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숲 읽기 (4)
본디 그림자는 누워있는 것.
지는 해 아래, 잿빛 땅거미가 고즈넉이 퍼지는 것.
그러나,
장정들의 눈에 비춘 그림자는 서 있는 것.
두 발 걷는 자의 모습을 한 그림자는 그 모습 그대로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다.
그야말로 초자연의 실체.
현상이란 이름을 뒤집어쓴 괴물들을 숱하게 상대해온 장정들이었으나, 그들이 상대한 것들의 발아래엔 적어도 누워있는 그림자가 따라다녔거늘.
저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저것을 두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시야를 잃어버리는 느낌이 드는지 몇몇이 눈두덩이를 파르르 떤다.
이내 자칭 길잡이라 말하던 사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그것의 머리 부분이 갸웃거렸다.
이목구비가 거세된 머리였으나 그 암중의 시선이 눈감은 사내를 향하고 있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 정도였다.
이윽고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끼릭.]
비명에 가까운 께름칙한 소리와 함께 놈이 손을 쭉 뻗어 끝에 매달린 검지를 까딱였다.
그러자,
“어…어어?!”
눈을 감은 길잡이의 입에서 두려움이 진하게 뿜어져 나온다.
“어…어억…어걱…”
두려움은 곧 고통으로.
길잡이의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무언가가 뚫고 나오려는 듯 심히 꿈틀거렸다.
종래에,
“어…억…”
길잡이의 눈꺼풀을 비집고 튀어나온 것은.
놈의 검지.
까딱, 까딱.
동공을 뚫고 나온 검은 검지가 움직인다.
“흐…흐어억!”
“뭐…엇…!”
주변에 있던 자들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지고, 이미 유린당한 길잡이의 의식은 날아갔는지 거품을 문 채 부르르 떨기만 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검지는 그의 안구로부터 더욱 나오려는 듯 몸부림치고.
급기야,
으드득, 빠드득.
비집고 나온 눈꺼풀의 틈을 쪼개며 한쪽 팔을 활짝 드러냈다.
“으아아악!”
“저게 대체 뭐야…!”
비이성이 쏟아져나오는 그 상황에서 대부분이 충격에 빳빳이 굳었을 때.
한 남자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 도끼를 고쳐 잡고선 방금 죽은 길잡이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 일의 주도자이자 비진티(20) 트로피를 달성한 사냥꾼인 그의 눈엔 적어도 저건 사냥감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부서진 머리 위로 솟아난 검은 팔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자 그것은 힘없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잘린 팔은 바닥에 떨어져 흩어졌다.
[끼리리리릭, 끽.]
“뭐가 우스운 거냐, 괴물 새끼야.”
잔뜩 흥분한 듯한 놈이 유별난 소리를 내자 남자는 작게 이죽거리며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녀석을 쏘아붙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장정들이 하나둘 지니고 있던 무기로 괴물을 겨눴다.
“시야에 놈이 들어온 상태에서 눈을 깜빡이지 마라.”
주도자인 남자는 덥수룩한 수염을 실룩이며 단박에 괴물의 행위를 파악한 듯 소리쳤다.
이제껏 상대한 괴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로웠지만 그렇다고 제거하지 못할 대상은 아니다.
애초에 깃발 가진 사람을 노리고 한탕 해 먹으려고 했던 대담함이 어디로 갔겠나?
“눈을 감아야 할 땐 고개를 돌려 시야에서 놈을 치운 뒤 감아라.”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장정들에게 조언을 거듭하며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던 그때.
그것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후 놈에게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엄마살려줘후발대에알려야해이나무에대고약속해널사랑한다고안돼자기야제발날버리지마아아악아아악]
생생한 음성들.
놈에게 당한 피해자의 단말마를 흥얼거리듯 노래로 부르려 했던 걸까.
“쏴!”
두근거리는 긴장감을 집어삼킨 채 남자가 지시를 내리자 그에 맞춰 몇몇 장정들의 손에서 시위가 떠나갔다.
쉭! 휙!
깃이 바람을 가르며 놈에게로 날아가 박힌다.
“화살이 제대로 먹혔는데?!”
“보기완 다르게 타격이 가능한 것 같군!”
