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안내자
원정대로 치면 최소 별자리 급.
용병으로 치면 개인으로 활동하는 엔트로피.
깃발을 가진 자라면 못해도 친위 기사.
혹,
형상을 가진 정령인 지대의 수호신일 수도.
용모를 보면 혼혈종인 ‘유배자’인 것 같기도 한데.
그것도 부모 중 하나 이상이 귀족에 해당하는 진한 피를 이어받은 유배자.
어쨌든, 난 평생을 살면서 저렇게 싸우는 존재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역사가 없는 인생이기도 하고.
그런데 웬걸,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 버렸어.
하늘에서 바위만 한 이정표가 내 막다른 길 앞에 떨어져 새로운 길을 제시하듯 말이야.
“괜찮습니까.”
그는 롱소드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제법 반가운 얼굴로 내게 안부를 물었다.
그럼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난 이미 저 괴물의 이빨에 낀 찌꺼기가 됐을걸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마로 땅을 두들기며 연신 그에게 넙죽 엎드려 절했다.
아직도 가시지 못한 공포에 두 다리가 저렸지만 그게 대수냐, 이 순간 내게 있어 그는 사슴 신 이상의 존재이거늘.
“다행입니다. 이 숲에서 당신을 만난 게.”
그런데 그런 그가 오히려 날 만나서 다행이란다.
뭐지, 사실 나는 이미 죽은 건가?
블레미스의 유명한 소설인 ‘전이’의 주인공처럼, 내가 이세계로 환생한 거야.
저 대단한 분을 모시는 종자로 말이지.
나도 알아, 이게 얼마나 같잖은 개소리인지를.
그런데 상식을 벗어난 특별한 상황에서 상식을 찾는 게 더 멍청한 짓이 아닐까?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비현실에 가까울 지경이라 나는 한 번 더 의심할 수밖에.
진짜 이미 뒤져서 이세계 전생이라도 한 건지 말이야.
아니, 이건 현실일 거다.
바지에 지린 오줌 냄새가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야.
난 얼른 그의 손을 넙죽 잡았다.
그러자 그는 있는 힘껏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저는 원정대의 길라잡이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 괴물에게 모두 당했고 저 혼자 남은 상황이었죠.”
남쪽에 갑자기 나타난 기상 현상에 괴물들이 도망치듯 북쪽으로 올라왔었지.
그중 제일 만만한 상대인 거인을 골라 왔는데 역으로 당해버릴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아차, 제일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네.
“저는 베빌리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겠군요,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디안이라고 합니다.”
디안이라, 혓바닥에 단어가 착착 붙는 게 신분이 높으신 분이 확실한 것 같은데.
거기다 산 거인의 피부를 두부 자르듯 썰어버린 저 범상치 않은 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하지.
“베빌리,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눈 깜빡이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즉답해버렸다.
그런 내 기세에 그는 살짝 놀란 눈치로 날 빤히 쳐다본다.
“마을을 찾고 있는데, 보시다시피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이라서요. 저희를 숲 밖으로 안내해주실 수 있습니까?”
알았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이었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제 목숨값에 비하면 하찮은 일입니다. 저희라고 하신 것을 보니 일행이 있으신 것 같은데 어서 이동합시다.”
“좋습니다.”
그가 원할 것 같은 대답만 골라 했더니, 제법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시는구나.
* * *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수확을 얻었다.
이런 곳에서 두 발 걷는 자를 만날 줄이야.
심지어 원정대의 길라잡이라니.
물론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더라면 그 대신 그를 소화하고 있었을 거인과 마주쳤을 테지.
그렇게 되면 원하는 사냥은커녕 놈과 싸우는 데에 시간만 낭비했을 거다.
결정적으로 그를 만날 기회도 잃어버렸을 거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직전에 괴물을 저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괴물이 인간의 모습과 흡사해서 다행이야, 덕분에 수월하게 처치할 수 있었어.
사실 이 모든 게 셀레어가 없었다면 성립할 수 없는 얘기다.
그 진흙더미를 좀 더 퍼내지 못했다면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기구하지.
