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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64화 (64/365)

64화. 숲 읽기 (2)

새벽,

차가움을 먹고 자란 이슬이 잎사귀 위로 녹진하게 퍼질 무렵.

집을 나선 베빌리가 루페룸 길드에서 작은 마차를 빌려왔다.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을 해낸 탓인지 마차를 끌고 오는 그의 얼굴엔 아직도 얼떨떨함이 묻어 있는 것 같다.

“길드에서 이런 지원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라서요.”

내 표정을 본 건지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린 베빌리가 항변하듯 먼저 말을 내뱉었다.

“더군다나 디안님이 다녀가신 후로 부쩍 저에게 친절이란 친절은 다 베풀더군요.”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 속엔 허무함이 짙게 묻어 나온다.

“그래서 더욱 실감할 수 있었어요. 아, 이 상황이 그리 오래가진 않겠구나 하고요.”

“그러니 가차 없이 이용하세요, 베빌리.”

“네, 디안님.”

짤막하게 대답을 마친 베빌리는 다시 기세 좋은 표정을 보이며 내게 눈짓했다.

“타시죠, 여기서 북쪽 안야 숲까진 꽤 멀거든요.”

* * *

날이 밝아졌을 즈음,

마차는 이제 막 나타난 거대한 이정표를 지나치고 있었다.

“디안님, 여기부터 르아랭입니다.”

서로 교대하며 고삐를 잡아당기길 몇 시간, 드디어 이 지루한 이동의 끝이 보이는가 싶었지만.

“이제 절반 정도 왔으니 좀 더 힘을 내십시오.”

“허…”

지금껏 이동한 거리만큼을 더 이동해야 한다니, 맥이 끊어져 버리는 느낌이다.

“베빌리, 가다가 마을이라도 경유 하는 게 어떻습니까?”

내 표정과 말투를 읽은 그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재촉했다.

“그러는 게 좋을 거 같군요, 말들도 좀 쉬게 하고요.”

결국엔 30분을 내리 이동하다가 마주한 작은 마을에 들른 우리는 마차에 귀속되다시피 굳어버린 몸을 겨우 풀 수 있었다.

베빌리는 마을에 들르자마자 금세 어디론가 가더니 흙으로 빚은 컵 두 개를 들고 온다.

“디안님, 목 좀 축이시지요.”

“이게 뭡니까?”

“마유주입니다.”

말 젖이라.

처음 먹어보는데.

베빌리가 건넨 컵을 받아드니 그 안엔 살짝 투명하고도 뽀얀 느낌의 하얀 액체가 담겨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유주는 이 근방의 특산품일 정도로 그 질이 아주 좋습니다.”

“그럼, 믿고 마시겠습니다.”

과연 이름에 걸맞게 입으로 느끼는 첫인상은 부드럽다.

다만 목을 넘길 때 살짝 신맛이 느껴지고, 이윽고 뱃속으로 넘어간 직후엔 뜨거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구나.

내 알쏭달쏭한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베빌리는 뒤이어 자신도 크게 한 모금 마신 뒤 감상이라도 내뱉듯 청량을 토해냈다.

“캬!”

이름만 덜컥 들었을 땐 거부감이 슬쩍 들었는데,

막상 마셔보니 끝을 모르고 넘겨버릴 것 같은 술이네.

“어떱니까? 제법 목 넘김이 좋지 않습니까?”

“그렇네요, 단맛이 있어서 그런지 추운 데서 먹었다간 고꾸라질 때까지 마실 것 같아요.”

“하하, 맞습니다. 이보다 훨씬 더 먼 북쪽, 그러니까 중립지역 북쪽 끄트머리에 있다는 ‘늑대’들이 이 술을 즐겨 마신다고 하지요.”

늑대라면 분명 중립지역 북쪽에 세가 큰 군벌을 말하는 거겠지.

그 늑대를 이끄는 군벌의 수장이 ‘즈라칸’이라고 했던가.

“아참, 이제 슬슬 디안님께 보여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베빌리는 술잔을 비우곤 마차 뒤 짐칸에서 가죽으로 포장해놓은 짐을 풀어헤쳤다.

안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양피지를 꿰어 만든 책.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밀며 내게 말했다.

“이것은 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표지엔 제법 그럴싸한 글씨로 ‘괴물을 보다’라고 적혀있다.

저자는…

귀 큰 자 베빌리.

“직접 쓰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길라잡이를 하며 산 지는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잖은 시간 동안 제가 보고 겪은 모든 것을 망라해 적은 책입니다.”

