풀고자 한다면, 한 난제에 평생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영혼까지 불사르는 수학자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지도 몰라.
재능이란 건 허무의 대물림이다.
그건 맥레인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정립한 몇 안 되는 진리 중 하나였다.
재능은 누군가를 허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당사자마저 같은 재능에 허무를 느끼게 되지.
천장이 없는 먹이사슬.
강과 약을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없게 만드는 장벽.
맥레인은 과거, 천장이 없는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앞서 말한 재능의 장벽을 몇 마주한 적도 있었지만,
말했다시피 맥레인은 같은 대상에게 두 번 이상 틀린 적이 없다.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
그런데 오늘은,
어쩌면 정말 넘을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장벽을 엿본 기분이야.
결정적으로 그 부분이 맥레인의 마음을 신랄하게 만들었다.
비록 열화된 인챈트였다곤 하나, 상대는 그러한 힘을 능숙하게 쓸 줄 아는 자였다.
비록 용병대에 부여된 이름이었다곤 하나, 엔트로피라는 이름이 걸린 이상 개개인이 최소 십 년 이상 칼밥 먹은 자들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상대는 가진 것을 채 펼지 지도 못 했을뿐더러,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스러졌어.
문제는,
‘디안이 가진 검술은 그런 식으로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거야.’
바로 이 부분이 틀렸다.
내가 틀렸어.
지레짐작 다른 검술을 부정하는, 타인의 박자 위에 올라타 새로운 박자로 노래하는 검술을 갖고있구나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단순히 그 부분에 매몰되어 극복 점을 가르치려 들었었는데.
아니,
나는 그가 연주하는 ‘신곡’의 첫 마디만을 보고 평가하고 가르치려 들었던 거야.
왜 수학자가 난제 하나에 꽂혀 평생을 바치는지,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간다.
첫 마디가 모든 검술을 부정하는 거라면,
두 번째 마디는 대체 뭘까,
세 번째는?
곡의 절정에 해당하는 내용은?
그 마무리는?
이 곡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그 깊이와 뜻은?!
기사로서, 무에 젊음을 바친 한 사람으로서 저 장벽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설렘이 북받쳐 오르는구나.
하지만, 동시에 통탄할 수밖에 없다.
어찌 가장 난잡하기 짝이 없는 진흙더미 위에 저리 찬란한 꽃이 폈단 말인가.
맥레인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게 막연히 길을 따라 이동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맥레인은 선두에 있던 시몬의 목소리에 다시 냉혹한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맥레인, 저 앞을 봐.”
그 말에 곧바로 마차에서 내려 선두로 이동하자, 시몬이 기다렸다는 듯 경직된 표정으로 앞쪽을 가리킨다.
그곳엔,
수많은 불빛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새끼들, 관문을 설치한 모양이야.”
포키스의 부재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극단적으로 시야가 좁아지는 바람에 저런 관문을 코앞에 와서야 알아차렸다니.
“날이 밝기 전에 유의미한 곳까지 도망치지 못하다면 우린 이대로 끝이야. 시몬, 우린 라티아에서 첫 단추부터 잘 못 끼웠어.”
맥레인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일갈하자 재키가 코웃음 쳤다.
“첫 단추를 잘 못 끼워? 그럼 이 금화는 뭔데? 세보진 않았지만 거의 10만 개는 될걸? 이게 어떻게 첫 단추를 잘 못 끼운 거라 볼 수 있지?!”
“그 10만 개나 되는 금화를 가지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을 쳐야 하는 상황에 빠지니 그렇지, 저 관문을 지나치려면 길이 아닌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이 마차를 끌고 어딜 가려고?”
다시 말싸움이 이어지려 했지만, 이번엔 시몬과 매튜가 채 말리기도 전에 둘이 먼저 지쳐 서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차라리 세브리의 불알 정도만 까버렸다면 이렇게까지 쫓기진 않았을 텐데.
세브리라는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만 있었다면 그놈과 빌어먹었던 작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나서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버렸어.
젠장.
맥레인은 품속에서 연초를 꺼내려다 멈칫하곤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야만 했다.
작은 불빛이라도 보였다간 괜히 지금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을 새들의 시야에 포착될 테니까.
“일단 여기서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보자, 최대한 완만한 쪽으로 이동하고 난 뒤에 생각해 보자고.”
결국, 그들 가운데 가장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매튜의 타이름에 모두가 암묵적인 동의를 해야만 했다.
