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숲 읽기 (5)
마치 내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리는 것처럼.
그것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서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여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자 그것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는 그것의 머리 부분이 정확히 날 노려보듯 움직인 거다.
그것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제일 먼저 내 몸에 일어난 변화는 눈 주변 근육이 지끈거리는 것이었다.
눈꺼풀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이질감.
그렇기에 나는 더욱 두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이내, 그런 내 모습을 관찰하듯 지켜보던 녀석의 어스름 묻은 발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에 맞춰 나는 사선으로 빗겨나가듯 스텝을 밟으며 놈의 사각으로 진입했다.
본디 사람이라면 내 움직임에 맞춰 몸을 돌려 정면으로 맞서려 했겠지만,
그것은 그저 한 발 빼놓은 그 자세로 머리만을 돌려 나를 쫓는구나.
이 이상 대치만으론 알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이젠 부딪쳐 볼 수밖에.
셀레어의 자루를 양손으로 가득 움켜쥐고, 폼멜 끝을 배꼽 아래에 두어 중단 자세를 잡은 나는 천천히 놈을 향해 걸어갔다.
이에 그것의 머리가 갸웃거린다.
[끼긱.]
뾰족하게 파편화된 유리를 서로 짓이기듯 비비면 저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하지만 난 지체하지 않고 놈의 상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통했다.
걱정과 달리 그것은 내가 휘두른 검의 궤적 그대로 상체가 양단되어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다만 자루를 잡은 손으로부터 느껴지는 감각은,
한없이 가볍고 무른 것을 벤 것만 같은 느낌뿐이다.
통했으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인가.
짧은 감상을 느끼고 있는 와중 뒤쪽에서 들려오는,
[끼리리릭]
그것의 울음소리.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경계하자 바로 앞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스름이 서 있다.
슬슬 힘들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내려앉을 것만 같아.
놈은 분명 내가 눈감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몸에 일어난 유일한 변화를 생각하면 간단하게 유추해낼 수 있는 답이니까.
다만 그렇다고 눈을 안 감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눈꺼풀은 버릇의 화신과 같은 부위라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따금 내려앉기도 할 정도로 조절하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편을 구해야지.
당장 생각나는 건 고개나 몸을 돌려 시야에서 놈을 없앤 뒤 그 틈을 타 눈을 감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만약 놈이 공격을 감행했을 경우 내가 너무 무방비해진다.
신체적 동선으로도 너무 낭비고.
그럼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놈에게서부터 벗어난 시야를 확보하는 방법은…,
단 하나.
찰나의 시간, 비상함을 빚어낸 머리로부터 통찰이 떨어지고 이내 내 신체가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이어 검을 가로로 세워 들어 눈 앞을 가린 직후,
망설임 없이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그렇게,
버거웠던 이질감은 사라지고, 동시에 다시 가벼워진 눈꺼풀이 들리며 밝은 셀레어의 날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성공이다.
다만 놈이 그런 내 일련의 행동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네 어 둠 을 보 여 줘]
노인, 아이, 사내, 여인.
각기 다른 목소리로 내뱉은 음절로 기괴한 문장을 완성 시킨 그것이 엄청난 속력으로 내게 들이닥친 거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박감이 눈꺼풀 위에 내려앉는다.
또 동시에 기형적으로 늘어난 팔 부분의 어스름이 마치 채찍과 같이 날카롭게 내게 쇄도했다.
그러나 그런 파상적일 수밖에 없는 공격은 오히려 날 침착시킬 뿐.
제아무리 뒤틀린 박자라 한들 내 검은 박자 자체 위에 있기 때문이리라.
간결하게 자세를 잡고 늘어난 팔과 손가락들을 차례로 베어넘긴다.
이러한 과정에서 검을 거두어들일 때 가로 잡은 셀레어의 도신이 내 눈을 스치면,
그 찰나의 틈바구니를 놓치지 않고 눈을 감는다.
적의 공세가 심한들 상관없다.
눈꺼풀이 내려앉고 떠오르는 과정에서 놈의 파상을 세 번씩이나 맞받아친 나는 오히려 한 걸음씩 나아가 놈의 약점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자 제법 그것이 당황한 듯 뒷걸음질 치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건,
놈이 틈을 드러내는 순간이었고.
“흡.”
이에 나는 호흡을 가슴 한가득 담은 채 검을 내질러 그것의 몸통을 꿰었다.
