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61화 (61/365)

61화. 귀쟁이 베빌리

베빌리는 거래 외적으론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아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쓰러져 있는 자는 또 누구고 나와는 무슨 관계인지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나와 맥레인이 도망치다 떠내려온 무법자인 걸 알았어도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을 테지.

그에게 있어서 나는 구원의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거든.

반대로 나도 그에게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미 서로가 이치에 맞물리는 퍼즐이 되었는데, 구태여 떼어내어 이리저리 돌려 껴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그가 원하는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기만 하면 될 뿐이고, 그는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열심히 반주를 연주하면 될 뿐이야.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가장 급한 사안은 단연 맥레인이다.

내 조치가 진정 효과적이었는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 건 아닌지.

그조차도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까지고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시 한번 느끼는 건데 베빌리를 만난 것은 진정 천운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게 이동하기를 몇 시간,

숲에 잘게 쪼개졌던 햇살이 내 몸을 덮을 정도로 커졌구나.

아, 이내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거대해진 햇빛 너머로.

평야가 보인다.

“디안님, 이곳부터는 바르기얀 평야입니다.”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베빌리가 의기양양한 미소로 날 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반나절을 이동하면 거대한 라티아가 나오지요. 하지만 인근에 난데없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나는 바람에 아주 난리가 났을 겁니다.”

소용돌이의 여파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클 수도 있겠는걸.

과연 맥레인의 말대로 무시무시한 힘이야.

87년 셀레어.

용의 시대를 수놓았던 일개 재해가 이 정도라니.

그렇다면 대체 그보다 적은 숫자를 가진 인챈트는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밤 별들을 품은 내 머리로 암만 상상해봐도 떠올려지지도 않는다.

“베빌리, 바로 당신 집으로 갑시다. 일행의 조치가 급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이동하시지요.”

* * *

“어머니! 저 왔습니다.”

거대한 그루터기 아래, 드러난 뿌리를 기둥 삼아 빈틈을 벽돌로 메꿔 지은 집.

그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던 베빌리가 가지로 겹겹이 엉켜있는 문 앞에 멈춰 서더니 품에서 작은 잎사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머니! 어디 나가셨나?”

제법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기웃거리던 베빌리는 얼른 드러난 문구멍에 꺼낸 나뭇잎을 집어넣는다.

그러자 문을 겹겹이 감싸던 가지가 진흙을 기는 지렁이처럼 스멀스멀 움직이며 문으로부터 비켜 섰다.

이어 익숙한 모습으로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선 베빌리는 집안을 살피다 급하게 나와 내게 손짓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리곤 아차 하는 표정으로 뛰어나와 나온 그가 맥레인을 운반하는 걸 돕는다.

그렇게 깔개를 잡고 맥레인을 집 안으로 겨우 들려놓고 나니 자연스레 집안 풍경이 내 눈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순간의 풍경을 간직한 그림들이 벽에 줄지어 걸려있고, 그 아래 손수 만든 듯한 투박하고 거친 세간들에서 느껴지는 이 냄새는…,

그래, 아마도 특유의 집 냄새겠지.

이제는 휘발 직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냄새.

세월에 잔뜩 묻혀 꺼낼 엄두도, 꺼낸다고 하더라도 이미 날아가고 없어 맡을 수 없을 그 냄새다.

“저희 어머니께서 그린 그림들입니다, 직접 풍경을 보고 그린 건 아니고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신 것들이지요.”

한참 집구경에 빠져 있던 나에게 베빌리가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직접 보고 그린 것처럼 생생한 그림이네요.”

“저와는 달리 어머니께서는 기억력이 굉장히 좋으시거든요.”

“베빌리도 훌륭한 길잡이지 않습니까?”

“그건 숲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이 큰 귀 덕분이지 제 기억력 때문은 아니거든요, 하하.”

멋쩍게 웃던 베빌리는 이제 맥레인을 눕힌 방으로 들어가 한쪽 벽에 걸린 선반에 놓인 유리병 하나를 집는다.

“최근에 나타난 소용돌이 탓에 날씨가 추워진 터라 햇살을 좀 흘려야겠습니다.”

이윽고 살짝 뚜껑을 연 유리병으로부터 쏟아지는 쨍함.

