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재와 모루
쏴아아--
“서둘러! 더 늦었다간 휘말린다!”
실로 가늠할 수 없을 기세로 쏟아지는 빗줄기 가운데 시몬의 목소리가 관통하듯 울려 퍼진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곧 들이닥친 바람결에 갈가리 찢어졌다.
매튜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저 넋을 놓고 있었다.
“세상에, 별들이여.”
그것은 두 발 걷는 자들이 믿는 모든 별에 바치는 그의 감상이리라.
갈라진 하늘로부터 쏟아진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세상 일부분을 집어삼키려는 듯 이죽거리며 휘감기는 그 바람 뭉치는 일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맥레인에게 넌지시 말로만 들어 상상은 해보았지만, 그 상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인챈트의 실체가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거다.
“매튜!”
재차 이어지는 시몬의 부름에 뒤늦게 반응한 매튜는 그제야 벌어진 현실을 직시하곤 바쁘게 움직였다.
“디안과 맥레인은?! 촙은!”
겨우 시몬에게 도달한 매튜가 읍소하듯 물었으나 재키가 대신 답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간 다음에 생각하자고요, 매튜!”
앞장선 시몬은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쏴아아--
휘이익!
몰아치는 비바람은 마치 성인 남성이 옷깃을 잡고 질질 끄는 듯한 위력을 발휘하며 나아가는 세 사람을 붙잡았다.
그뿐인가,
갑작스러운 시몬의 다급한 외침.
“조심해!”
이윽고 불어난 강수를 이기지 못하고 그들 주변의 토사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늘 위엔 방금 뿌리째 뽑힌 나무가 힘없이 날아다니고 있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세 사람은 결국 무너져 다가오는 토사에 잡아먹혔다.
“서로 붙잡아! 어서!”
잔뜩 갈라진 쇳소리를 내며 소리치는 시몬의 목소리를 끝으로, 무너진 토사로부터 쓸려나간 매튜가 그대로 강물에 빨려들어 가듯 떨어지려는 찰나.
“씨…바알!!”
재키가 가까스로 매튜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빗물에 젖은 탓일까.
맞잡은 손은 힘이 실릴수록 서로 미끄러져 멀어질 뿐이다.
“재키, 손을 놔!”
“그딴 개소리 씨부릴 거면 입 다물어요, 매튜!”
“이러다 다 빠져 죽어!”
“보스! 얼른!”
이어 시몬까지 들러붙어 떠밀려가는 매튜를 붙잡아보지만, 매튜의 눈엔 그들이 밟고 있는 토사마저 무너지려 하는 조짐만이 보일 뿐이다.
그렇게 결국 그 둘은 매튜의 손을 놓쳤고,
그는 쏟아지듯 떨어져 물살에 휩쓸렸다.
* * *
“그래, 너희들이 그런 표정을 지을 만하지. 나도 내 눈꺼풀이 다시 들렸을 줄은 몰랐으니까…, 정말 별들이 나를 보살펴줬다고 밖엔 설명할 수가 없어.”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매튜.”
맥레인은 듣는 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 옆에 잠자코 있던 나도 매튜 아저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 뒤로 식은땀을 흘려보내야 했다.
참으로 천운이 아닐 수가 없다.
더군다나 어느 한 군데 심하게 다치지도 않고 이렇듯 약속한 것처럼 탄크레빌에서 재회를 할 줄이야.
순간 나와 맥레인은 눈을 마주치며 서로 동공 안에 반짝이는 일말의 희망을 엿보았다.
“다행이라는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 맥레인 그리고 디안. 정말 너희들이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야.”
그래, 우리가 매튜 아저씨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만큼 아저씨도 우릴 보면서 그만큼 벅찬 감정을 느끼셨을 테지.
“이제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맥레인과 매튜 아저씨 앞에 맥주잔이 다섯 잔씩 쌓일 무렵.
들이켠 술과 함께 안주처럼 나누어 먹었던 이야기도 슬슬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맥레인은 그런 이야기 속에서 단 한 가지를 의도적으로 매튜에게 숨겼다.
총상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몸 상태가 바로 그것이었다.
해서 매튜 아저씨에게 덧붙여 설명하려 했지만 맥레인은 되려 그런 날 제지하듯 슬쩍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맥레인이 왜 그랬는지 조금이나마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순위.
맥레인은 일단 자신의 몸보다 가족들과의 재회를 더욱 우선으로 두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런 맥레인의 생각을 마치 대변이라도 하듯,
매튜 아저씨가 남은 맥주를 털어 넘긴 채 씁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면서 라티아 쪽 피난민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시몬 바스티유에 막대한 현상금이 걸렸다고 말이야.”
이에 맥레인이 기가 찬다는 듯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답했다.
“세브리가 대단한 거물이긴 했나 봅니다?”
“세브리 때문이 아니야, 소용돌이로 인해 죽은 깃발 가진 남작들 때문이지. 중립지역에 현상금이 걸릴 이유가 그것밖에 더 있겠나.”
