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두 무법자
저녁.
디안은 능숙한 솜씨로 모닥불을 피웠다.
그가 걸친 어두운 후드는 밤중의 기운과 같아서, 금세 밤하늘에 파묻힌 것 같은 이질적인 동질감을 보였다.
모닥불로부터 조금만 더 뒤로 물러나면 그대로 밤에 파묻혀 어디 있는지 찾기 힘들 정도로.
이어 뜨거운 물에 귀 큰 자들에게서 얻어온 곡물가루를 풀어 수프를 끓인 그는 나뭇잎으로 엮어 만든 그릇에 그것을 담아서 내게 건네주었다.
열흘인가.
그는 그사이에 이 세상에 더 능숙해져 있었다.
굳이 모든 부분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가 이미 품속에 한 줄기 바람을 품고 있다는 사실쯤은.
본디 인챈트를 품고 나서 그와 관련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최소 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재해의 힘 중 일부를 빌려 발휘할 수 있을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고작 열흘 사이에 한 줄기 바람을 품었다는 건.
역시 소용돌이를 내리쳤던 그때 그 일과 큰 관련이 있다는 뜻이겠지.
세월은 인챈트를 성장시킨다.
그리고 인챈트를 품은 자는 그 세월의 끝에 가서야 품었던 재해를 완벽히 재현해낼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러나 이런 험난한 세상에서 세월을 끝까지 거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또 세상엔 그런 세월을 걷지 않고도 가진 재해를 모두 재현해내는 자들도 있다.
디안이 바로 그런 부류이리라.
마치 세상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들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
그 가혹한 운명을 끌어안아야만 했던 자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
디안이라는 존재를 무겁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를 심지 삼아 불태우고 있는 것인가.
뭐라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은 분명 운명과 그에 따른 숙명 때문이겠지.
해서 그에게 가공할만한 힘을 보태주었고.
이렇듯 짧은 시간 안에 품속에 한 줄기 바람을 품을 수 있게 해줬을 거다.
디안이 품어야 했던 그것은 그렇게 인챈트라는 힘을 증폭시켜준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내 살아온 삶을 걸고, 과거에 했던 다짐을 걸고 확실하게 구분 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디안의 ‘재능’
그건 그를 불태우고 있는 운명도, 숙명도 범접할 수 없는 영역.
말 그대로 디안이라는 인간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꿋꿋이 읽어냈던 별의 이야기로 통찰을 가득 채운 머릿속.
학대받는 과정에서 주입받은 수많은 노래를 참고해 총명을 쏟아내는 입.
마지막으로 천부적인 검의 감각.
그래,
내가 디안에게 목을 매기 시작한 이유.
나는 젊은 시절, 운명과 숙명에 잡아먹힌 자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리고 그 말로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것에 잡아먹힌 ‘내가’ 그 말로를 걷고 있으니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지.
그래서 이번엔 그것을 비틀어보고 싶어졌어.
디안이 가진 재능으로 말이야.
* * *
깊은 잠에 빠진 맥레인을 내려다본 나는 천천히 걸쳤던 후드를 벗어 그에게 덮어주었다.
그의 얼굴엔 아직 창백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바쁘게 움직이려 하는 것을 보면, 당면한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급한 것인지 어림짐작해볼 순 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단연 순례자와 관련된 것이겠지.
그저 이름으로 들어봤을 뿐, 그들을 실제로 겪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하수인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필시 마주치게 되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상대일 것이 분명할 거다.
이 세상 모든 하늘을 움직여 날씨를 조립하는 자들이 부리는 부하라면 능히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겠어?
내일은 새벽부터 빠르게 이동하는 게 좋을 것이다.
순례자 다음으로 중요한 건 우리 가족들이니까.
탄크레빌.
그들과 관련된 소식이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는 그곳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달하기 위해선.
이내 차갑게 식은 바람이 숲으로부터 나부낀다.
그 사이에서 들려오는 잎사귀의 소리는 고요와 평온이구나.
나는 좀 더 모닥불 가까이 붙어 따듯함을 끌어안고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숨죽은 모닥불을 발로 차 흩어놓은 나는 맥레인에게 돌려받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벤투스의 고삐를 잡았다.
