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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63화 (63/365)

63화. 숲 읽기

베빌리는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식탁 위에 놓인 가죽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안에서는 짤랑거리는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은화 97개.

그간 원정대에게서 받지 못한 봉급을 불과 반나절 만에 정산받았으니 그 감회가 남다른 듯싶다.

다행스럽게도 원정대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일이 끝난 직후 베빌리의 말에 따르면 저들은 별자리에 속한 원정대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었다고 했었지.

사실 난 그런 전후 사정 같은 건 하나도 몰랐다.

그저 간판에 샛별이란 뜻을 가진 루페룸이란 단어가 적혀있는 것을 보았고 그걸 빌미로 말을 지어낸 것뿐인데 운이 좋게도 잘 먹혀든 것일 뿐.

과정 중 다소 과격한 점이 없잖아 있었지만 되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일이 더 어려워졌을 거다.

한낱 모욕에 불과한 말의 대가를 비싸게 쳐주지 않았다면 저들이 나를 더욱 업신여겼을 테니까.

말 한마디의 대가를 손목으로 치르게 하면 그만큼 가진 깃발의 위상이 높아지고, 그 사실에 겁을 먹기 시작하는 순간 가면 뒤 진실을 외면하게 되지.

이제 관건은 길드 쪽 사람들의 반응이 얼마나 유지되느냐다.

제아무리 사실 같다고 한들 연극을 보고 역사라 칭할 수 없는 노릇이니, 결국엔 시간이 흐르면 이 모든 건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해서 베빌리에게 일러둔 것이 있다.

처음 몇 개월간은 모두 베빌리의 눈치를 보기 급급할 테니 그것을 이용해서라도 편한 일들을 골라잡아 돈을 모으라고.

원정대에 관련된 일을 청산했을 뿐이지 종족차별이란 그 깊은 뿌리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니 이 거짓된 무대의 막이 완전히 내려가기 전까지 이곳을 내뺄 궁리를 하라고.

그것이 그의 유일한 살길이다.

베빌리 역시 이 점을 확실하게 인지했는지 곧바로 수긍했다.

다만 앞서 말했듯,

요 몇 개월 동안은 적어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안식을 얻었다는 게 지금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된 것 같다.

“디안님께서 약속을 지켜주셨으니 저도 디안님과의 약속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겁니다.”

베빌리는 돈주머니를 손에 쥔 채 내게 말했다.

“하지만 오늘 그 약속을 지키진 못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 이 모든 일을 설명해 드려야 하거든요.”

“알겠습니다, 베빌리.”

마음을 정돈할 시간을 줘야지.

해가 떨어지기엔 아직 한참이나 이른 시간, 그동안에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둘 정리해야겠어.

“벤투스.”

지금까지 신경 써주지 못한 미안함에 베빌리의 집 앞에 풀어놓은 벤투스에게 한달음에 달려간 나는 날 반기는 녀석과 마주치기 무섭게 안장을 떼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내 말은 잘 살아남았을까.

맥레인과의 훈련과 가족의 일로 거의 신경을 못 썼었는데.

아마도 나보단 버드를 더 주인같이 생각했을지도 몰라.

묘한 죄책감이 든다.

그것 때문이라도 영물에 가까운 벤투스에게 더 애착을 가지는 것일지도.

“너는 나이를 몇이나 먹었니.”

푸힝.

안장을 제거한 뒤 손으로 목을 훑으며 넌지시 녀석에게 묻자 뜨거운 콧김을 내미는 것으로 대답한다.

너는 맥레인과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붙어 다녔을까, 그 오랜 시간 동안 그와 함께 무엇을 봤을까.

너의 영특함이라면 내게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벤투스를 쓰다듬길 한참이 지난 후,

살살 해가 떨어질 무렵 나는 오르델의 허락을 받아 물을 빌려 녀석을 씻겼다.

이어서 떼어낸 안장의 더러워진 부분들도 씻으려고 했는데,

궁금하잖아.

안장 주변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주머니들 속에 뭐가 들었는지 말이야.

하나둘 주머니를 까보며 내용물을 구경하던 중 흥미로운 것들이 나왔다.

검은 구슬? 쓴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약인 것 같기도 하고.

용의 시대, 그 역시 같은 책을 늘 가지고 다녔구나.

이런 곳에 작은 단검이 있었네, 하지만 정비를 하지 않았는지 너무 낡았어.

이건…,

뭐랄까.

맥레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 같다.

검은색 조그마한 가죽 함에 들어있는 어여쁜 펜던트.

