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고비
용의 시대를 주름잡던 무기에 대한 것은 잘 모른다.
다만 그 무기들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제 잘 알지.
볼스피티의 딱딱한 도감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구세대의 무기가 제아무리 시대적 파급을 몰고 온 대단한 것이라 해도,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의 무기를 넘어설 수는 없다고.
전적으로 그 말에 동의한다.
실제로 인챈트라는 힘이 용의 시대를 주름잡던 무기를 집어삼켰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소용돌이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잘근잘근 씹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구세대와 현세대의 무기에 격차를 나누고자 하는 게 아니다.
격차가 존재할지언정,
구세대와 현세대 무기의 충돌은 서로를 무너트리는 결과만을 낳는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그 격차가 무색하게 말이야.
이기는 건 무기이지, 그걸 든 자가 아니잖아.
사흘이 지났다.
맥레인은 아직도 의식을 잃은 상태다.
다만, 내 처치가 꽤 성공적이었는지 요즘은 부쩍 고른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네 발의 총알을 빼냈고, 벤투스의 안장주머니에 있던 약초를 씹어 바른 게 다인데.
그것만으로도 맥레인의 육체는 경이로운 강인함으로 빠르게 회복해 주었다.
그렇게 고비를 한차례 넘기는가 싶었지만,
이번엔 전혀 예상치 못한 고비가 내게 찾아왔다.
인챈트의 힘을 무리해서 발휘한 대가가 뒤늦게 내 몸을 괴롭히기 시작한 거다.
첫날엔 피를 토했다.
다음날 그것이 회복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빨이 모두 빠져버렸고.
다음날 그마저 회복이 되자 이번엔 심한 고열과 복통에 시달려야 했다.
인챈트를 받아들이면서 내 몸에 들어온 어떤 기류 같은 것이 미쳐 날뛰는 느낌.
자연적인 순환을 거스른 책임을 묻듯이 지금도 내 속은 진창이다.
하지만 다음 날이 밝으면 이마저도 휘발하듯 사라지겠지.
아이러니하게도, 사흘간 날 괴롭히고 있는 이 고통은 오히려 내 살아있음의 증거 같은 것이었다.
의식이 무저갱에 빠져버린 맥레인과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던 내게 이 고통은 잠시나마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거든.
그런데 이제 슬슬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조차 초조하게만 느껴진다.
사흘이다.
무려 사흘 동안이나 숲에 표류해 있었어.
물은 어떻게든 해결할 순 있었지만, 허기는 쉽사리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진 내 몸을 옥죄는 고통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굶어 죽을 거다.
더군다나 맥레인이 의식을 회복한다고 해도, 그 역시 오랫동안 굶주렸기 때문에 원기를 회복할 무언가가 있어야 할 거야.
내가 나서야 해.
끓어오르는 고통을 참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맥레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벤투스가 고개를 쳐들고 나를 말똥말똥 쳐다본다.
“벤투스, 그때 먹었던 생무 기억나? 네가 뺏어 먹은 마지막 한입이 지금에 와서야 생각나네.”
이 고통을 끌어안고 사냥을 하는 건 무리다, 나무에 맺힌 과실을 따기도 힘들어.
그러면, 땅에서 뭐라도 찾아봐야겠지.
크게 마음먹고 달달 떨리는 몸을 기세 좋게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격통에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야만 했다.
* * *
축축한 무언가가 내 볼에 닿는다.
이따금 내 이마엔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살짝,
눈을 뜨자 눈꺼풀 위에 쌓여있던 맑은 햇살이 밀려 들어온다.
하루 동안 기절해있었던 건가.
고통은,
역시 지워진 얼룩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행히도 인챈트의 후유증이 나흘까지 이어지진 않았구나.
어렵지 않게 상체를 일으킨 나는 힘없이 나무에 몸을 기대어 누웠다.
맥레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눕혔던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있구나.
“벤투스, 네가 날 깨운 거니.”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벤투스에게 묻자, 녀석은 큰 앞니를 드러내며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곤 앞발로 땅을 치대더니 난데없이 유려한 몸짓으로 뒷걸음질 치는데,
녀석이 물러난 자리에 생무와 야생 당근이 쌓여있는 게 아닌가.
“벤투스…?”
설마 네가 직접 뽑아와 가져다준 거냐?
빛바랜 잿빛 털을 가진 늙은 말의 호의에 나는 손을 내밀어 녀석의 이마를 쓰다듬는 것으로 고마움을 답했다.
“네 덕에 살았어, 벤투스.”
히힝!