아까와 같은 가볍기 짝이 없는 감촉.
애석하게도,
싸움은 아직 원점이로구나.
* * *
마차에서 튕겨 나오듯 내린 베빌리는 물가를 가로질러 미친 듯이 뛰었다.
이어서 가지와 나뭇잎의 밀어 속에서 혐오와 기피를 찾아낸 그는 곧장 그것들이 가리키는 곳을 향했다.
본 적도 없고 겪어본 적도 더더욱 없으나,
귀 큰 자라면 어렸을 적에 적어도 어른들의 입에서 한 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그것을 파헤치기 위해서.
그가 생각하는 디안은 강하다.
강할뿐더러 그 강함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총명함은 눈이 부실 지경이다.
하지만 햇살이 모든 부분을 밝히지 못하듯, 그 눈부신 부분으로도 밝히지 못하는 것이 있기 마련.
그리고 기어이 그런 음지에 속해있는 부분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가 가진 강함과 총명함이 얼마나 빛바래 보이겠는가.
해서 베빌리는 그를 위해 방금 발목을 접질렸음에도 이를 악물고 숲을 탔다.
만약 자신으로 인해 그의 눈부신 부분이 조금이라도 더 넓어질 수만 있다면, 그래서 마주한 음지마저 밝혀낼 수만 있다면…!
“헉…헉…!”
달리기를 멈춘 베빌리는 악취가 풍겨 나오는 늪지대 앞에 멈춰 섰다.
본디 늪이 생길 수가 없는 땅이었지만 살덩이들이 부패하며 뿜어낸 것들이 땅 자체를 변질시켰구나.
개중엔 방금 죽어 끌려와 아직도 새빨간 피를 흘리는 시체들도 보였다.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올라올 정도의 마경.
그러나 베빌리는 망설임 없이 그 늪에 발을 담갔다.
그러면서 그 옛날, 따스한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해 보았다.
그것은 귀 큰 자들이라면 다 아는 무서운 동화.
숲을 태워 없애는 인간에게 나무가 잔인한 복수를 해내는 그 이야기는 용의 시대가 끝난 직후, 녹색 전쟁이 벌어졌던 세대에 나왔다고 했었지.
나무의 성질이 바뀌어 급격하게 세가 불어난 귀 큰 군주들이 불가피한 충돌을 하면서 벌어진 그 전쟁은,
분명 많은 숲을 후퇴시켰다고 했어.
아이러니하게도 숲을 후퇴시킨 건 귀 큰 자들이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게 적나라할 필요가 있겠는가.
해서 동화에 동족을 증오의 대상으로 넣으면 곤란하니 인간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완성 시켰을 거야.
베빌리는 잠시 머리를 환기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극악한 악취 때문인지 생각이 자꾸 딴 대로 새버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무서운 동화는 등장하는 인물이 와전되었을 뿐이지 그것을 제외하곤 대부분 사실이라는 거다.
귀 큰 자라면 평생을 살면서 숲의 현상을 세 번 정도 목격한다.
그리고 그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숲의 읍소’다.
무리 지어 뿌리내린 것의 무차별적인 죽음에 대한 숲의 대답.
분명 수준 높은 길잡이들은 그에 대한 존재를 인지하고 트로피 등급까지 매겼을 테지만,
별 볼 일 없는 길잡이인 베빌리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있나.
다만 귀 큰 자로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상기했을 뿐이지.
아무튼,
이곳은 그 유명한 중립 지역의 안야 숲이고.
안야 숲은…,
인간의 전쟁으로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던 장대한 녹음.
정말 숲의 읍소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최적의 환경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 그 기원을 찾아 목격하고, 알아내어, 알려줘야 하는 것이 베빌리의 의무다.
백골이 되다 못 해 잿빛으로 풍화한 뼈 더미까지 손수 헤치고 나아간 그의 가슴까지 이미 진득하게 썩어버린 물이 차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입까지 차오른다 해도 그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아,
방금 막 베빌리가 헤엄에 가까운 걸음을 멈췄다.
그런 그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망자를 토지 삼아 검게 뿌리내린 거대한 꽃.
저주스러운 보랏빛 꽃잎이 감싸고 있는 가운데 암술은,
마치 잉태한 태아를 출산한 모양새로 터져있다.