여느 반짝이는 보석 하나 머금지 않은 단출하기 짝이 없는 펜던트지만, 그렇기에 둥근 모양의 아름다움이 더 살아나는 그것은.

섬세하고도 고요한 느낌의 향기가 잔뜩 배여 있었다.

아무래도 그에게 있어서 굉장히 소중한 물건일 테지.

얼른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함에 넣어 놓은 나는 이번엔 낡은 가죽 검집에 물려 있던 아밍소드로 관심을 돌렸다.

맥레인의 검.

정말 흔하디흔한, 그러면서도 날만 가까스로 살아있는 낡아빠진 아밍소드.

하지만 몇 번이나 이 검을 휘두르는 맥레인에게 나는 무릎을 꿇어야만 했었지.

생각해 보면 이 검에도 분명 인챈트가 걸려 있을 터.

전반적으로 앞서 봤던 펜던트와는 정반대로 그와 꼭 닮은 물건인 것 같네.

마치 그의 과거를 대변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 기분이 든다.

혹시 모르니까 이따가 셀레어를 정비할 때 이것도 같이 정비해 두어야겠다.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맥레인이 의식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끼얹어진 홀가분함을 슬슬 느끼는지 벤투스는 평온한 표정으로 갈기를 바람에 늘여놓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옆에서 안장의 흙먼지를 모두 닦아내고 정돈한 나는 이제 다 떨어져 가는 금빛 과실을 눈에 담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검을 든 맥레인을 연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절대와 절망을 혼합하면 딱 상상 속 맥레인이 내 머릿속에 퐁 하고 튀어나오거든.

그럼 이제 그 상상으로 만들어낸 상대를 향해 간만에 손에 쥔 셀레어를 열심히 휘둘러본다.

휙!

셀레어의 날이 은색을 뿌리며 허공을 가르면,

나는 버릇처럼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상상 속 맥레인이 방금 내 검을 손쉽게 읽고 힘으로 날 짓눌렀기 때문이다.

그 직후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한 움직임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검을 휘두른다.

본디 맥레인이 내게 준 가르침은 상대의 박자를 본격적으로 가지고 노는 검술이 주류였지만,

요 며칠 사이 많은 일을 거듭하며 새로이 느낀 것이 하나 더 있다.

어렴풋이, 안개 속 불 꺼진 등대를 향해 기약 없이 돛을 펼치는 것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희미하게나마 느껴졌어.

내게도 본연의 박자라는 게 있다는 것을.

단지 그 박자가 너무 빠른 탓에 제대로 된 음절의 윤곽조차 확인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지만.

일단 그것만으로도 기쁜 감정이 드는 건 사실이다.

나도 나만의 색이라는 게 있었구나 하고.

남이 멋대로 칠한 검은색이 조금씩 벗겨지는 것 같은 느낌.

한 번,

상상 속 맥레인을 상대로 내 박자를 펼쳐볼까?

스텝은 이런 식이었지, 첫발은 등반을 개시하는 산양의 발굽처럼.

다음은 작게 핀 꽃에 내려앉은 벌처럼.

슬슬 내 전신이 바람을 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에 맞춰 캠프를 습격했던 적들에게 한 것과 똑같이 검을 휘두른다.

상상 속 맥레인은 그런 내 검을 코웃음치며 쳐내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보다 더 빨리할 수 있어요, 맥레인.

“흡.”

호흡을 거머쥠과 동시에 탄력을 얻은 몸이 내 의지에 맞춰 유감없이 움직인다.

처음 휘두름에 흘린 은빛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 검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부터 휘둘려지고 있다.

이제 막 처음 흘린 은빛이 사라질 시점에야 세 번째 휘두름이 시작되는구나.

상상 속 맥레인이 크게 당황한다.

검 맞대길 포기하고 발을 크게 물린다.

난 그에 맞춰 더욱 빠르게 몰아친다.

“헉!”

그러다 어느 순간, 박자의 빠르기를 쫓지 못해 주춤하던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상상 속 맥레인이 매섭게 들이닥쳤다.

결국엔 난 보기 좋게 바닥을 나뒹굴어야만 했다.

아, 들리는 것만 같다.

맥레인의 비아냥이.

‘이 건방진 새끼, 그딴 식으로 검을 휘둘렀다간 지금처럼 꼴사납게 넘어져 뒤지는 결말만 있을 거다.’

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내 모습과 겹치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에 쥔 셀레어는 아직 가른 바람에 한창 시달리는 중인지,

아니면 내 박자에 뒤늦은 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

위잉 위잉.

채 진동이 가시지 않은 채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 * *

“오늘 햇살로 새싹을 피웠으니, 내일 햇살은 과실 맺힐 가지를 나게 해주시기를.”