내 감사 인사를 알아들었는지, 성난 울음소리와 함께 마치 웃는 듯한 입 모양으로 고개를 격하게 흔드는 녀석.
일단은 내 몸에 일어난 기근부터 해결하자.
오독.
흙 묻은 생무를 대충 손으로 털기 무섭게 입안으로 가져갔다.
아무래도,
이 순간 입안에 느껴지는 이 맛만큼은 평생토록 못 잊을 것 같네.
그렇게 우물우물 씹고 나서 크게 꿀꺽 삼키니까.
되려 무거운 무언가가 목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건 허탈함.
세월에 빗대어 보면 얄팍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내겐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상실.
슬픔.
다음 한 입은 눈물과 콧물까지 꾸역꾸역 삼켜야만 했다.
* * *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불에 타지 않는 나무껍질이 있다는 걸.
장작을 구해 모닥불을 만들면서 알게 된 거다.
그렇담 이 나무껍질을 냄비로 쓰면 되겠어.
허겁지겁 털어 넣은 생무와 함께, 복잡한 감정은 모두 씹어 소화 시켰다.
덕분에 허기를 채울 수 있었고 메마른 이성을 총명으로 새로이 적실 수 있었다.
벤투스의 안장 가방에서 꺼낸 기름으로 셀레어의 목마름까지 해갈시킨 나는 본격적으로 사냥을 준비했다.
관련된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미 수많은 노래 가사와 이야기를 통해 ‘사냥감’과 ‘토벌의 대상’은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
이건 짐승과 괴물을 분류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매튜 아저씨도 따지고 보면 괴물을 사냥하는 쪽이었지만, 그 대상은 짐승과 괴물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있는 쪽이었기에 확실히 토벌이라곤 할 수 없지.
애초에 매튜 아저씨도 대부분 ‘퇴치’를 목적으로 움직였다고 하셨으니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짐승의 고기다.
도축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어떻게든 될 거야.
아니, 일단은 뭐라도 잡고 나서 생각하자.
우선 상식적으로 사냥의 기본은 던져 잡는 것이니까, 날카로운 나무 막대나 돌멩이를 모아야겠어.
셀레어를 이용한 사냥은 애초에 그 힘을 완벽히 이해하지도 못해 위험부담이 크다. 어제까지 생생하게 겪은 후유증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사용을 지양해야겠지.
또 활은 만드는 방법도 모를뿐더러, 만드는 데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 도달할 시행착오에 소모될 시간이 너무 아까워.
지금은 한가하게 더 나은 환경을 구축하는 데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니까.
목표는,
적당한 크기의 짐승을 사냥해 식량을 비축한 뒤 이 숲을 빠져나가는 것.
마을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맥레인의 치료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거다.
자,
이렇듯 판단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시간이 넘도록 숲 인근을 돌아다녔다.
그 결과로 짐승 가죽은 무리 없이 뚫을 정도로 날카로운 나무 막대가 세 개.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 수십.
혹시 몰라 작은 설치류를 잡을 덫도 만들었다.
미끼는 걸쭉한 과즙이 우러나온 익힌 당근과 생무.
벼락이라도 우연히 떨어지지 않는 이상 놈들이 맛볼 수 없는 아주 달콤한 미끼일 테지.
“벤투스, 내가 다녀올 동안 맥레인을 잘 지켜줘.”
마무리로 기다란 나뭇잎을 엮어 만든 깔판 위에 맥레인을 눕혀놓은 나는 이어 그 깔판과 벤투스의 안장을 튼튼하게 연결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맥레인을 데리고 어디든 도망쳐, 내가 무조건 따라갈 테니까.”
남들은 어두운 밤에 길을 잃는다지만,
반대로 나는 밤이 되면 비로소 별자리라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지도가 펼쳐지니까.
벤투스 정도의 영특함이라면 내가 볼 수 있는 흔적을 남겨 줄 거고, 그걸 토대로 밤새 추격을 하면 찾는 건 시간문제다.
이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듯한 벤투스를 뒤로 한 채 나는 숲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두 번의 고비를 넘긴 지금,
마주 오는 한 번의 고비가 대수겠는가.
* * *
베빌리는 귀 큰 자다.
아니, 정확히는 귀쟁이었다.
인간들을 위해 일했던 그는 항상 귀 큰 자의 멸칭인 귀쟁이로 불려왔으니까.
같은 귀 큰 자들이 아니고서야 인간들에게 존중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더군다나 베빌리는 ‘숲 잃은 자’
중립지역 인근, 인간의 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잃은 그는 같은 종족들 사이에서도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사색이 되어 숲을 헤매고 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듯이.