그 장면에 자신감을 얻은 이들이 다시 가열 차게 시위에 활을 걸려는 순간,
[루페룸조사대여눈을감을땐뒤돌아감는다화살이통하는것을보니원거리에서공격을퍼부으면될것같군아니이럴수가아아아악아아아악]
그것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의 끝 페이지에 손을 대려 하고 있었다.
* * *
바람에 휘청 꺾인 가지를 따라, 마주 보며 명랑하게 나부끼는 나뭇잎을 골라.
발을 품는 흙과,
숨죽은 낙엽만을 밟으면.
약속된 은밀을 등에 업는다.
아직 모든 것이 다 어색하게만 느껴져 되뇌기를 반복해야 했지만,
망아지도 난 날엔 비틀거리는 법이지.
베빌리는 적당히 자신을 추적할 수 있을 만한 흔적들을 남기며 이동했다.
이 정도 거리면 내가 어디까지 응용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 파악한 것처럼 말이야.
생각해보니 이렇게 숲을 잘 타는 베빌리인데, 그런 그조차 거인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을 보면 확실히 괴물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구나.
이제 슬슬 베빌리가 남긴 흔적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오롯이 내 힘으로 그의 위치를 유추해내야만 해.
가만 보니 베빌리는 아까부터 유밤나무에만 흔적을 남겼었지, 그렇다면 그 나무만을 골라 봐야겠어.
그에게 배운 덕에 이젠 적어도 열 가지 이상의 나무를 구분할 수 있으니까.
마침 인근에 유밤나무는 단 한 그루뿐이다.
이 나무는 대게…,
언제나 자신보다 물가에 더 가깝게 뿌리내리는 에드나무를 시샘한다고 했었지.
베빌리는 물가 쪽으로 이동했을까?
그래, 그렇기에 쭉 유밤나무에 흔적을 남겼을 거야.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렵지 않게 에드나무를 찾은 나는 그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윽고 귓가에 슬며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물소리.
더 나아가 물가에 도달하자 그곳엔 베빌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베빌리, 오늘 저녁은 당신 노래를 듣게 생겼군요.”
살짝 뿌듯함이 들어 그에게 장난 섞인 말을 건넸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답이 없이 물가 너머 깊은 숲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베빌리?”
재차 그를 부르자,
“디안님.”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날 보며 대꾸하는 베빌리.
“아무래도 그 괴물이 활동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뭔갈 보기라도 하셨습니까?”
“건너편 나무들이 바람을 막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제 바로 맞은편을 보시면 잭리드 나무가 보이시죠? 잭리드 나무는…,”
“나태하죠.”
“그래요.”
베빌리는 말을 마치곤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서며 내게 앞장서길 권유했다.
그 말을 듣고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향하자.
아, 바로 느껴진다.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미약하게 섞인,
“썩은 내가 나는군요.”
자동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뿐만이 아닙니다, 디안님께서 오시기 한참 전엔 제법 많은 비명이 들렸어요. 옅은 메아리에 가까워 여기서 거리는 꽤 멀겠지만…,”
누군가가 무리 지어 괴물을 건드린 건가.
“베빌리, 그 의뢰서를 받아간 자들이 또 있었습니까?”
“예? 아뇨, 적어도 오늘 새벽까진 없었습니다. 제가 알기론 말이죠.”
그렇다면 원정대가 아니라 숲을 지나는 다른 누군가였을 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베빌리, 숲을 빠져나갑시다.”
내 말에 베빌리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마주치는 잭리드 나무를 등진 채 이동하면 최대한 괴물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동선을 짤 수 있을 테지.
역시 내 예상대로 베빌리는 잭리드 나무를 등진 채 이동을 시작했다.
차분함을 유지한 채 베빌리의 뒤를 따라 이동하기를 한참.
숲을 배우기 위해 좀 더 깊숙한 곳에 묶어놓았던 마차에 도착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위에 동시에 올라탔다.
이어 베빌리는 자연스럽게 고삐를, 나는 옷감에 둘둘 말린 셀레어의 자루를 잡은 채 숲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이런 제기랄.”
베빌리의 얼굴이 대뜸 사색이 되었다.
아니, 곧장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나도 알 수 있었다.
역풍이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어.
이렇게 되면, 잭리드 나무를 등지고 이동한 우리의 냄새를 괴물이 맡을 가능성이 생긴다.
동시에 눈을 마주친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고삐를 치대며 말을 재촉했다.
