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장막 밖으로
열 마디 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저 서로의 몰골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모든 설명이 되는걸.
우리는 재회와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중간에 가는 길에 들렀던 마을에서 마유주 한잔을 나누며 작게 회포를 풀었다.
자신의 무용담 대신 서로의 안부를 먼저 묻는 것으로 시작된 회포는 제법 잘 어울리는 안주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달콤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마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 집에 도착했고.
마마 오르델은 그런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베빌리, 넌 집에 들어오기 전에 깨끗이 씻도록 해!”
나는 오르델의 잔소리를 실컷 들은 베빌리를 따라 그를 위해 바가지로 물을 떠 주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다 찢어진 옷감으로 어떻게든 감싸놓은 셀레어도 정비했는데, 과연 그 어스름과의 전투가 치열하기는 했는지 날의 이가 부분부분 빠져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웃긴 건 그렇게 셀레어를 다 정비하고 난 뒤에야 내 양손이 피멍으로 물들어 있었음을 알았다는 건데.
베빌리와 마유주를 한 잔 걸칠 때도 몰랐던 걸 보면 직전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나 싶다.
그렇게 고즈넉한 뿌리로 돌아왔을 땐,
오르델은 우릴 위해 후한 상을 차린 뒤였다.
발효한 밀을 둥글납작하게 만들어 구운 난에 졸인 채소 국물에 고기를 버무린 스튜를 얹거나 찍어 먹는,
간단히 먹을 수 있으나 그 배부름은 풍만하기 그지없는 음식을 그것도 부족함 없이 먹고 나서야.
나는 오랜만에 몰려온 졸음에 젖어 해가 떨어질 때까지 잠을 청했다.
* * *
이제 막 석양이 절정에 달할 때쯤 나는 눈을 떴다.
맥레인은 이곳에 왔던 첫날에 비해 안색과 표정 모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진 상태였다.
이젠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잠에서 깨듯 일어날 것만 같구나.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서자 짧은 은줄이 달린 안경을 끼고 바느질을 하고 있던 오르델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디안님, 검집을 완성했는데 검과 한번 맞춰 보시지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베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잠을 자고 있답니다, 이른 아침부터 도대체 얼마나 고된 시간을 보냈기에 이리 다들 잠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지 원.”
제법 고됐죠, 사실을 말씀드리기 무서울 만큼.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나는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검집으로 향했다.
광택을 머금은 잿빛 가죽.
이중으로 겹 바느질을 해 단단하게 꿰맨 테두리.
딱 보아도 대단한 품질의 나무를 깎아 만든 그것은 공예를 알지 못하는 나조차도 만듦새가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거기다 손에 잡히는 감촉과 무게는 처음 셀레어를 손에 쥐었을 때 느꼈던 것처럼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방 안에 두었던 셀레어를 가져와 조심스레 검집에 넣어보니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꽉 맞물렸다.
“앞마당에 그늘을 설치하려고 사놨던 발레지 나무를 깎아 만들었답니다. 고급 가구에 쓰일 만큼 강하고 유연한 목재라 검집으로도 그 수명이 매우 길 거예요.”
오르델은 바느질을 이어가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뿌리가 되었지만, 남편은 꽤 재주가 좋은 대장장이였답니다. 그를 돕다 보니 무두질도 배울 수 있었고 검집 만드는 법도 익힐 수 있었죠.”
“무지한 제가 봐도 대단한 물건인 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네요. 그거 아십니까? 사실 검을 만들기보다 검집을 만드는 게 더 어려운 일이랍니다.”
오르델은 잠시 바느질을 멈추곤 따스한 눈빛으로 날 보며 찬찬히 입을 열었다.
“검집은 항상 검이라는 틀에 맞춰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삶도 마찬가지랍니다. 삶이라는 틀에 자신을 맞추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안나 아주머니와 같은,
특유의 포근하고 사근사근한 그 억양은 순간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 늙은이가 주책맞게 한소리 하자면…, 디안님은 제법 이곳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방금까지 검집 없이 거친 모습으로 밖을 나돌아다니던 검이 검집을 되찾은 것처럼 이곳은 디안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편한 집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소립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져서, 또 절절하게 공감돼서.