이제 길 위에서도 위태롭게 굴러다니던 마차는 정형되지 않은 길 밖을 향해 나아간다.
* * *
천막을 불태우면서 덩달아 안에 있던 물건들도 거의 다 버린 터라 챙겨온 것이 거의 없었지만,
그나마 챙겨온 짐 속에 연고가 있어서 다행이다.
안나 아주머니의 것으로 보이는 그 연고는 촙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매튜 아저씨의 조치가 없었다면 이 연고도 별 도움이 되진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런 매튜 아저씨의 조치로도 촙의 부상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는 없었다.
매튜 아저씨가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해서 슬픈 소식은,
촙의 얼굴은 이제 예전 모습으론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무너진 광대뼈는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붙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평생을 일그러진 얼굴로 살아야겠지.
그걸 알면서도 촙은 내게 호쾌하게 웃어 보였다.
“웃지마, 아프잖아.”
“무법자면 아파 뒤지기 직전까지도 웃을 수 있어야지.”
그러나 무슨 상관이겠어.
그는 끝까지 촙일텐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차는 예전보다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앞칸을 가득 채운 금화 상자에선 짤랑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와 금방이라도 내 귓구멍에서 금화 하나 정돈 튀어나올 기세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는 갑자기 휘청거리며 멈췄다.
그리곤 짐칸 천막이 활짝 열리더니, 한껏 일그러진 얼굴을 한 맥레인이 내게 손짓했다.
“디안, 나와라.”
그의 부름에 서둘러 나가보니, 마차 바퀴 한쪽이 진흙에 보기 좋게 빠져있었다.
여긴 어디지.
하고 주위를 돌려보면 길이 아닌 언덕 한복판이라는 걸 알 수 있어.
“하나…둘…, 셋!”
맥레인의 신호에 맞춰 빠진 바퀴 쪽 부분을 있는 힘껏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끄떡도 하지 않자 시몬과 재키까지 달라붙어 한참을 씨름해야만 했다.
진창에 빠진 바퀴 하나를 구하는 데만 한 시간을 더 썼을까.
이에 맥레인은 다소 허무한 표정으로 시몬과 재키에게 말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날이 밝기 전에 탈출하기는커녕 이 언덕을 빠져나가는 데만 이틀이 걸리겠어.”
“그래서, 이 마차 버려? 이 한 대에 실린 금화만 오만 개야!”
돌아오는 건 재키의 비아냥과,
“이 언덕만 넘으면 돼, 그럼 활로가 열릴 거야.”
시몬의 확고한 의지만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매튜 아저씨조차 하는 수 없이 그 말을 듣고 맥레인을 설득시켜야만 했다.
어느덧,
날은 밝아오고.
눈 감은 별들의 수를 셀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쯤.
우리는 기어이 언덕을 넘었고, 그 너머로.
“하하! 봐! 내가 말했지, 활로가 열릴 거라고!”
빠져나갈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정 시몬의 말대로,
언덕 너머엔 비교적 평탄한 대지가 굵직한 강줄기를 낀 모습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흥분한 매튜 아저씨는 지도를 몇 번 보더니, 이곳을 가로지르기만 한다면 라티아는 물론이고 라이튼 국경도 능히 비껴갈 수 있다 말씀하셨다.
그렇게 마차에 속도가 붙자, 덩달아 내 마음도 아니, 우리 모두의 마음도 한시름 놓이기 시작했다.
* * *
관문은 제 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다.
다만 놀란 것은,
마차를 가지고 그렇게 빨리 언덕을 가로지를 줄은 몰랐던 거지.
덕분에 방금까지 여유로웠던 사냥감 몰이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원래 예상대로라면 놈들의 발목을 언덕에 묶어놓고 그 자리에서 일망타진할 계획이었는데 말이야.
“지드세 공, 이러다 진짜 우리 좆되면 어떻게 합니까?”
요함의 남작, 지드세는 에비송의 물음에 순간 역정을 낼 뻔했다.
같은 남작인데 어찌 저렇게 수준이 낮을 수가 있지?
솔직히 세브리의 수확제에 에비송이 직접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업의 재분배는 전부 자신에게 집중되었을 거다.
그런데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저 멍청한 작자와 지분을 나누게 생겼으니 이것만 해도 기가 막혀 죽겠는데,
“절대 좆되지 않습니다, 거 참! 진정 좀 하십시오.”
다 완성한 밥에 초를 치고 지랄이야, 지랄이.