그렇게 대화를 끝낸 직후 나는 베빌리를 이끌고 곧바로 맥레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맥레인과 그를 지키고 있던 벤투스는 그 자리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빌리는 맥레인의 상태를 보곤 구태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안장에 연결한 깔개를 더욱 단단하게 고정하곤 숲 밖을 향할 길 안내를 준비할 뿐.
그는 눈치도 빠르고 행동도 빨랐다.
툭 튀어나온 코, 부라리는 듯 강렬한 눈매.
솟은 광대와 얇은 입술, 짙은 눈썹, 갈색 곱슬머리.
그리고 끝이 뾰족하게 솟구친 귀.
전체적인 인상이 시원시원한 그는 하는 일과 행동도 시원시원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의 기조는 그의 목숨값을 내가 지불했기 때문이겠지.
대가를 지불하라.
중립지역 절대불변의 법칙을 따르는 것일 수도 있기에 안내가 끝났을 때도 그의 태도가 한결같으리란 보장은 없어.
해서 경계를 거두진 않을 거다.
“디안님, 아니 공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그냥 디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내 대답에 베빌리는 순간 심히 고민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혓바닥에 무례가 묻는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다면 디안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게 편하시다면요.”
“우선 첫 번째로…,”
역시나 뭔갈 요구하려는 걸까?
아니, 베빌리는 가는 길을 잠깐 멈추고 내게 양해를 구하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바지에 오줌을 지려서요, 디안님의 체면을 구길까 미리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아하.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윽고 뜸을 들이던 베빌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한시가 급하실 테지만, 제게 10분만 허락해 주신다면 좋은 걸 드리겠습니다.”
“거절할 필요는 없겠죠,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베빌리는 막 지나치려던 거인의 시체로 다가가 잘린 심줄에 거침없이 단검을 박아 넣었다.
“거인의 피는 한 번 끓이면 훌륭한 벌레 퇴치제가 되고 두 번 끓이면 양질의 기름을 채취할 수 있거든요. 이게 수요가 많아 제법 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 원정대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저것일 테지.
베빌리는 품에서 꺼낸 작은 양철통에 흐르는 피를 담아냈다. 물론 그 양이 많다곤 할 수 없어서 나도 벤투스의 안장에서 맥레인의 것으로 보이는 빈 유리병들을 모아 거들었다.
가족이 언제 다시 모일지 모르니 동떨어진 환경에서 자생하는 법을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해.
“원정대 규모였다면 놈의 피를 싹 빼고 해체 작업까지 들어갔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알짜배기만이라도 쏙 빼 먹어야지요.”
베빌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단숨에 거인의 등위로 올라섰다.
방금까지 공포의 대상이었을 텐데, 지금은 반짝거리는 보석을 보는 듯한 눈빛이구나.
아마도 지금 보는 저 광경은 그쪽 업계를 대변하는 장면이리라.
그는 곧장 단검을 가지고 거인의 목 뒤 가죽을 깔끔하게 벗겨내었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자니, 베빌리는 또 눈치를 보다가 대뜸 큰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 부분의 가죽이 바로 거인의 핵심입니다. 만에 하나 이렇게 또 거인과 마주치게 되는 상황에 놓이신다면 절대로 잊지 마세요.”
“그게 거인에게 얻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겁니까?”
“원정대에 연금술사가 껴 있다면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걸 얻을 순 있겠지만, 그만큼 그들에게 줘야 하는 지분이 커지니… 네,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중엔 이게 최고일 겁니다.”
거인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린 베빌리는 깔끔하게 거둔 가죽을 돌돌 말아 내게 선뜻 건넸다.
“받아주십시오, 디안님. 길 안내만으론 제 목숨값을 다 못 냅니다.”
내 예상과는 달리,
그도 그 나름대로 내가 지불한 목숨값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구나.
“그럼 잘 받겠습니다.”
“마을로 내려가시게 된다면 그 가죽으로 검집이나 장갑을 만드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 한눈에 봐도 날카로워 보이는 검을 그렇게 노출하고 다니시다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조언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이동하는 겁니까?”