이곳은 아늑하고 또 따듯하며,
무엇보다 내가 맡지 못한 가족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끝내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오르델은 잠시 놀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며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디안님의 처지가 어떤지도 모르고 한 소리일 뿐이니까.”
“아니요…, 고맙습니다, 오르델. 제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하지만…, 디안님. 그저 언제나 이 뿌리는 당신에게 열려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십시오. 귀 큰 자는 뿌리를 걸고 하는 약속은 꼭 지킨답니다.”
그녀의 말에 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맥레인이 긴 잠에서 깨어나면, 이곳의 냄새가 그리워질 거야.
그러나 지금은 내 가족들의 냄새가 더욱 그립구나.
“이런! 제가 너무 잠에 취해있었나 봅니다.”
곧 베빌리가 방문을 열고 나와 눌린 머리를 긁적이며 나와 오르델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네 눈동자에 땅거미가 지겠다, 욘석아!”
“어머니, 제 눈망울이 머금은 초롱초롱한 빛이 보이십니까? 그깟 땅거미로는 제 눈빛을 뺏어갈 순 없을 겁니다.”
장난스럽게 대꾸한 베빌리가 슬쩍 나를 보더니,
순간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천연덕스럽게 말을 잇는다.
“심지어 어스름조차 디안님이 계시는 한 우리 집에 있는 그 어떤 빛도 훔쳐 가지 못할걸요.”
그 말에 오르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다시 느긋한 바느질을 시작했다.
“참, 디안님. 그것을 어머니께 보여 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숲의 읍소에 대해선 함구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슬쩍 눈썹을 찌푸리며 베빌리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갯짓하며 집 밖을 나섰다.
서둘러 그를 따라 나가,
“베빌리, 어머니께 그것을 보여드려도 정말 괜찮은 겁니까?”
따져봤지만.
“어머니께선 숲의 읍소를 실제로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는 정말 맘 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한들 지나온 세월을 통해 쌓으신 경험을 통해 알아채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다시 항변하자 베빌리는 미소와 함께 담담히 고백하듯 입을 열었다.
“평생을 안야숲에서 사신 분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뒤엔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며 발품을 팔아 사셔야 했던 어머니께서 세월을 통해 쌓으신 경험은 가난의 고통과 억제이지 숲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지금은 뿌리 하나를 잡고 기둥을 세우셨지요, 또 이 근방에 사는 모든 귀 큰 자들은 저희 어머니를 마마 오르델이라 부를 정도로 두터운 신망까지 쌓으셨습니다.”
그 미소 속에선,
마치 나보다 더 빛나는 광채가 나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해내어 제게 보여주신 것처럼, 저도 꼭 어머니께 보여 드릴 겁니다.”
멋있다.
다짐이란 건.
베빌리는 벤투스의 안장 가방에 고이 접어 넣어놓았던 어스름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나 혼자가 아닌, 나와 베빌리가 힘을 합쳐 얻어낸 그 결실은 바닥에 묻은 그림자를 가위로 그대로 재단하여 뜯어낸 것처럼 오묘한 어둠을 흘리고 있었다.
“이걸로 디안님이 걸칠 망토를 만들어달라 할 겁니다. 여분이 남는다면 제가 걸칠 케이프도 만들어 달라 할 거고요.”
“차라리 둘 다 공평하게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요, 전 케이프만으로 충분합니다. 길잡이가 후드 망토를 쓰고 다니다간 없던 바람 이야기도 만들어 낼 수도 있거든요, 무엇보다.”
베빌리는 대뜸 내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절 영악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약속의 증표로 써먹을 생각입니다.”
“약속의 증표?”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그 약속이요. 이건 그 증표입니다. 또 저는 이 증표로 거하게 출셋길을 달리고 있을 테니까 다시 만날 땐 혹여나 제 턱이 전보다 훨씬 위로 들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 그럼 다음엔 제가 베빌리의 길잡이가 되어야겠네요.”
“안됩니다. 디안님이 길잡이 업계에 투신하는 순간 저 같은 놈은 뭘 먹고 삽니까?”
그의 능청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밖에 지을 것이 없다.
“아차, 그 전에 말입니다! 진짜 제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뭡니까?”
“제 노래를 평가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 * *
베빌리의 예상대로 오르델은 순전한 호기심으로 어스름 가죽을 받아들였다.