과연, 성실하게 쌓아 올린 결실보다 더 자랑스러운 것은 없지.

이 책을 설명하는 베빌리에게서 그 자부심이 느껴진다.

“참고로 길라잡이를 비롯한 원정대들 사이에서도 이런 괴물에 관한 정보는 업계 비밀에 가깝습니다.”

“업계 비밀? 어째서죠?”

“정보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괴물의 생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자연에 가까운 변덕을 자랑하기에 괜히 정보를 공개했다간 이를 맹신한 민간 자원이 막대한 피해를 보는 게 뻔하니까요.”

곧 베빌리가 슬쩍 눈을 돌린 뒤 말을 잇는다.

“물론 대외적인 이유는 그렇고 속사정으론 이런 정보가 쉽사리 돌아다니게 된다면 민간 수준에서도 쉬이 제압될 괴물들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괴물이 밥줄인 그들에게 있어선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

“하지만 제가 쓴 이 책은 믿고 보셔도 됩니다. 두 눈으로 보고 겪은 것들을 사실대로 적어놓은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최근 거인에 관한 내용도 추가하셨겠군요.”

베빌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일반적인 괴물에 관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수룩하고 멍청한 두 발 걷는 무리야말로 길라잡이들이 최우선으로 경계해야 하는 괴물이다…, 가장 최근에 그 책에 추가한 내용입니다.”

베빌리는 그 말을 끝으로 말을 잇지 않았다.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거든, 또 그로 인한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내 눈으로 톡톡히 보기도 했고.

조심스럽게 베빌리의 시간을 펼쳐보자 첫 페이지부터 그가 손수 써넣은 삐뚤빼뚤한 글귀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분명 이것은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다.

“감사합니다, 이리 귀한 것을 선뜻 읽게 내주셔서.”

“감사를 얻고자 드린 게 아닙니다, 디안님께서 주신 무거운 은혜에 그나마라도 비슷한 무게추를 추가한 것일 뿐이죠.”

살라엑스의 노래.

금방 내 표정을 읽은 베빌리는 볼을 붉히며 뒤통수를 긁적인다.

“어제 어머니를 설득하면서 덤으로 노래도 하나 배웠거든요. 사실 제가 좋아하는 이가 있어, 그녀에게 바칠 노래가 필요했거든요.”

“오르델님께서 손주가 급하신가 보군요.”

내 대답에 베빌리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

“살라엑스의 노래라면 확실히 열정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음표와 섹스의 화신이라고 해도 무방한 작곡가니까요.”

내 덤덤한 설명에 베빌리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붉어진 얼굴을 하면서도 넌지시 내게 물어온다.

“그…, 열정이 잘 전달될까요?”

“뻔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세레나데를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겁니다.”

세공소의 누군가가 말하기를, 내가 팔려나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살라엑스의 노래를 부를 거라 했었지.

귀족들의 전희를 위해서 말이야.

다행히야, 적어도 내 주변 사람을 위한 조언으로 써먹을 수 있어서.

“자, 베빌리. 굳었던 몸도 풀렸으니 슬슬 출발합시다.”

마유주 한 컵을 비웠더니 서서히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온기가 올라온다.

덩달아 기분도 한결 나아져서 남은 길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겠구나.

베빌리는 내 대답에 확신을 얻은 것인지, 나보다도 한껏 들뜬 모양새로 호기롭게 고삐를 잡아챘다.

* * *

베빌리의 글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우선 첫 내용이 괴물의 정의에 관한 것이었는데,

괴물은 용의 시대 이후부터 우후죽순 생겨난 ‘현상’이란다.

물론 베빌리 혼자서 정의한 것은 아니고 그 오랜 세월 괴물을 연구한 학자들 사이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베빌리는 단지 그 결론에 동의하여 서두에 언급했을 뿐.

어쨌든 용의 시대를 관통한 세상의 공식이 그 이후에 모두 다 어그러진 이상, 괴물이란 현상 역시 그 어그러진 공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재밌게도 베빌리는 괴물의 종류를 트로피로 분류해 놓았다.

아니, 베빌리에게 재차 물었는데 이건 업계에서 나눈 규격이라고 했다.

전형적인 위험도나 그에 파생하는 문제점들을 고려해 매긴 것이며 동시에 괴물의 조사나 토벌에 성공했을 시 부여되는 명성적 보상.

그 트로피의 합이 100이 넘어가면 비로소 관련 단체에서 ‘엔트로피’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거다.

엔트로피라는 이름의 파급력은 원정대 안에서만큼은 절대적이어서 모든 임무 수주에 관련해 우대권을 지급해주고 각종 배편과 심지어는 큰 구름까지 지원한다.

