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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58화 (58/365)

58화. 수확 (20)

그것은 현자의 생생한 기억,

동시에 인챈트라는 단어가 가진 힘의 실체.

갈라진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하얀 바람 줄기는, 그 옛날 용의 시절.

산을 깎아냈던 소용돌이의 시작점이 분명했다.

87년 셀레어라는 과거의 재해가 용의 시대 이후인 지금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맥레인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인챈트의 힘을 받아들인 디안의 손에서 완벽한 재해가 구현되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인챈트 가운데 재해에 해당하는 힘들은 사용자에게 막중한 부담을 안긴다.

더군다나 그 힘을 일부라도 사용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감응기를 거쳐야만 하지.

이건,

인챈트의 힘을 다루는 자들이라면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진리’

해서 보통 셀레어와 같은 소용돌이라 하면 최소 반년의 감응기를 거쳐야만 그 소용돌이의 바람 줄기 ‘일부’를 빌려 무기에 실을 수 있게 된다.

이 반년이라는 시간도 디안이 가진 천부적인 재능을 감안해서 책정한 기간이라는 걸 생각하면.

지금 벌어진 상황은,

너무나,

너무나 비정상…, 아니 비현실적이야.

“디안!”

온 힘을 다해 디안을 불러보지만,

이미 갈라진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린 바람 줄기가 주위 모든 공기를 찢어발기기 시작했기에 고작 목소리 따위가 전달될 리 만무했다.

이렇듯 전개된 천지개벽에,

방금까지 신나게 손잡이를 돌려 용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던 적들도 당황한 듯 보였다.

하늘이 갈라진 직후 기관총이 내뿜던 우레와 같은 굉음이 들리지 않았으니까.

“아니…,”

잘못 생각했다.

기관총은 지금도 미친 듯이 총알을 퍼붓고 있었다.

단지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소용돌이가 그 기관총이 내뿜는 굉음마저 잡아먹은 것일 뿐.

어서 디안을 데려와야 해.

이미 소용돌이는 디안의 의지에 따라 나타났으니 이걸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지만,

그렇다고 지척에서 미적거렸다간 저 거대한 소용돌이의 밥이 되고 말 거니까.

“시몬!”

맥레인은 곧장 뒤돌아 목청껏 소리쳐 시몬을 부른다.

다행히 그런 맥레인의 호소가 닿았는지, 시몬이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그 역시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경이를 넘어 허무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망쳐! 최대한 떨어져! 매튜와 재키를 데리고 가!”

최대한 손을 휘저으며 반복해 소리치자, 그제야 시몬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맥레인의 눈엔 그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인지, 아니면 막연한 공포에 기인한 떨림이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그들의 유일한 엄폐물인 마차조차 덜덜거리며 소용돌이로 끌려가기 시작한다.

촙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촙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아니, 지금은 일단…,

“젠장, 디안!”

맥레인은 양팔로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디안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강대한 바람에 맞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지만 우직하게.

그리고 곧 살짝 벌어진 양팔 틈새 너머로,

디안의 모습을 확인한 맥레인은 초조함에 어금니를 꽉 씹어야만 했다.

마치 다 타들어 가는 초의 위태로운 심지처럼.

불현듯 나타난 검은 불꽃이 디안의 몸을 갉아 먹고 있었으니까.

대체,

너는 어떤 절박함에 쫓겼기에 그런 걸 품어야만 했는가?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건 너의 찬란함을 갉아먹는 과거의 저주일 뿐이야.

“디안!”

그러니까,

너로서 반짝여라, 찬란하게.

맥레인은 챙겨놨던 작은 나무패를 손에 쥐고 으스러트렸다.

그것은 열화된 인챈트.

만들어진 벼락.

순간 번뜩이는 빛이 맥레인의 전신을 타고 흘렀지만 앞서 말했듯, 그 힘을 온전히 받아내려는 행위는 곧 그만큼의 반동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

“…끄…윽…”

전신을 태우는 듯한 격통에 턱이 들릴 정도로 신음해야 했던 맥레인이었지만, 그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이윽고,

맥레인이 디안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동시에,

파박!

그의 등에 수 발의 총알이 박힌다.

하지만 맥레인의 장대한 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양손을 들어 디안의 어깨를 굳세게 잡을 뿐.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나지막이 내뱉은 말을 끝으로, 맥레인은 온 힘을 다해 디안을 뒤로 밀었다.

