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숲 읽기 (3)
숲에 들어서기 무섭게 베빌리는 제집 안방 드나들 듯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앞장서 나갔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날 보며 운을 뗀다.
“디안님, 숲을 알려 드리기에 앞서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귀 큰 자와 인간의 차이점을 인지할 것.”
“그래서, 말씀하신 그 차이란?”
내 물음에 베빌리가 양팔을 활짝 펼치며 말을 이었다.
“보십시오, 이 녹색 장막 아래 펼쳐진 어둠은 일반적으로 귀 큰 자들이 맞이하는 아침이랍니다.”
“햇살이 없는 아침이라니.”
“귀 큰 자들은 선천적으로 햇살이 없어도 되거든요, 햇살 먹은 나뭇잎들 아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어서 베빌리는 자신의 뾰족한 귀를 가리켰다.
“이 귀가 앞서 말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지요. 듣는 것도 듣는 거지만, 숲의 양분을 조달하는 역할도 합니다.”
“굉장하군요.”
“그렇죠? 하지만 장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숲 밖에서 활동할 땐 여러모로 금방 지치고 기운도 떨어지거든요. 해서 나무뿌리 아래에 집을 짓고 사는 것도 다 그런 이유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종 간에 차이겠지.
의중으로 혐오를 때려 박는 차별관 진정으로 다른.
“해서 왜 이런 설명을 하냐면 확실하게 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뭘 말이죠?”
베빌리의 표정이 한순간 진지해진다.
“절대로 귀 큰 자들만큼 숲을 탈 순 없다는 것을.”
그래, 인정한다.
종의 특수성은 극복하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베빌리는 긍정을 잃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귀 큰 자들처럼 숲을 타볼 수는 있습니다.”
제법,
베빌리의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인간은 숲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숲이 여러 목소리를 내는 건 아닙니다. 그 말인즉슨 암기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흥미롭군요, 베빌리.”
“처음은 유밤나무의 목소리로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슬슬 베빌리가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며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난 그런 그의 뒤를 바짝 쫓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 * *
모든 이들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
가지에 핀 나뭇잎의 모양도 서로 다르다.
때문에, 같은 바람에 나부껴도 어떤 것은 지껄이고 어떤 것은 재잘댄다.
또 늙어 땅 위에 떨어져 쉬고 있는 가지 역시 다 달라서 밟으면 꽥하고 소리를 지르는 놈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무른 진흙처럼 오히려 발을 껴안아 드는 것이 있다.
특정 나무는 마주 오는 바람결에 개울의 안부를 묻기 바쁘고, 다른 나무는 자기 뒤에 있을 늪지에 바람이 때 묻을까 걱정한다.
베빌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마치 숲의 은밀한 대화를 훔쳐 듣는 것만 같았다.
바람이 흐르는 길, 그 길을 비트는 나무, 그리고 그 길 사이를 오가며 완성되는 숲의 이야기.
난 베빌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담아내려 노력했다.
할 수 있는 최고의 집중을 발휘하면서도, 마치 검을 휘두르며 느낀 것과 같이 본능적인 부분처럼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앞장서 나가는 베빌리의 걸음걸이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쯤.
내 두 발도 제법 숲을 의식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든 숲의 바닥을 깨우지 않고서, 흐르는 바람길을 따라 나무와 나뭇잎이 말하는 밀어를 상기하며.
하지만 그런 탄력적인 움직임에도 베빌리를 쫓는 건 무리였다.
아니 속도를 붙였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는 한층 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버렸다.
근본, 더 나아가 기원으로부터 내려오는 압도적인 차이를 실감하는 순간이리라.
그러나 난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은커녕 숲을 이해하고 걷는 것 자체가 너무나 흥미로워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어.
이윽고 저 멀리서 앞장서 가던 베빌리가 걸음을 멈춘다.
그에 맞춰 나도 그의 지척에 다다를 때쯤 걸음을 멈췄다.
“디안님, 나무와 바람의 밀어를 대강 설명해드렸으니 이제 그것을 활용해 볼 때가 왔습니다.”
“진도가 굉장히 빠르네요, 베빌리.”