거기다 세브리의 은밀한 수집품을 발견한 뒤부턴 그것을 써먹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통에 머릿속이 지긋지긋해질 정도다.
“에비송 공, 정황상 놈들의 마차엔 적지 않은 금화가 실려있을 텐데. 그 무기를 함부로 써서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귀한 화약을 엄청나게 소비해서 말입니다.”
“개업이란 건 말입니다, 그 시작이 창대하면 끝에선 더 창대해지는 법입니다. 이건 우리의 개업 기념을 위한 축포라고 생각하십시오!”
미친 새끼,
발정 난 돼지가 저무니, 화약에 진심인 또라이가 나타났구나.
“전방에 놈들이 보입니다.”
곧 기사 중 하나가 투구의 안면 덮개를 열고서 전방을 주시했다.
그런 그의 동공은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이는 그가 들고 있는 워해머에 걸린 열화된 인챈트 탓이었다.
그것은 아침의 파편을 모아 이어붙여 만든 백야.
그의 눈은 아직 해 뜨지 않은 어둠에서도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요함의 제1기사 답구나.
이걸 기억해 두었다가 일말의 지분이라도 더 가져가야 겠어.
지드세는 고삐를 놀리는 와중에도 그 생각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허나,
곧 그의 얼굴은 있는 그대로 일그러져야만 했다.
기사의 말을 전해 들은 에비송이 자신의 부대를 끌고 나가 마차에 실려있던 그것을 대뜸 저 멀리 있는 놈들에게 조준한 것이다.
* * *
“놈들의 깃발이 보이는데?!”
재키가 당황한 듯 말했지만, 시몬은 태연하게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자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늦었어, 놈들은 우릴 잡지 못해.”
그러나 맥레인의 표정이 곧 일변했다.
저 점점이 보이는 무리 가운데,
은빛으로 무언가가 번쩍하고 빛났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이런…, 씨발! 모두 엎드려!”
별안간 경악으로 물든 맥레인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파바바박!
마치 우레와 같은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픽!
픽!
이윽고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마차에 때려 박히고, 동시에 금화가 비 내리듯 사방으로 흩어진다.
매튜 아저씨가 미리 고정대를 풀지 않았다면 마차를 끌던 말들 역시 모조리 죽어버렸을 거다.
그보다, 저게…, 대체…,
파바바바박!
굉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 굉음으로부터 날아든 무수한 탄알은 금세 마차 두 대를 거적때기로 만들었다.
“맥레인!”
“조심해!”
“커흑…!”
비명에 가까운 대화가 서로 오가던 그 순간.
누군가의 단말마가…,
내 앞에 쏟아졌다.
그것은,
“에…엔…,”
엔제이.
부서진 마차의 틈바귀 사이에서 쏟아져 내린 그는 수십 발의 총알에 온몸이 찢긴 채 내 앞에 떨어졌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하고 숨이 끊어진 그의 피로 얼룩진 얼굴과 마주한 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 *
끝도 없이 불을 내뿜었다던 용, 커튜머트의 숨결을 흉내 내어 만들었다던 기관총이 이 시대까지 남아있었을 줄이야.
백색 모루 위에서 만들어진,
과거 난쟁이들이 이룬 과학의 정수가 아직도 녹슬지 않고 존재하고 있었구나!
단숨에 이 평야의 일부분을 지옥으로 바꿔버리다니.
어떻게… 해야…,
“젠장, 시몬. 매튜! 다들…”
“맥레인!!!”
마차 밑에 겨우 숨은 시몬의 괴성이 들려온다.
그는 피 흐르는 어깨를 쥐어 잡은 채 온몸으로 매튜와 재키를 감싸고 있었다.
“디안, 디안을 지켜! 맥레인!!”
그 말에 다시 시선을 옮겨 디안 쪽으로 향하자,
“어…,”
그곳엔 쓰러져 절명한 엔제이와,
그 앞으로 홀린 듯 나서는 디안의 모습이 보였다.
디안은,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은하 일부분을 집어삼킨, 늘 반짝였던 그의 눈은 우주라는 장막을 뒤집어쓴 듯 칠흑으로 변해 있었고.
그가 걷는 발밑은 검은 잉걸불이 피어오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맥레인은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방금 막 몸에 수 발의 총알을 맞았음에도 디안은 검을 번쩍 들어 올린다.
검날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푸른 기운이 너울댔고.
이내 그대로 검을 찍어 내리듯 휘두른다.
아,
그가 내리친 검의 궤적을 따라.
하늘이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