그런 벤투스의 위엔 맥레인이 불편함이 깃든 표정으로 연초를 꺼내 입에 물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탄크레빌로 가는 길까진 벤투스가 안내해 줄 거다.”
“벤투스가 그런 것도 기억하고 있나요?”
“물론이지, 녀석이 알고 있는 수많은 길 중 하나에 불과할 정도야.”
“정말이니, 벤투스?”
슬슬 다가와 놈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물으니 벤투스는 윗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벤투스와도 부쩍 친해진 것 같은데.”
“저희 이젠 무랑 당근을 서로 나누어 먹는 사이거든요.”
내 말에 맥레인은 놀란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건 좀 놀라운데? 이놈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단 두 개뿐이거든. 하나는 정말 호감이 생겨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요?”
“이 행동을 안 하면 상대가 뒤질 것 같아서,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음.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자 그런 내 모습을 살피던 맥레인은 비아냥거리듯 피식 웃었다.
벤투스, 그건 결국 동정이었냐.
날카로운 눈으로 벤투스를 째려보자 놈은 눈알을 굴리며 영악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나저나 맥레인, 가족들이 탄크레빌에 우리를 위한 메시지를 남겼을까요?”
“모르지, 그걸 알기 위해서 가는 거고.”
“만약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면…?”
“서쪽에 있는 에레스로 갈 거다. 거기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면 메시지를 남기곤 했으니까.”
그래, 최악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
애초에 탄크레빌에 소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와 맥레인 둘이라면 어떻게든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맥레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립지역의 균형을 깨트렸으니 상황은 늘 최악으로만 치달을 거다. 시몬의 목엔 현상금이 걸릴 테고…, 중립지역에서 현상금이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그뿐이겠어? 그와 관련된 자들을 솎아내려다가 무고한 자들만 마녀사냥당할 거다.”
그의 입으로 확실히 들으니,
그제야 실감이 갔다.
우리에게 놓인 현실이 어떤 모습인지를.
“이 모든 게…, 제 실수 때문이에요.”
“내가 말했지, 네 탓이 아니라고. 시몬이 방향을 잘못 잡았을 뿐이야. 그리고 그 점을 적극적으로 지적하지 못한 내 탓이기도 하고. 이건 그냥…, 모든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어그러져 버린 것뿐이야.”
맥레인은 다 태운 연초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남은 감색 연기를 내뱉었다.
그리곤 속 긁는 기침을 짧게 낸다.
우리는 어제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 꽤 먼 곳까지 이동했다.
그렇게 우리 곁을 질척이며 떠날 생각을 않던 안야 숲마저 떨쳐내고 마주한 구릉지는 마치 다른 세상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맥레인, 가족들과 재회하게 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죠?”
“이 지긋지긋한 중립지역을 떠나야지.”
맥레인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친 듯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배를 구해서 만을 통해 나가면 될 거야. 여의치 않으면 우리가 직접 배를 만들어서라도.”
“좋은 생각이네요.”
내 진심 어린 반응에 맥레인은 왜인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런 내 말에 동조하듯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좋은 생각이지. 기왕이면 배 전체를 하늘색으로 칠하자고. 해 뜬 하늘을 집어삼킨 바다에 그 모습이 파묻힐 정도로 말이야.”
갑작스럽게 피어난 이야기 속 웃음꽃이 제법 향긋하다.
해서 나와 맥레인은 그 향기를 제법 오랫동안 느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숲의 읍소를 해치웠던 이야기.
베빌리와의 극적인 만남.
그리고 소용돌이 이후 전해 들었던 라티아의 상황.
떠난 첫날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세세하고 자세하게 들려주니 맥레인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정적인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이른 봄에 핀 꽃이 빨리 지듯.
웃음꽃의 향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슬슬 구릉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유독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런 구름 묻은 구릉지는 찐득한 늪으로 가득 차 있었고.
숨은 들이쉴 때마다 그 습기가 콧속에 방울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불쾌했다.
난생처음 보는 작고 징그러운 짐승들은 위로 돌출된 눈을 끔뻑이며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요란한 움직임으로 도망쳤다.
“여긴 두 번 다시 발 들이고 싶지 않은 곳이네요.”
께름칙함이 묻은 내 목소리에 맥레인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한다.
“그래, 두 번 다시 발 들이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
발등 위로 꾸덕꾸덕한 진흙이 내 정강이를 뒤덮을 정도로 쌓였을 때쯤.