“디안님의 수준에 맞춰 진행했을 뿐이에요. 보통 인간은 이쯤 되면 가지고 온 수첩이 걸레짝이 되어있고 머릿속은 텅텅 비어있기 마련이거든요. 간단히 생각해보면 전혀 알지도 못했던 외국어를 익히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내 반응관 달리 베빌리는 오히려 놀란 듯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이건 빈말이 아니에요. 디안님은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갖고 계십니다.”
사실,
벌써 몇 개 까먹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나에 대한 베빌리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
“자 그냥 하긴 재미없을 테니 저와 내기를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무슨?”
“지금부터 전 의도적으로 나무와 바람결에 흔적을 흘리고 다닐 겁니다. 디안님은 제자리서 대기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그 흔적을 쫓아 절 찾으시면 되지요.”
“못 찾게 되면..?”
“제게 살라엑스의 노래를 가르쳐주십시오.”
“그럼 찾게 되면요?”
“어머니께 배운 살라엑스의 노래를 들어보고 평가해주세요.”
내기가 맞나?
“숲에 들어오더니 좀 뻔뻔해진 것 같은데요, 베빌리.”
내 말에 베빌리가 쾌활하게 웃어 보인다.
“비록 디안님께 신세를 진 입장이지만, 지금은 엄연히 디안님을 지도하고 있으니 조금은 뻔뻔해지려고요.”
이 순간을 가차 없이 이용하겠다 이거지?
내가 해준 조언을 그대로 되돌려 받을 줄은 몰랐는데.
“좋습니다, 다만 그 시간도 아마 잠깐일 겁니다.”
그렇담 제대로 호승심을 발휘해 줄 수밖에.
덩달아 흥분한 베빌리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이탈했다.
* * *
“계획을 다시 설명하겠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가 작은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채 속삭이듯 설명을 잇자,
그 주위에 모여 있던 수십 규모의 장정들이 눈을 번뜩였다.
“오늘 이곳에 누군가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될 거다. 그리고 그 죽음의 증인은 우리가 되겠지.”
검, 도끼, 철퇴, 쇠뇌.
금방이라도 전투를 벌일 듯 살벌한 무기들로 무장한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곧 그들 중 하나가 두꺼운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질문했다.
“바로 사냥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자 처음 설명을 잇던 남자가 입고 있던 갬비슨의 소매를 매만지며 답했다.
“비들, 네가 본 걸 말해 봐.”
그러자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말라깽이 사내가 입술을 덜덜 떨며 운을 뗀다.
“무슨 마법을 부린 듯 순식간에 개리의 손목을 날려버렸어…, 난 살면서 롱소드를 그렇게 휘두르는 놈을 처음 봤다고!”
쓸데없이 생생한 증언이 끝나자 덥수룩한 수염을 한 남자가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상대는 깃발을 품은 기사다, 괜히 나대다가 이 중에 절반은 재수 없게 목이 달아날 수도 있어. 우린 안전하게 한 건 하러 온 거지 목숨을 걸고 온 게 아냐.”
그 말에 모두가 수긍한 듯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곳에 있다는 괴물을 부추겨 놈에게 인도할 거다. 그래도 꼴에 기사니까 쉽게 당하진 않을 것이고 결국엔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게 되겠지.”
이어 아까 질문한 남자가 호기로운 목소리로 다시 외친다.
“그러다 괴물에게 놈이 당하면!”
“우린 증인이 되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힘 빠져 헐떡이는 수사슴의 숨통을 끊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덥수룩한 수염을 실룩이며 웃어 보인 남자는 이제 옆에 박아 두었던 거대한 도끼를 어루만진다.
“비들, 그놈이 가진 검이 확실히 귀쟁이제렸다?”
“그래 확실해! 손목뼈를 치즈 가르듯 베어버렸어!”
“좋아, 장물로 넘기면 못해도 금화 백 개다. 놈이 괴물까지 잡아준다면 부수입까지 짭짤할 거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석에 잠자코 앉아 있던 남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잊지 마, 금화 백 개를 받으면 삼십은 내 몫이란 걸.”
그러자 주위에 있던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득달같이 토를 단다.
“혼자서 3할을 처먹는다고?!”
“네놈은 무기도 안 챙겨왔잖아?”
그러나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이가 눈빛만으로 상황을 중재시켰다.
“우리의 길잡이다. 그가 없으면 괴물을 기사 놈에게 인도하지도 못할뿐더러 극적으로 꾸며야 할 이 모든 일을 진행조차 할 수 없단 걸 알아둬. 거기다 3할이나 받아가도 될 만큼의 실력자니 그의 말을 믿고 따라라.”