물론 같은 이름에서도 차이가 발생하는데,

개인에게 걸린 엔트로피냐, 아니면 한 원정대에 걸린 엔트로피냐에 따라 그 위상이 결정적으로 차이가 났다.

비록 트로피 하나짜리 거인 백을 죽였다고 해도 그것이 개인이라면, 거인 백을 상대하고도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원정대 사이에선 위인 취급을 받는다.

반대로 원정대가 전문적으로 거인만을 잡아 엔트로피를 달성할 경우 쳐주는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거다.

이쪽 바닥도 명예로 죽고 살고가 결정되는 곳이로구나.

다만 베빌리가 겪는 상황처럼 마찬가지로 말단에 속하는 원정 길드에선 병폐가 난무하기에 전체적으로는 멀쩡하지만 구석구석 살피면 썩어있는 곳이 많은 조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만 보면 세상 모든 게 똑같아 보인다.

세브리를 핥기 바쁜 깃발 가진 자들이나, 귀 큰 자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원정대의 일원들이나.

다 똑같잖아.

“베빌리, 보니까 트로피 세 개짜리에 속하는 괴물은 단 두 종류밖에 적혀있지 않네요?”

“그렇지요, 아무래도 세 개는 이쪽 땅에선 보기도 꽤 힘들뿐더러 그쯤 가면 진짜 ‘현상’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놈들투성이거든요.”

확실히,

적어놓은 두 괴물조차 하나는 토벌에 실패했다고 적혀있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보기 힘든 괴물에 관련한 임무를 하러 가는 거로군요.”

베빌리는 내 말에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길드에서 대놓고 죽여버리겠다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실지 몰라도…,”

그러나 끝에 가선 오히려 우습다는 얼굴을 하는 베빌리.

“저들은 디안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사업에 관련해서요. 그 때문인지 이런 고난도 임무도 어렵지 않게 따올 수 있다는 걸 디안님께 표현하고자 했을 겁니다.”

그래, 그 말을 듣고 보니 후자 쪽이 더욱 가능성이 있겠다.

“해서, 이번 의뢰에 적힌 괴물에 관해 짐작이라도 가시는 게 있습니까?”

재차 이어지는 내 질문에 베빌리는 고심하듯 턱을 어루만지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소리만이 포착된 걸 보면 특정 상황에서나 환경에서 그 모습이 구현되는 괴물일 겁니다. 소이레스처럼요, 아! 제 책을 살펴보면 관련된 내용이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따라 책을 펼쳐보니 듀오(2) 트로피 쪽 부분에 소이레스라는 괴물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있는 곳을 발견했다.

소이레스, 지리적으로 바람결이 고일 수밖에 없을 때 생성되는 괴물로 인근에 큰 짐승의 사체가 있다면 더욱 높은 확률로 발생하는 괴물이다.

바람결이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뭉쳐지면 독립된 개체로 나부끼듯 움직이기 시작해 경로에 있는 모든 것을 헤집으며 이따금 거대한 동물의 사체 따위에 의태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퇴치법은 놈의 기류를 억제할 만큼 다량의 장애물을 살포하거나 머무는 환경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트린 뒤 자연소멸 할 때까지 방치하면 된다.

다만 소이레스는 대부분 성체가 되기도 전에 연금술사들의 훌륭한 자원 신세를 면치 못하며, 성체로 성장한다고 해도 그 특유의 강렬한 바람 성질 탓에 적극적으로 토벌이 되는 괴물이다.

높은 숲의 귀 큰 군주는 이러한 자연 발생하는 괴물을 이용해 국경을 수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마치 매튜 아저씨가 말했던, 그리고 내가 조우했던 꿈속의 그 괴물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것 같네.

과연, 특정 상황에서나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이라면 우리가 숲으로 들어갔을 때 마주할 가능성은 비교적 적겠지.

이미 눈빛만으로 내 속마음을 간파했는지, 그는 고삐를 부드럽게 감싸 쥔 채 말을 계속했다.

“조우 가능성은 현저히 낮지만, 반대로 그러한 괴물이 존재하는 숲을 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숲을 읽으시려는 디안님껜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어쨌든 베빌리의 입장에서도 목숨을 걸고 무겁게 이 일을 자청하고 있는 것일 테니,

그래.

그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봐야겠다.

“디안님, 도착입니다.”

마차가 멈춰서고,

그 너머 작은 개울이 보인다.

그 개울 뒤편으론,

한밤중을 흠뻑 머금은 어둡고 장대한 숲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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