드디어 내 발바닥이 비교적 단단한 땅을 밟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을 더 걸어 지옥 같던 늪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게 된 나와 맥레인은 걸음을 멈춰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벤투스의 발굽에 켜켜이 낀 진흙도 모조리 털어내고 나니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탄크레빌.”
검은 때가 잔뜩 낀 이정표를 발견하고 나서야 그 뒤로 보이는 검은 연기.
거대한 산들이 부둥켜안은 그 작은 마을이 드디어 우리 눈앞에 나타난 거다.
속도를 더욱 높여 마을 입구로 향하자 두꺼운 나무로 지어진 방책 너머로부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그런 그 물음에 맥레인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방랑자.”
“가진 돈!”
“금화 두 개.”
가진 것에서 절반 이상을 적게 부른 맥레인.
그러나 안에서 들려온 대답은 제법 친절로 누그러진 말투로 변해 있었다.
“방랑자는 맥주와 모루를 빌리는 것만 허락해! 그래도 들어 올 거야?!”
“이미 여러 번 와 봤으니 빨리 열기나 해.”
차가운 맥레인의 대꾸에 곧 나무 방책이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열린다.
“볼타지는 통행료로 은화 두 개를 요구해!”
그 너머에서,
작고 뭉툭한 남자 하나가 덥수룩한 수염 속에서 짧은 팔을 꺼내 보였다.
“통행료가 두 배나 늘었잖아.”
“소식 못 들었어? 세브리가 죽었데. 거기다 극악무도한 범인들은 목격자들의 씨까지 다 말려버렸다고 하더군.”
이어지는 난쟁이의 말에 맥레인은 혀를 찼다.
“그렇다고 통행료를 두 배나 붙일 필요는 없잖아?”
“아니! 라티아에서 쏟아져 들어온 피난민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피난민이 여기까지 왔다고?”
“그래! 라티아의 규모를 생각하면 당연한 거 아니겠어?!”
비죽비죽 정돈 안 된 눈썹을 찌푸리며 인상을 쓴 난쟁이가 재차 손을 흔들자 맥레인은 졌다는 듯 자신의 안장주머니에서 은화 두 개를 꺼내 건네주어야 했다.
“볼타지는 통행료를 받았으니 너희들을 들여보낸다!”
“꼭 그런 방식으로 말을 덧붙여야겠어?!”
“인간들은 난쟁이를 항상 의심한다! 그래서 이렇게 항상 말해줘야 한다!”
“탄크레빌의 난쟁이들이란…”
맥레인은 탄식하듯 푸념하다 이내 내게 얼른 들어가자 턱짓했다.
그들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서 벤투스의 고삐를 잡아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전체가 숯으로 변한 것처럼, 잿빛으로 점철된 마을은 온통 퀴퀴한 금속 냄새만이 감돌고 있었다.
보글보글.
지글지글.
또 곳곳에선 걸쭉하게 끓는 금속들의 숨소리가 즐비하다.
오감을 밀고 들어오는 새로운 것들의 향연에 뭐부터 말을 이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
그에 대한 답을 내놓듯 맥레인은 벤투스 위에서 내려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잇는다.
“일단 뭐라도 마시자고, 이러다 목구멍이 재로 꽉 막힐 것 같으니까.”
그렇게 향한 낡고 허름한 주점 안에선,
최소 삼 일 전부터 취해있던 것 같은, 붉게 그슬린 난쟁이들이 술 냄새를 풍기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 외엔 이제 막 취하려는 난쟁이들과 몇몇 사람들뿐.
바로 비어있는 자리를 골라 앉은 나와 맥레인은 서로 눈치를 보며 주위를 살폈다.
곧 바에서 내려온 난쟁이 하나가 우리에게 접근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는다.
“여긴 락 에일밖에 취급 안 하는데 괜찮나?”
그런 그 물음에,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당연하지, 진정한 난쟁이의 술이라면 그것밖에 없잖나.”
그 목소리에 난쟁이는 뒤돌아 나타난 남성을 향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제법 잘 아는 친구 구만 그래?”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목소리.
“그럼 세잔으로 부탁하지.”
자연스럽게 우리와 합석한 그 남자는…,
“매튜…?”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