그 말에 길잡이라 불린 미형의 사내는 우쭐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우러러보는 자들을 깔보았다.
“길잡이 양반, 그래서 우리가 유인해야 할 괴물은 어떤 녀석이지?”
그를 향한 이어지는 질문에 사내는 부랴부랴 가죽 허리띠에 매달려 있던 책을 꺼내 펼쳐 들었다.
“트리부스(3) 트로피에 해당하며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는 녀석이라면 갬피저스가 분명해.”
갬피저스.
그의 입에서 저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몇몇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숲 그림자 놈이잖아…?”
“오히려 다행이야, 기사 놈의 시체가 남을 걱정은 없겠어.”
“일전에 북쪽에서 놈에게 마을 하나가 쑥대밭이 됐단 소리를 들었는데.”
웅성웅성,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묻어나오는 그 이름에서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는 확신하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모두에게 말했다.
“바로 출발하지.”
그렇게 삼십이 넘는 장정이 열을 갖춰 길잡이의 움직임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그중 눈치 빠른 몇은 가진 책에 유독 집착하는 길잡이를 영 탐탁지 않아 했다.
보통 길잡이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괴물과 관련된 책을 가지고 다닌다.
그것은 곧 길잡이로서의 신념을 뜻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업계에선 신뢰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하물며 책이라 한들 길잡이 본인의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 뻔한데, 마치 남의 기억을 훑어보는 것처럼 저렇게 책을 보며 움직이는 길잡이라니.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놈은 이름을 구태여 밝히려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것이 몇몇 장정들이 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 가장 큰 명분이었다.
책 표지는 이상하리만큼 헤져있고.
3할이나 받아 처먹는 녀석은 그런 낡은 책을 맹신하며 길을 인도한다?
냄새가 난다.
하지만 대놓고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 일을 주도한 자에게 반목하려 들었다간 루페룸 길드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이지 못할 테니까.
그는 비진티(20) 트로피.
루페룸 길드의 유일한 유명인인 데다가, 그 명성은 중립지역에서 개인으로 활동하는 원정대 가운데서도 알아줄 정도다.
설령 길잡이가 영 미덥잖은들 주도자인 그의 지시만 따른다면 확실히 큰 몫을 챙길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깃발을 사냥하려는 무리가 길고 긴 이동을 멈췄다.
그 선두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길잡이가 우뚝 서 있다.
“뭐…뭔가 이상한데?”
그는 허겁지겁 책을 뒤적이며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글귀를 눈 속에 때려 박았다.
하지만 없어.
관련된 내용이 안 보인다.
심지어 그가 들고 있던 책에 기록된 괴물의 등급은 셉템(7) 트로피까지였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분명 책에는 없는 것이었다.
“크윽…!”
주도자인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팔로 코를 막으며 길잡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게 대체 뭐야?!”
사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많은 시체.
인간, 귀 큰 자, 짐승, 맹수, 심지어는 괴물도 보인다.
다만 무언가에 의해 잡아먹힌 모양새는 아니다.
부패가 되었을지언정 대부분이 사지가 온전하게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다른 의미로’ 잡아먹힌 듯 보였다.
시체에 생기가 있을 리 만무하겠지만,
적어도 시체로부터 살아있던 것이었구나 하는 인상은 느끼는 게 정상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시체 밭에선 그런 인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잿빛에 젖은 나무토막과 같은, 시체조차도 간직하고 있어야 할 생기의 기억이 말소된 그 고깃덩어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포,
그 이상의 것을 심어주었다.
“뭐냐고 물었잖아, 씨발!”
결국엔 길잡이의 멱살을 잡고 덥수룩한 수염에 침 튀기며 일갈하는 사내.
“내…내가 어떻게 알아 이…씨발! 이건… 나도 처음 보는 거라고…!”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듯,
그들이 피워낸 소란에 반응하는 여울진 그림자.
[끼리릭-]
게걸스러운 숨소리였을까,
갈라진 목구멍에서 삐져나온 단말마였을까.
‘그것’이 내는 소리가 맞긴 한 걸까?
그림자를 뒤집어쓴 듯, 시체 더미 위로 형용할 수 없는 검은 형체가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