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장막 밖으로 (2)
“신수가 훤해 보이는데.”
맥레인은 갈라진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오만가지 일을 하고 다녔나 보군.”
“몸은 좀 어때요, 맥레인.”
“좆같아.”
맥레인은 작게 이죽거리면서도 내심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를 안 지 오래됐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런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니까.
“마마 오르델이라고했나? 수프 맛이 기가 막히는군. 안나가 좀 배워야 할 정도로 말이야.”
방금 막 오르델이 가져다준 스프를 한 그릇 말끔히 비운 맥레인은 작게 기침하며 일으켰던 상체를 다시 기울였다.
“디안, 도대체 며칠이 지난 거냐.”
“아흐레, 아니 열흘은 지났을 거예요.”
“허…,”
맥레인은 거친 손으로 허옇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렸다.
“별다른 일은 없었나?”
그 말에 나는 잠시 걸치고 있던 망토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그 질문의 저의가 가족을 향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만…,”
맥레인은 짧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단편적인 기억들을 떠올렸는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엔제이, 그 병신새끼. 몸을 숙이라고 했는데.”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슬픔의 무게감에 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지만,
“가족들이 서로를 찾기 위해 필시 어딘가에 메시지를 남겼을 거다. 너무 걱정하지마, 모두 무사히 만나게 될 테니까.”
맥레인은 곧 희망을 말하며 내가 짊어지고 있던 짐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우리 가족은 이런 일을 숱하게 겪었어, 해서 극복하는 방법도 배웠지. 우선 이곳을 벗어나 탄크레빌로 가야겠어.”
“맥레인, 적어도 이틀 정도는 더 쉬셔야 해요.”
“디안.”
맥레인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있었다.
“순례자들이 소용돌이를 보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다. 그뿐만 아니라 중립 지역 전체가 곧 크게 요동치겠지.”
그것은 굉장히 결연한 것이어서 차마 그에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중심에 우리가 있어, 그렇기에 어떻게든 빨리 가족들과 만나 이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가야 해.”
자기가 뱉은 말 속에 암담함을 느꼈는지 맥레인은 연신 아찔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비가 그치면 바로 출발하자, 디안.”
“알겠어요, 맥레인.”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맥레인은,
잠시 후, 날 보며 진심을 보이며 말했다.
“디안, 확실하게 말하는데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 * *
방을 나서자 오르델과 베빌리가 식탁에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날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일어나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안부를 물어왔다.
“괜찮으십니까, 디안님?”
“수프가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난 그런 그들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베빌리. 잠깐 저와 대화 좀 할까요?”
내 말에 베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따라나섰다.
쏴아아-
문을 열고 집 밖을 나서자 우렁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고막이 먹먹해진다.
난 곧장 뒤따라온 베빌리에게 담담히 말했다.
“베빌리, 비가 그치면 저는 떠납니다.”
그 말에 베빌리 역시 담담한 표정으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두 분이 제게 해주신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저 또한 디안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다음에…, 꼭.”
“다음에 꼭 다시 만납시다.”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날 대신해 베빌리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내게 손을 내밀어왔다.
난 그런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그 손을 맞잡았다.
애석하게도,
마법사들이 끼워 맞춘 구름은 얼마 안 가 비를 모두 거둬들였다.
맥레인은 그 짧은 시간 스스로 몸을 가누며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차렸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그 몸이 굉장히 왜소해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출발 준비를 마치자 오르델은 가는 길에 먹으라며 작은 보자기에 음식을 바리바리 싸 건네주었다.
맥레인은 구태여 그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감사나 인사만 건넬 뿐.
아마도 나와 그들 사이에 구축한 신뢰나 관계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으려는 거겠지.
그렇게 맥레인을 벤투스에 태운 뒤 그 고삐를 잡아끌던 나는 마지막으로 배웅해주는 두 사람을 보며 인사를 전했다.
이별은 늘 갑작스럽고 시시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예상했던 이별이었기에.