* * *
언제나 거름 냄새가 가득한 허름하고 낡은 루페룸 지부는 별안간 정오가 되면서부터 난리가 나버렸다.
별자리에 속하는 캐룸 길드의 사람들이 난데없이 이곳에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중년의 남성 둘로 이루어진 그들은 그 존재만으로 루페룸 길드의 모든 것을 압도했다.
번지르르한 갬비슨, 관절 부위를 덮은 보랏빛 사슬 갑옷은 보기만 해도 눈동자가 윤택해질 기분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고,
등에 걸친 붉은 망토는 분명 원정대라면 누구나 꿈꾼다는 레드 로핀의 붉은 등가죽이리라.
그뿐이랴.
그들 중 애꾸눈을 한 자는 무려 단신으로 셉투아긴(70) 트로피에 도달한 위대한 사냥꾼.
리키 매젠
그와 관련된 일화라면 단연 운데킴(11) 트로피에 해당하는 괴물 오즈번과의 사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눈 하나를 내주고 놈의 심장에 워해머를 박아 넣은 그는 캐룸 길드의 상징 그 자체.
그런 그가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루페룸 길드의 관련자들 앞에서 보란 듯이 내던져 보였다.
“이 병신같은 새끼들!”
마치 천둥이 튀어 나간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모두가 대번에 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지을 뿐이다.
“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길래 조사단을 두 차례에 걸쳐 사지로 내몰아! 너희들이 파악하지 못할 일 같으면 별자리에 도움을 구해야 할 거 아냐!”
고막이라도 터트려 죽일 셈일까.
계속해서 천둥을 토해내던 리키는 탁자 위에 강철도 구길 것 같은 두꺼운 손을 내리치며 말을 이었다.
“소화도 못 시키는 걸 꼴에 어떻게든 아득바득 쥐어 물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얻어걸려서 별자리로 올라갈 생각이었겠지? 아니면 누군가 너희들의 뒷배가 되어주겠다고 나서던? 그렇지 않고서야 이딴 짓을 벌여?!”
정곡을 천둥으로 찔리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 리키와 마주 앉아 사색이 된 작자들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겠지.
이어서 리키의 옆에서 잠자코 있던 백발의 노인이 너그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키, 그래도 이렇게 완전히 늦기 전에 알게 되어서 다행 아닙니까. 서둘러 원정대 파견을 진행합시다.”
“아톰, 이건 ‘열 재앙’입니다. 늦는 순간 되돌릴 수가 없다고요.”
아톰,
아톰 뱅퀴시
캐룸 길드 최고의 길잡이이자,
트레데킴(13) 트로피에 해당하는 괴물 하나를 완벽히 조사해낸 남자.
그는 리키의 말에 반문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리키가 다시 천둥을 입에 머금고 선언한다.
“당장 날조로 가득한 이 문서를 정정해서 일대에 재배포하도록 해라. 두오데킴(12) 트로피, ‘숲의 읍소’로 추정되는 괴물이 북쪽 안야 숲에 출현했다고.”
그 무지막지한 윽박에 루페룸 길드의 관련자들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 * *
말은 앞으로 나아가길 거부했다.
자신의 뒤를 지배한 이보다 마주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선천적으로 뒤를 경계하는 짐승의 감각도 부정시킬 만큼,
마주한 것은 분명 압도적인 존재였다.
베빌리를 살필 여유는 없었다.
한시라도 눈을 떼게 된다면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반응할 것 같아서.
그래서 최대한 경계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맥레인에게 길러진 내 본능이 말하기를, 신체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그것을 경계하라 말하고 있다.
“베빌리, 가세요.”
“디…”
베빌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게 말을 건네는 것조차 방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또한,
애석하게도 자신의 존재로 인해 내가 갖게 될 부담까지 파악한 베빌리는 군말 없이 마차를 돌렸다.
그래,
잘 선택했어요, 베빌리.
그게 최선이야.
저것은 무엇일까.
어스름으로 빚어 만든 듯한 그것은 분명 내가 지금껏 상대한 것들 가운데 가장 미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웃긴 것은.
그러니까 저리 압도적인 존재와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덜하다.
맥레인을 마주하며 그에게서 느꼈던 압박감 보다.
미지는 가늠할 수 없어 무모해 볼 수 있지만,
기지는 가늠할 수 있기에 무모해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지금은 무모해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