사실 베빌리는 지금 목숨을 건 도망을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일하던 인간들로부터?
아니,
그런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괴물로부터.
베빌리는 원정대의 숲 안내자였다.
숲을 읽고 괴물을 추적하는 길라잡이.
사건은 단순했다.
여느 날과 다를 거 없이 의뢰를 받은 원정대를 끌고 숲에 들어왔는데, 그 의뢰 목표가 생각보다 더한 괴물이었고.
전투라는 것이 성립되기도 전에 괴물에게 원정대가 모조리 찢겨버린 거다.
거기에 더해 자극을 받은 괴물이 도망치는 베빌리를 따라 지금까지 쫓는 상황인 거지.
한마디로,
“씨발…, 살려줘.”
베빌리는 지금 좆된 상황인 거다.
베빌리는 불과 몇십 분 전 보았던, 그 뇌리에 박힌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 괴물이 한 인간의 머리와 발끝을 잡고 뜯어버린 장면을 말이야.
무슨 손질 된 정어리 마냥, 내장을 쏟아낸 시체는 양손에 들려 너덜거렸지.
심지어 베빌리를 더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원정대에게 세 달간 밀린 돈도 받지 못했다는 거다.
뒤져도 돈이라도 쥐어보고 뒤진다면 여명의 별 아래 저승으로 건너는 뱃삯이라도 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으면 진짜로 손질된 정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인생이잖아.
억울해서라도 살아야지.
그 악착으로 베빌리는 지금까지 용케 버틴 거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발목이 그래비스 뿌리로 만든 족쇄가 걸린 듯 무겁구나.
결국엔 거친 숨을 몰아쉬던 베빌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야만 했다.
틀렸다.
차라리 놈의 손에 무참히 죽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그 생각으로 품에 있던 작은 단검을 꺼내 목에 겨눈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에 맞춰,
저 먼 곳에서부터 마치 산사태와 같은 거대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니, 그녀에게 고백이라도 해볼걸.”
그녀도 날 좋아하는 눈치였는데,
로니, 대단한 엉덩이를 가졌었지.
덜컥 눈물이 나온다, 이제 단검은 턱밑에 닿아 있다.
하지만 생각 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단검에 닿은 턱으로부터 느껴지는 따끔거림조차 무서워 죽겠거든.
이윽고 베빌리는 힘 풀린 손으로 단검을 놓친 채, 오줌을 지리며 두 눈을 떴다.
그의 앞엔,
적어도 그보다 세 배 이상 큰 키를 가진 거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즐거운 사냥을 목전에 둔 것처럼, 음흉한 시선으로 이끼 덮인 턱을 움찔거리는 놈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야만적인 숲 거인은 이제 집게 손으로 베빌리의 발을 잡고 들어 올렸다.
“아아악! 아악!”
발을 잡혀 거꾸로 매달린 베빌리는 두려움에 떨며 비명을 질러댔고, 거인은 그것을 음미하듯 천천히 입을 벌렸다.
불규칙 적인 치열 사이에 껴 있는 인간이었던 것들의 흔적.
이제 그 위로 자신의 육신이 찌꺼기가 되어 쌓일 테지.
압도적인 두려움, 그에 상응하는 악취에 잡아먹힌 베빌리의 동공이 풀린다.
하지만,
그 두꺼운 입술 사이로 얼굴이 들어가기 직전.
베빌리는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져 땅 위를 나뒹굴었다.
그어억!
깊은 동굴의 천장이 무너져내린 듯, 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자기 볼에 꽂힌 나무 막대를 감싸 쥐고서 발광했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베빌리는 이내 괴물과 마주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산신인가, 아니면 형상화된 정령?
모습을 보아하니 한 지대를 관장하는 정령왕이 아닐까?
곧이어 거인이 남자가 있는 쪽으로 주먹을 내리쳤지만, 괴물의 주먹은 손목째 잘려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마치 자신이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이어 절단된 팔 쪽 옆구리를 파고든 남자는 등에 들쳐 매고 있던 나무 막대 하나를 정확히 겨드랑이에 던져 박아 넣고는 재빨리 가진 검으로 은빛을 토해내며 발목 심줄을 잘라버렸다.
이제 중심을 잃고 넘어진 거인 위로 올라탄 그는 망설임 없이 검으로 등을 꿰어 심장을 찔렀다.
원정대 하나를 끝장냈던 그 무시무시한 괴물은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맥없이 죽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