* * *

차가운 물살이 내 몸을 훑자,

분노를 장작 삼아 이죽거리던 뜨거움이 일거에 죽어버렸다.

어두웠던 시야는 덩달아 밝아지고,

식은 새벽녘, 얼마 남지 않은 별빛들이 내 의식을 두들긴다.

“허억…!”

끈적한 무의식의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든 나는 이제야 맑은 정신으로 모든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허억…허억…!”

나는,

물에 빠진 건가.

급격하게 불어난 물살에 쓸려가고 있구나.

계속해서 입술을 꿰뚫고 밀려 들어오는 물이 목구멍을 막는 터라 고통스럽다.

계속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밀려 들어오는 물을 게워내지만, 여의치가 않아.

그보다,

“맥레…허억!”

차려진 의식의 시발점에 맥레인은 분명 나와 마주 서 있었지.

그 모습이 뇌리에 박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해서 그를 찾아야만 해.

“맥레인!”

물길에 휩쓸려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도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바쁘게 눈을 굴려 감색 물감으로만 그려진 풍경을 이 잡듯 뒤져보지만,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도 없다.

“맥레인…!!”

좀 더 목청껏 그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이번엔 온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나를 괴롭혔다.

덕분에 그대로 물에 빠져 질식할 뻔했지만,

직전의 순간.

나는 감색의 풍경 사이를 꿰뚫고 들어오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틀림없는 맥레인이다.

확신이 주어진 순간 온몸을 옥죄던 고통이 증발해버렸다.

미친 듯이 물살을 거슬러 그에게로 향하려 했지만, 한낱 손짓으로 거스르기엔 불어난 물살의 몸집이 너무나 거대하구나.

해서 이번엔 허리에 매어져 있던 검집을 떼어 여기저기로 막 휘둘러댔다.

제발 뭐라도 걸리길 빌면서.

그 바람이 있고 몇 초가 지났을까.

기적적으로 무너져 내린 나무에 검집이 보기 좋게 걸렸고, 나는 그대로 밀려 내려오는 맥레인을 잡아챌 수 있었다.

“맥레인, 정신 차려요!”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의식이 떠난 몸은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

육중한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검집이 부서지고, 그대로 그와 함께 떠내려가는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나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 허리띠를 풀어 그의 몸과 내 한쪽 팔을 한데 묶어 고정했다.

그렇게 단단히 고정이 끝난 그 순간,

퍽!

뒤쪽에 고여있던 토사에 부딪혀 의식이 날아가 버렸다.

* * *

정신을 차렸을 땐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니,

그리 오래 기절하지도 않았으니 지금은 시간상 아침이어야만 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둘러보던 나는 이윽고 어느 한 곳에 멈춰야만 했다.

저 멀리,

하늘을 뚫고 내려온 거대한 소용돌이가 보인다.

그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이 자리에서도 빨려 들어가는 기류가 느껴질 정도야.

두 개의 산을 깎은 소용돌이.

과연 말 그대로 엄청난 재해로구나.

진정 저 소용돌이가 내 손에서 나왔단 말인가.

아니, 내 손이 아니라.

내가 집어먹은 분노에 대한, 내 몸 안에 있는 무언가의 대답이겠지.

무섭고 두렵다.

내 몸 안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게 아니라,

이러한 날 일깨워주던 사람을 영영 잃어버릴까 봐.

“맥레인, 조금만 기다려요.”

그의 상체를 부둥켜안은 채 강줄기에서 최대한 벗어난 나는 직후 조심스럽게 그를 눕혔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상황에 대한 답이 있긴 한 걸까.

아니, 이럴 때일수록 작은 것 하나까지 악착을 부려야지.

나는 서둘러 강줄기 쪽으로 달려나갔다.

의식을 차렸을 때 우리는 토사와 함께 이 부근에 고여있었지.

아니나 다를까, 고여있는 토사 속에서 반짝거리는 금화가 몇 보였다.

귀 큰 자들이든, 난쟁이든, 사람이든.

후일은 모르는 법이니 몇 개 챙겨놔야겠어.

두 손으로 진흙을 푸며 금화 열 개 정도를 주웠을까.

87년 셀레어.

기어이 날 떠나지 않을 작정이로구나.

진흙 속, 빛을 잃지 않고 유유히 빛나는 날 일부를 확인한 나는 얼른 그것을 뽑아 들었다.

차라리 잘 됐어,

맥레인의 품에 부싯돌이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어떻게든 이걸 가지고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 거야.