마치 심연을 실로 꿰어 짜면 이런 느낌의 천이 나올 것이라면서.
베빌리는 그것을 가지고 내가 쓸 망토와 자기가 쓸 케이프로 만들어 달라 했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오르델은 자기가 쓸 작은 손목 보호대까지 만들겠다 하셨다.
덩달아 신나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왁자지껄을 곁들인 저녁 식사가 끝나고 식후주를 나누며 여유롭게 집을 나선 나와 베빌리는,
밤하늘에 수놓기 시작하는 별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멈추었다.
“그녀의 이름은 뭡니까?”
“로니, 로니입니다.”
“살라엑스의 노래는 자신감입니다, 끈적하게 몸을 비비는 심벌즈를 반주로 쓰는 음악인만큼 일단은 실력을 떠나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일관해야 하죠.”
베빌리는 잔뜩 긴장한 듯 내 조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해 보시죠.”
슬슬 기대되는데.
별 무리 아래 우뚝 선 베빌리가 조용히 호흡을 머금고는 슬며시 노래를 시작했다.
[당신은 날 무겁게 해요.]
[내 심장은 당신을 보면 주저앉지요.]
[내 눈도 굴러떨어져 버려요.]
[심지어는 내 호흡도 가라앉게 만들죠.]
[이게 바로 내가 당신에게서 느낀 사랑의 무게에요.]
[오, 그대여 내가 당신에게 느낀 사랑의 무게만큼.]
[당신도 내게 무거운 사랑을 줘요.]
[사랑의 천칭에 수평을 만들어 줘요.]
[나와 나란히 누워줘요.]
[나와 같이 사랑을 속삭여 줘요.]
[밤새 서로의 사랑에 짓눌려 봐요.]
긴장 묻은 혀에서 이따금 서투름이 튀어나오지만,
노래 가사에 간절함과 진실이 절절히 묻어 나오는구나.
무엇보다 베빌리는 생각보다 노래를 굉장히 잘했다.
“베빌리.”
“엉망인가요? 로니가 싫어할까요?”
“이제 한 송이 꽃만 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내 담담한 대답에,
베빌리는 갑자기 제자리서 방방 뛰었다.
“조오오았어어!!”
“하루라도 빨리 그녀에게 불러주십시오, 어색한 긴장감이 익숙함을 찾아 사라지기 전에요. 지금처럼만 그녀에게 불러준다면 분명 그녀가 받아줄 겁니다.”
베빌리는 내 평을 듣고는 얼굴에 확고한 자신감이 깃들었다.
그러면서 묻어나오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마치 안드레와 촙을 떠올리게 하는구나.
촙, 안드레.
둘 다 무사한 거겠지, 그렇지?
* * *
새벽, 이따금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쏴아아-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창밖에 하늘을 보니 여지없이 조각처럼 맞춰진 부자연스러운 구름이 보였다.
전에 보았던 연금술사들을 또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
벤투스를 살피러 밖으로 나가는데 이미 깨어 있던 오르델이 날 불러 세웠다.
“디안님, 잠시.”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내 뒤에 선 그녀가 가볍고 선선한 무언가를 내 목에 얹었다.
그것은 재단된 밤.
별 없는 하늘처럼 투명한 어둠을 흘리며 내 등으로부터 찬란히 흔들거렸다.
“비를 맞으면 안 되니까요.”
“감사합니다, 오르델.”
달려 있던 후드를 올려 뒤집어쓴 채 밖으로 나서자 순식간에 빗물이 내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빗물은 걸친 망토를 붙들지 못하고 방울진 모습 그대로 튕겨 나갈 뿐이었다.
걸친 것 같은 느낌도 나지 않는 그 신묘한 망토로 몸을 감싼 채 벤투스에게 가자,
녀석은 이미 영리하게 지붕 밑으로 들어와 평온한 표정으로 비 내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벤투스의 시선이 집 창문 쪽으로 고정된다.
그 모습에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한 나는,
얼른 집으로 들어서 맥레인이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디안.”
“…, 맥레인?”
그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모습으로 막 후드를 벗고 방을 들어오는 날 반겼다.
“젠장, 엄청나게 긴 꿈이었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맥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