아니다,
이별은 늘 아쉬운 거로구나.
방금 막 알았다.
* * *
잎사귀가 버거운 빗물을 털어내고, 드러난 햇살에 방울진 세상은 반짝거린다.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 무거웠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맥레인은 본래의 껄렁한 말투로 돌아와 내게 이것저것 물었다.
덕분에 나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드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내 말을 들은 맥레인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정말 놀란 반응을 보이며 웃기도 하다가 어떨 땐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 짧은 사이에 진짜 무법자가 다 됐군그래.”
“그렇죠.”
이어 맥레인은 안장 가방에서 연초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려는 찰나, 그는 갑작스레 거친 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그건 아마도 몸 안에 박힌 탄환 탓이겠지.
“맥레인, 연초는 좀 삼가시는 게 어때요.”
“평생을 피워도 멀쩡한데 뭐 어때.”
“다른 게 아니라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잖아요.”
“그건 다른 이유 때문이지 연초 때문이 아니잖아.”
“논리가 이상한데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맥레인은 꿋꿋이 연초에 불을 붙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넓게 퍼지는 감색 연기.
첫 한 모금에 짧은 기침을 여러 번 하더니 두 번째부턴 금세 괜찮아진 듯 평온한 표정으로 연초를 태운다.
“그 연초엔 뭐가 들어가죠?”
“왜, 너도 펴보게?”
“아뇨, 그냥 연기 색이 유별나기에 궁금해서요.”
“이건 제즈 잎을 말린 거야. 난쟁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연초이기도 하지. 대장간에 끓는 쇠 연기보다 이 감색 연기가 더 짙을 정도로 펴 대거든.”
“맥레인은 난쟁이치곤 꽤 큰 것 같은데요.”
“이걸 이렇게 맥이네, 내가 맹수 새끼를 키웠구나.”
이죽거리는 맥레인을 보며 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런 내 행동이 싫지는 않은지 그도 슬며시 웃어 보인다.
“탄크레빌은 어떤 곳이죠?”
“인간과 난쟁이들이 반반씩 섞여 사는 곳이지. 또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가 가장 먼저 흔적을 남기는 곳이기도 하고.”
앞서 연초에 설명을 덧붙인 이유가 이거였나.
“혹, 탄크레빌에 대장간이 있을까요?”
“난쟁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없는 게 이상하지. 왜, 무기라도 바꿔보려고?”
“그럴 리가요. 이가 나가 수리를 하려고요.”
“귀 큰 자들의 물건을 잘도 수리해주겠다.”
“안 해주나요?”
내 말에 갑자기 골똘히 생각하던 맥레인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지. 근데 우린 돈이 없잖아?”
난 그런 그에게 금화 다섯 개를 꺼내 보였다.
“너 도대체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아까 거의 다 말씀드렸잖아요.”
“됐다, 말을 말자.”
* * *
베빌리는 어스름으로 기워 만든 케이프를 걸친 채 말끔하게 손질한 머리를 다시 한번 매만지며 집을 나섰다.
이웃들은 몰라보게 달라진 베빌리를 보며 감탄했고, 또 자랑스러워했다.
그간 있었던 일들이 소문으로 전해진 덕이었다.
그는 디안과의 약속을 상기하며 길드로 향했다.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구태여 그분의 이름을 이곳저곳에 상기시킬 필요는 없겠지.
오히려 그랬다간 길드에서 벌였던 일이 자작극이었다는 걸 저들이 눈치챌 수도 있다.
그저 그분의 위상을 미스터리로 꽁꽁 감싸 유지 시켜주는 것이 가장 좋은 판단일 거야.
그렇게 생각한 베빌리는 어느새 도착한 길드 앞에서 옷매무새를 매만지곤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그런 그를 발견하기 무섭게,
최근까지 벌레 보듯 무시했던 자들이 득달같이 달려 나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베빌리! 자네 왔나?!”
“기다렸습니다.”