오르델의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나와 베빌리는 식탁 위 음식에 손을 뻗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오르델은 그저 말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나와 베빌리에게 음식을 덜어주었다.

식사를 끝마친 뒤엔 어제와 마찬가지로 베빌리와 같이 뒷정리까지 마무리 짓고 식후주를 손에 든 채 집 밖을 향했다.

베빌리는 나보다 먼저 밖에 나와 있었다.

“디안님, 오셨습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그의 옆 울타리에 기대어 선 채 주스처럼 단 식후주를 들이켰다.

“베빌리, 어머님껜 설명해 드렸습니까?”

이어진 내 질문에 베빌리는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답했다.

“예, 오랜 시간을 들여 이곳에 세월을 쌓은 터라 아쉬운 맘이 먼저 드셨을 텐데 괜찮으시답니다.”

“에릴의 노래, ‘고향’의 가사로군요.”

“어! 이 노래를 아십니까?”

아마 열여덟 번째로 배웠던 노래지 싶은데.

“저희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는 노랩니다. 헤헤, 저도 디안님처럼 노래 가사를 섞어서 대답해보려 했는데 들켰군요.”

“아니요, 자연스럽게 잘하셨습니다.”

“디안님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베빌리는 컵에 담긴 식후주를 한입에 모두 들이켰다.

“석 달 정도만 악착같이 돈을 벌어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제 이웃들에게도 일감을 두루두루 나눠주어 최대한 다 같이 말이에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잠깐이나마 평온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진심 어린 감사에 나는 식후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답했다.

“편히 누릴 수 없는 것이라면, 누릴 수 있을 때 잔뜩 누려야지요. 중립지역은 그런 곳이니까요.”

“맞습니다, 디안님. 혹 이것도 노래 가사를 빌려 말씀하신 건 아니겠지요? 워낙 자연스럽게 느껴져서요.”

“아닙니다.”

“바로 이 차이입니다, 구태여 생각하지 않아도 디안님은 마치 노래 가사처럼 멋진 말들이 튀어나오지 않습니까?”

베빌리는 날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싫지는 않았다.

타인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싫어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디안님, 이 베빌리에게 꿈이 하나 생겼습니다.”

“뭡니까?”

“언제가 되었건, 꼭 다시 디안님과 만났으면 하는 꿈이요.”

어차피 곧 내가 떠나갈 것이라는 걸 직감한 듯, 베빌리는 아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 아쉬움에 공감한 나도 털털하게 말해본다.

“저도 언제가 됐든 다시 만나고 싶군요, 오늘처럼 따스한 식탁 앞에 라면 더더욱.”

귀 큰 자 베빌리는 내 말에 진심으로 기쁜 듯이 크게 웃었다.

그리곤 버릇처럼,

“아차, 디안님 내일 말입니다.”

혀를 차며 품에서 빳빳한 종이 하나를 꺼내 들어 건네는 베빌리.

그 종이 최상단엔 루페룸이란 글귀가 멋들어지게 박혀 있었다.

“상상도 못 할 일이었겠지만, 디안님 덕분에 곧바로 원정대 관련 일을 수주받을 수 있었거든요.”

건네받은 종이를 살펴보니 이런 내용이다.

[고위험 조사 / 토벌 임무]

[추정 난도 - 트리부스(3) 트로피]

[특이사항 - 북쪽 안야 숲 인근에 유리가 깨지는 듯한 비명이 포착됨]

[상기한 특징 외 조사로 얻은 정보는 전무]

[앞서간 조사대가 두 차례 전멸한 관계로 성공적인 조사를 완수할 시 우누스(1) 트로피를 인정해 줌.]

[조사 사례금 – 라이튼 제국 금화 1개]

[토벌 사례금 – 라이튼 제국 금화 7개]

“그래서, 이걸 보여주신 이유가 뭡니까?”

내 물음에 베빌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제가 읽어드릴 숲의 표지를 보여드리는 겁니다. 어쨌든 짧은 시간 내에 디안님께서 숲을 제대로 보시기 위해선 속성으로 가르쳐드릴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베빌리도 나름대로 나를 위한 계획을 다 세우고 있었어.

“괴물과의 조우는 최대한 피할 겁니다, 어차피 조사를 마치면 곧바로 대규모 원정대가 투입될 것이거든요. 우리 목표는 괴물이 존재하는 숲을 최대한 읽는 것이지 토벌이 아니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내일,

이전에는 체험해보지 못한 전혀 다른 책을 펼쳐보게 되겠구나.

그 내용이 무엇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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