“네, 볼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디안님의 일행분을 위해서라도 지금부터는 무른 길로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 * *
베빌리는 바닥에 누워 이동하는 맥레인을 고려해 완만한 길만을 골라 숲을 가로질렀다.
아니, 숲을 타고 다녔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그는 정말 능숙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숲길을 읽지 못하는 나조차도 그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가 가진 재주는 정말 탐나는 것이었다.
기회가 닿아 저런 재주를 익히게 된다면 능히 여러 방면으로 도움이 되겠어.
“디안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제 얘기를 좀 해드려도 될까요?”
슬슬 숲의 끝자락에 도달한 것 같았을 때, 베빌리가 선뜻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재잘대는 잎사귀에 질리던 차였는데 잘 됐군요.”
그게 또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알고 있던 가사를 빌려 대답하니 그의 두 눈이 반짝인다.
“저는 홀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어머니께 얹혀사는 거지만요. 깨나 강인하신 분이거든요.”
“가족과 함께라니, 좋군요.”
“다름이 아니라 만약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저의 집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선 무두질에 일가견이 있으시기도 하고, 많은 종류의 연고와 약도 취급하시거든요.”
솔깃한 제안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그 호의까지도 목숨값에 포함되어있는 겁니까?”
* * *
목숨 걸고 얘기했으니 지금부터는 진실만을 이야기해야지.
“아니요,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진지한 내 대답에 디안님께선 묵묵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세한 내용이라도 들어봅시다.”
다행히도 디안님께선 일단 내 이야기를 듣고자 하셨다.
그러한 언행 자체가 너무나 우아하고 정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을 뻔했다.
이러니 더 절박해진다.
“사실, 저는 이대로 살아 돌아가도 큰 문제입니다.”
“어째서죠?”
“원정대의 길라잡이가 홀로 살아 돌아온다면 그의 남은 동료들이 절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래,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원정대의 길라잡이는 본디 직업의 특성상 원정대와 그 운명을 같이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목표물에 정확히 길을 안내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정대가 목표물에 전멸당했고, 또 하필이면 길라잡이만이 살아남았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살아 돌아가봤자 사기꾼이 아니면 살인마로 낙인찍혀 마을에서 당장이라도 추방당할 거다.
심하면 원정대의 동료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르지.
정말 웃기지, 난 원정대에게 석 달 동안 봉급도 밀려서 허덕이고 있는데 그들의 죽음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위협에 시달린다는 게.
물론 내가 그들에게 있어서 하찮은 귀쟁이에 불과하기에 더 박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인 길라잡이들에겐 좀 더 너그러운 경향이 있거든.
좆같은 종족차별 같으니.
하지만 지금부터는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디안님, 부디 제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원정대의 죽음이 제 생존과 무관하다는 것을요.”
디안님과 같은 분이 내 증인으로 나서만 준다면, 그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되게 결과주의적인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저런 용모를 가진 이의 증언을 누가 못 믿겠는가?
아마 여물 씹던 소들도 설득당할걸.
“그래서 어머님 얘기를 하셨던 거로군요, 이 가죽으로 만들어질 물건과 제 일행의 치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말이죠. 맞습니까?”
찰떡같이 알아들은 디안님이 눈 안에 들어있는 은하를 번쩍이며 답하셨다.
“맞습니다. 제가 요구한 것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값어치겠지만 그 정도로 제가 절박합니다.”
디안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 더 추가하겠습니다.”
그래, 거래 내용이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는 것이었지.
더군다나 내 생명의 은인인 그가 느끼기에 더욱 박한 거래였을 지도 몰라.
“들어보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저는 디안님께 그렇게 많은 걸 드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디안님은 곧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베빌리, 당신이 가진 지식을 제게 가르쳐 준다면 앞서 말한 조건들을 모두 수용하겠습니다.”
그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낙엽을 골라보는 법, 숲을 타는 법, 그리고 죽은 거인을 보석 보듯이 하는 그 눈빛 모두 말입니다.”
“디안님…,”
“어떻습니까, 거래하시겠습니까?”
엉엉 날 가져요.
“당연…, 아니 무조건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