그건 마치 봄볕과 같은 따듯함을 품고 있어서 순간 방안에 그 온기가 가득 차올랐다.

“일행분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을 텐데요.”

“이미 이 자체로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아직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그 말에 잠자코 있던 내 주린 배가 무서우리만치 반응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베빌리는 순식간에 찬장을 열어 내게 빵과 물을 대접했다.

“배드락이라고 하는 빵인데 보시다시피 그냥 씹다간 턱이 아작날 겁니다, 물에 천천히 녹여 드셔야 해요. 대접해 드릴 게 이것뿐이라 죄송합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생무나 야생 당근에 비할 바가 아니지.

기다렸다는 듯 내 입속에 포진해 있던 침은 그 단단하던 빵도 단숨에 녹여버릴 기세로 흘러나왔다.

제아무리 형편없는 빵이라 한들 허기가 없는 맛마저 만들어내는 판국이니 난 그것을 그저 입안에 욱여넣기만을 반복할 뿐.

먹다 보니 안나 아주머니가 끓여주시던 스튜가 떠오르는구나.

이 빵을 그 꾸덕꾸덕한 스튜에 단 한 번만이라도 찍어볼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그렇게 베빌리가 내놓은 빵을 단숨에 먹어치운 나는 그제야 여유로움을 되찾을 수 있었다.

컵에 담긴 물마저 싹 비웠을 때쯤에 맞춰,

쾅쾅.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긴다.

“아마도 제 이웃일 겁니다.”

베빌리는 그 말을 하곤 헐레벌떡 문으로 나섰다.

이어 문이 열리기 무섭게 호쾌하기 짝이 없는 사내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요! 베빌리, 같이 들어간 인간은 누구야?”

“울리, 조용히 해.”

“뭐야, 네 몰골이 왜 이래? 떡 친 상태로 뒤진 구울 같이 생겼잖아.”

“미친놈.”

“그건 그렇고, 앞집 얘기 들었어? 멜리우가 인간들한테 몸 팔다가 두들겨 맞았다던데.”

“울리, 이따가 얘기하자. 지금은 그럴 상황이 못 돼.”

“왜 그래, 자꾸? 그러고 보니 너 길잡이 일하러 나간 거 아니었어? 그 새끼들 아직도 돈을 안 주디? 아니지, 네 몰골을 보아하니 너도 씨발 인간들한테 두들겨 맞은 거지?!”

“울리! 아니래도!”

“새끼 왜 이렇게 신경질이야?”

“원정대는 다 뒤졌어, 나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고.”

“허…, 이런 씨벌 좆됐네. 아니 근데 그 인간 놈은 그럼 뭔데?”

“저분은 내게 중요한 사람이야.”

“설마 깃발 달린 인간이야? 네가 무슨 재주로 그런 인간을 꾄 건데?”

“하, 이따가 얘기하자고 울리. 그나저나 우리 어머니 못 봤어?”

“아! 마마 오르델! 약초 캐러 가신 걸 보긴 봤지, 아마 곧 돌아오실 거다.”

“알려줘서 고마워 울리, 이따 보자.”

“요, 그래 임마 몰골 좀 제대로 차리고 다시 보자고. 그리고 기회 되면 저 깃발 인간 나리한테 나도 좀 소개해 줘.”

“울리…!”

“새끼 예민하기는, 알겠어 간다 가! 인간 나리한테 잘 보여서 원정대한테 밀린 돈도 좀 받고 그래.”

쾅!

참다못한 베빌리 쪽에서 문을 세게 닫은 것 같다.

곧 그 잠깐 사이에 피로로 얼굴이 절여져 나타난 베빌리는 말없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실례했습니다, 하나 남은 제 친군데 입이 거칠 거든요.”

“괜찮습니다.”

귀 큰 자들 사이에 오가는 그 잠깐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처지가 어떤지 대략 알 것도 같구나.

종족차별과 그에 따른 빈곤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단편을 본 기분이다.

“이곳 귀 큰 자들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어요. 중립지역 숲은 날이 갈수록 사라지고 집 잃은 귀 큰 자들은 계속해서 인간 사회에 내던져지고 있죠. 다른 숲의 귀 큰 자들은 숲 잃은 자들을 경멸하니…,”

사색이 된 베빌리의 푸념을 조용히 듣고 있자니,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다문다.