생각해 보니 그 잠깐 기절한 사이에 내 몸에 있었던 상처들은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예전엔 그 이질감이 신비하기만 느껴졌었는데, 지금에 와선 이것마저도 두렵게만 느껴진다.

정작 날 지켜준 맥레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그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내 몸의 괴리가 역겹고 고통스러워.

그렇게 씁쓸함을 껴안고서 맥레인에게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번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내 발길을 돌렸다.

푸르륵!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엔,

“벤투스?”

맥레인의 말.

그 늙은 말이 건너편에 서서 멀뚱멀뚱 날 지켜보고 있다.

괜히 맥레인의 길잡이가 아니로구나, 이곳까지 우릴 찾아온 거야. 이 영특한 놈!

그저 말 한 마리 봤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눈물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벤투스! 맥레인을 찾아온 거니?! 넌 무사한 거야?”

푸릉!

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씩씩하게 물을 건너기 시작한 녀석은 비록 그 기세가 죽었다곤 하나, 사나운 물살을 거슬러 대번에 이곳까지 건너왔다.

다행이야, 벤투스의 안장엔 맥레인의 짐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여기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활용한다면, 정말 맥레인의 부상을 내가 봐줄 수 있을 거야.

“가자, 벤투스, 어서…!”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벤투스는 도톰한 입으로 내 옷깃을 물곤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짐승과의 교감은 만감을 낳는다는데,

영물과의 교감은 유대를 만드는 것 같아.

맥레인에게 도착한 나는 얼른 그의 안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냈다.

그 과정에서 양손이 그의 피로 물들었지만 개의치 않는다.

부싯돌은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졌는지 유일하게 물에 젖지 않았고, 덕분에 난 어렵지 않게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지금부터야.

“제발, 제발.”

조심스럽게 피로 범벅이 된 그의 상의를 뜯어낸 나는 드디어 악마의 잇자국 같은 환부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대체…,”

양팔에 새겨진 듯한 이 흉터는 뭐지?

마치 자를 대고 인위적으로 그어낸 것 같은…, 상당히 오래된 흉터다.

그 괴이한 흉터에 한참이나 시선을 빼앗기고 있으니, 벤투스는 곧바로 내 등에 머리를 들이받아 흐트러진 집중력을 환기시켰다.

그럼, 맥레인 부디.

견뎌요, 제발.

* * *

조이 크레비디.

그는 방금 있었던 기사들의 모임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하나 접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진정 자기가 두 귀로 들은 이야기들이 사실일까?

경직된 표정을 감출 수 없을 만큼 당황한 그의 모습에, 그를 종자로 부리고 있던 기사가 상냥한 말투로 묻는다.

“시드리,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게냐?”

“중립지역에 일이 터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아직까진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일개 지주 하나와 인근 영지의 남작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일 뿐이니까.”

그럴 리가.

조이는 촉이 좋은 편이다.

애초에 그 좋은 촉 덕에 지금 천연스러운 가면을 쓰고 저자의 종자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분명 가족들과 관련된 일이야.

“소인 오늘 몸이 좋지 않은 와중, 가뜩이나 참담한 소식을 접하게 되어 더욱 쇠약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먼저 들어가서 쉬게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일까진 아프지 말게, 자네만큼 내 갑주를 말끔히 정비해주는 사람은 없거든.”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제 조이는 서둘러 고삐를 당겨 은닉처로 향했다.

이미 일전에 세브리 측과 접촉한다는 전서구를 가족으로부터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일을 벌이기 직전, 아엘라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었지.

향후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말이야.

역시나,

은닉처에 도달하니 아엘라가 보낸 새가 새장 안에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새를 붙잡아 발에 매달린 쪽지를 확인한 조이는,

그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넋을 잃고선 한동안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라티아 인근에서 발생한 소용돌이가 남하하여 세브리의 영지는 물론 라티아 일부를 문자 그대로 없애버렸어요. 그 과정에서 죽은 남작만 셋이 넘는데, 정확한 내용은 아직 몰라요. 저도 정보를 전달받자마자 당신에게 보낸 거예요. 우리 가족들은…, 글쎄요.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어요. 매튜 아저씨가 항상 잊지 않고 주마다 보내주셨는데…, 만약 무슨 소식이라도 있으면 제게 꼭 알려 주셔야 해요, 알겠죠? 조이, 이제 곧 중립지역이 크게 요동칠 거예요.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우리도 단단히 대비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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