그것은 망자를 거름 삼아 꽃 피워 나타났구나.
그런데 꽃은 거름만으론 피지 못할 터.
베빌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깊고 깊은 숲속, 한 줄기 한 파편의 햇살도 허락하지 않는 이곳에서 꽃은 어찌 피웠을까.
아니,
햇빛을 머금은 게 아니다.
저 위, 햇볕을 씹은 나뭇잎이 뱉어낸 그림자를 먹고 자란 거야.
귀 큰 자들의 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지.
숲은 찬란하지만 동시에 암담하다.
베빌리는 곁눈질로 보았던 디안의 침착함을 흉내 내듯 초연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다만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해서 실제로 공포에 질려 창백해진 안색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용기를 가지고 다시 늪을 가로질러 간 베빌리는 초입에서 마주쳤던, 방금 막 죽은 듯한 피 흘리는 시체 주위에 있던 거대한 도끼를 집은 뒤 꽃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암담에 싹튼 안야 숲의 어둠이여.”
그리곤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며 기도를 해 본다.
베빌리는 신이나 별을 믿진 않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보여준 믿음은 믿는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기도한다.
“내일은 한 줄기 햇살 아래 새로운 새싹이 되기를.”
다시 거대한 꽃 앞에 우뚝 선 베빌리는,
“이야아악!”
거나한 함성과 함께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 * *
쇄도하는 어스름을 수백 번 쳐냈을까.
둔중한 피로감이 겹겹이 쌓여 내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몸 안에 점철된 새로운 감각들에 정신은 더욱 가다듬어져만 갔다.
셀레어가 바람을 가르며 휘둘려질수록,
내 몸 안에 들어왔던 바람과 같은 기운들이 점점 고양되어 가는 것이 느껴져.
흐르는 물살을 가로막자 그 결이 한 대 모이는 것과 같이 말이야.
그리고 이내,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몸 안에 모인 이 기운을 검에 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이것은 마치 막 태어난 새끼가 젖을 찾는 것처럼, 일어나 걸으려는 것처럼 본능에 가까운 것이어서.
나도 모르게 셀레어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에 반응하듯 셀레어의 도신 주위에 푸른 빛이 휘감겼다.
본 적이 있어.
맥레인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을 적에 그의 검이 푸르게 빛났었지.
그리고 거의 스러져 없는 기억이지만 소용돌이를 내리쳤던 그 날 내 검에서도 비슷한 기운이 흘러나왔었지.
필시 이 기운을 이용한다면 저 어스름을 상대로 유효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더욱 신중해지려 한다.
그리고 그런 신중을 발휘하고 있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끄르르르르]
놈의 전신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놈의 근원을 이루는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알아챈 나는 허리를 잔뜩 휘감아 잡은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 베었다.
팍!
검으로부터 폭발하듯 뛰쳐나오는 풍압에 주위 모든 바람이 허옇게 질려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어 내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거대한 한 줄기 바람결이 솟아오르며 경로에 있는 모든 것을 말끔히 베어버렸다.
깊은 숲, 검압에 베인 가지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이내 드러난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아래.
반쯤 몸이 찢어져 나간 어스름이 서 있다.
[어제어머니의뿌리가끊켰어내일은동생의허리가잘리겠지모레는가족이었던우리가모두사라질거야.]
그것은 슬피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뒤집어쓰고 있던 어스름의 장막만을 남긴 채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 * *
길잡이 아톰 뱅퀴시가 말했다.
“숲의 읍소는 두 발 걷는 자들의 사념을 얻고 핍니다. 나무의 혼은 의지를 피력할 수 없어서 다른 것의 사념을 뒤집어써야만 하거든요.”
그 말을 들은 리키 매젠이 혀를 끌끌 차며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결국엔 여러 사념을 양분 삼는 바람에 가진 혼도 잃어버려 한낱 괴물이 되는 운명을 맞이하겠지요. 근원을 지키는 것도 마다하고 두 발 걷는 것을 쫓아가 죽일 정도로 말입니다.”
이에 아톰 뱅퀴시 역시 침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을 필두로,
장장 오십에 달하는 중무장한 인원들이 날씨 파편들과 각종 도구를 들고서 북쪽 안야숲을 향해 원정을 출발했다.
그리고 뒤늦게 숲에 도착해서야,
그들은 누군가가 먼저 안야숲의 이야기를 읽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