“하…,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하소연을 했네요.”

“베빌리, 당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알겠습니다. 원정대의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절한 상황에서 제가 개입하여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디안님. 만일 디안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울리와 함께 무법자라도 되어야 했을 겁니다.”

그럴 필요는 없지, 내가 무법자니까.

한 차례 대화가 끝나자 이번엔 집 대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베빌리! 집에 햇살을 풀어놓으면 어떻게 해?! 그 비싼 거를 쌀쌀함이랑 바꾸다니!”

카랑카랑하게 박히는 잔소리와 함께 거침없는 발소리가 울리고, 이에 베빌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올린 두 손으로 날 가리켰다.

직후 때에 맞춰 나타난 중년의 여인이 베빌리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대뜸 온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사람이?”

“어머니, 이분은 디안님이셔.”

“혹, 깃발 아래서 오셨나?”

“실례예요!”

“헛,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호기심에.”

베빌리의 타박에 놀란 중년 여성이 입을 가린 채 놀란 눈으로 날 살펴본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아드님께 신세를 진 입장이라서요.”

“그게 아니라 어머니, 이분이 내 목숨을 구해주셨어.”

재차 이어진 베빌리의 설명에 중년 여성이 말없이 우리가 앉은 식탁에 합석했다.

“내게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 베빌리.”

이어 단호한 표정으로 베빌리를 보며 말을 잇는 그녀에게,

우리는 번갈아 가며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 * *

베빌리의 어머니인 오르델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닥에 눕힌 맥레인을 살폈다.

난 그 뒤편에서 초조함을 씹어 삼켜야만 했다.

뿌려진 햇살에 환해진 방 안, 형형색색의 연고를 풀어헤친 채 맥레인의 상태를 이곳저곳 살피던 그녀가 곧 적색 연고를 환부에 펴바른다.

“이건 총상이로군요. 수백 년도 더 된 옛날 무기에 맞은 이유가 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제 아들 베빌리를 살려주셨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처치는 엉성했으나 이분의 몸이 가진 회복력이 대단해 제법 잘 아물 겁니다. 다만…,”

오르델은 다 바른 연고 뚜껑을 닫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처 빼지 못한 탄알이 하나 있어요. 숨 사는 곳 부근, 인간의 단어로 치면 폐 근처에 말이에요.”

“빼낼 수는 없는 겁니까?”

“이건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보다 더욱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자에게 가 봐야 치료할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이라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이윽고 오르델이 평온한 표정으로 날 지긋이 올려다본다.

“연고 치료를 계속하면 얼마 안 가 의식을 차릴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 알겠습니다.”

착잡해진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의 의식이 곧 회복된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가족들과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 거고, 매튜 아저씨가 어떻게든 맥레인을 의사와 연결해 주시겠지.

그래, 그러면 된 거야.

그러니 맥레인, 어서 의식을 차려요.

“그나저나 디안님, 혹여나 이 일로 우리가 불이익을 받진 않겠죠?”

오르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재차 물었다.

사실 그녀에게 내가 무법자란 사실은 숨겼다.

이곳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니 거기에 필요한 가면을 가져다 쓰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러니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내가 쓸 가면은 인간들에게나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하나만 알려주십시오, 대략 며칠 뒤에 그가 깨어날 것 같습니까?”

“적어도 닷새, 길면 한 주정도 걸릴 겁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오르델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닷새에서 주 사이라.

그 안에 베빌리의 일을 해결하면서 숲 읽는 법을 완전히 터득해야겠어.

맥레인이 깨어났을 때 내가 온전히 그의 버팀목이 되어야 할 테니.

“일행분은 좀 어떻습니까?”

방에서 나오기 무섭게 베빌리가 내게 물어왔다.

“어머니 덕분에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베빌리, 원정대가 있는 마을로는 언제 내려갈 겁니까.”

“내일 날이 밝자마자 갈 생각입니다.”

“좋습니다, 그때 동행하도록 하죠.”

내 말에 베빌리는 큰 안심이 된 듯, 뾰족한 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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