웃긴 놈들.
시작부터 귀쟁이 새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작자들이 이렇게까지 변해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분의 말대로,
이 상황을 제대로 이용해보자.
하지만 베빌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건물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두 장정은 길잡이인 베빌리로서는 절대로 몰라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캐룸 길드의 리키 매젠과 아톰 뱅퀴시.
그들은 베빌리를 발견하곤 대번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네가 숲의 읍소를 처치한 길잡이인가?”
리키 매젠이 사납게 물었고,
“같이 임무를 수행한 자는 어디있지?”
뒤이어 아톰 뱅퀴시의 다급한 질문.
이에 베빌리는 당황하지 않고 뻣뻣이 목을 세워 답했다.
“그분께서는 떠나셨습니다.”
“허, 그런 공적을 쌓고도 그냥 가버렸다는 건가?”
리키 매젠이 허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아톰 뱅퀴시는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페룸 길드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짊어진 깃발이 예사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듣긴 했지만…, 과연.”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작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슬슬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 베빌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이보게, 그분의 존함이라도 알 수 있는가?”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아톰 뱅퀴시는 베빌리의 단호한 대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수긍했다.
“그래, 인챈트를 짊어진…, 그것도 깃발을 가진 자가 섣불리 자신을 내세울 수는 없는 법이지.”
인챈트?
베빌리의 두 눈이 슬쩍 커졌다.
말로만 들어봤었지, 디안님이 그런 어마어마한 힘의 소유자셨단 말인가?!
사실 무지했었다.
숲의 현상을 단신으로 이기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지금까지 그런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는 게.
베빌리 이 무식한 새끼, 가장 간단한 걸 생각 못 하다니!
진짜로 어마어마한 분이셨잖아?
“베빌리.”
곧 리키 매젠이 진중한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루페룸 길드는 숲의 읍소에 책정된 현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네.”
베빌리는 입이 근질거렸다.
숲의 읍소에 책정된 현상금이 얼만데?
것보다, 도대체 숲의 읍소에 걸린 트로피가 어느 정도기에 저 두 거물이 호들갑을 떠는 거야?
“하지만 캐룸 길드는 그럴 능력이 있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생각이 있다면 우리 길드로 들어오지 않겠나?”
리키 매젠의 후퇴 없는 발언에 베빌리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별자리에 속하는 캐룸 길드가 자신에게 입단 권유를 하다니,
꿈에서도 보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베빌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그분만을 위해 일하는 길잡이입니다.”
“아네, 알아. 우리가 자네를 어떻게 해서 그분과 연줄을 닿고자 하는 게 아닐세. 우린 재앙을 막은 자들의 용기가 필요할 뿐.”
가만,
설마…?
이건 디안님이 내게 주신 시험일 수도 있겠지 싶다.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종래에 내가 얼마나 성장하셨는지를 보고 싶으신 것일지도 몰라.
진정 자신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재목인지 말이야.
베빌리는 입술을 깨물며 떨림을 바로잡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 숭고한 목적이라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그분에게 슬레이어 칭호를 주십시오.”
슬레이어.
엔트로피만큼의 위상은 아니지만 강한 단일 개체를 사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 칭호는 단적으로 자신의 위업을 대외적으로 가장 간편히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뿐만인가?
이 칭호에도 분명 각종 혜택이 존재한다.
디안님께서 돌아오셨을 때,
최소한 당연한 자격은 거머쥐셔야 하지 않겠어?
“그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이름 모를 영웅을 기리는 방법은 그것뿐인데 말이야.”
리키 매젠이 웃으며 화답하자 베빌리는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어 아톰 뱅퀴시의 말이 베빌리의 귀엔 참으로 걸작이리라.
“자네에겐 두오데킴(12) 트로피의 사냥을 인도한 안내자의 칭호가 붙을 걸세.”
베빌리는 조용히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아프다.
이는 분명,
꿈이 아니라, 디안님이란 운명이 내게 찾아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