결국엔 깃발을 건드린 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나.
아니, 그 깃발을 걸고 중립지역에서 자행한 부정이 들킬까 무서워서겠지.
애초에 책에서 읽은 중립지역은 공공적인 목적의식이 생길 리 만무할뿐더러 현상금이라는 개념 자체도 성립하기 힘든 곳이다.
두 제국의 전쟁으로 버려진 땅에서 그럴 의지를 피력할 단체도 남아있을 리 없고.
맥레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연신 까칠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두 개의 바다 건너 용병들까지 동원해 중립지역을 이 잡듯 뒤지겠군요.”
“그러나 결정적으로 시몬 바스티유를 특정할 근거가 그들에겐 없어. 애초에 한낱 중립지역의 무법자들에게 관심조차 없던 그들이 우릴 잡겠다고 해봤자 덜컥 잡혀주겠냐만은…,”
“반대로 말하면 근거를 잡을 법한 집단과 손을 잡을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데…,”
맥레인과 매튜 아저씨가 머리를 맞대고 말을 잇다가,
끝내 어두워진 표정으로 동시에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순례자들”
시몬 바스티유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인 소용돌이를 주축으로 순례자와 깃발들이 고용한 용병들이 합세한다면.
정말로 시몬 바스티유를 특정해 찾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순례자는 깃발도, 그렇다고 변호해 줄 단체조차 변변치 않은 인챈트를 얻기 위해.
깃발 가진 이들은 묻어버릴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래서 매튜, 삼 일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가족들에 대한 소식은 들은 게 있습니까?”
“아니…, 없어. 포키스의 새가 오길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야. 그렇다고 여기서 우리 연락책에 전서구를 날렸다간 순례자들이 냄새를 맡고 쫓을 테고.”
“그렇군요…,”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만났잖나, 정말 별들의 가호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운으로 말이야. 마치 운명처럼!”
매튜 아저씨는 내게 슬쩍 윙크하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매튜의 말에 맥레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렇게 셋이 만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할 테니.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매튜 아저씨를 보는 순간 다 죽어가던 희망의 불씨에 힘차게 입김을 불어 넣는 기분이 든다.
당장 내일 해가 뜸과 동시에 가족 중 누군가가 합류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필시 우리의 상황은 절망적이기보단 희망에 더 가까웠다.
* * *
우린 난쟁이를 피해 같은 인간이 운영하는 여관에 방을 빌렸다.
아무래도 난쟁이들에겐 인간은 상기되기 쉬운 존재였으니까.
이어 나는 맥레인의 부탁을 들어줄 겸 검을 수리하기 위해 여관을 나섰다.
거인의 가죽으로 만든 검집은 분명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물건이었지만 적어도 그 안에 들어있는 것보단 덜할 거다.
거기다 어스름에 가까운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니 누군가 유심히 지켜보지 않는 한 그 특별함은 알아채기 힘들겠지.
물론 날이 밝았다면 누군가의 이목을 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떨어진 시점이었고 해서 마음만 먹으면 당장 눈앞에 골목길에서 내 존재를 지워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럴 정도로 걸친 어스름은 한낱 어둑한 골목의 그림자에도 잡아먹힐 만큼 태연자약한 땅거미에 가까워.
저녁이 된 탄크레빌은 별안간 시끄러웠다.
깡! 깡!
탕탕!
드르륵드르륵!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두드림에 답변하듯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여기저기서 두서없이 울려 퍼졌고, 형형색색의 자욱한 연기가 수많은 굴뚝 위에서 탑을 쌓고 있었다.
무엇보다 망치질뿐 아니라 밖에서 안이 다 보이는 공방들에서는 거대한 톱니바퀴로 바삐 움직이는 기계장치의 소음이 참으로 다채로웠다.
그것뿐이게?
기계와 망치질의 반동으로 삐걱거리며 출렁이는 간판들은 마치 재미난 책에 나열된 소제목들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
[모루와 망치의 불륜]
[깡! 적의 두개골도 깡!]
[은화 4개 달라, 그거면 끝]
[난 방패만 만들어.]
[락 에일 한잔에 망치질 열 번]
뭐랄까.
난쟁이들은 그 투박한 생김새만큼이나 발휘하는 어휘도 단단한 돌멩이 같은 느낌이 가득했다.
돌멩이를 던지면 날아간다.
날아온 돌멩이를 맞으면 아프다.
이처럼 간단명료하기 그지없는 어휘가 난쟁이들의 매력 같구나.
베빌리와 마마 오르델을 떠올려보면,
그들은 숲을 동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숲의 이야기를 대변하듯 말했었지.
바람결처럼,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또 지긋이 박힌 뿌리처럼.
반대로 난쟁이들은…,
광물처럼, 돌멩이처럼.
딱딱, 간결인 건가?
그렇담 사람은 어떨까?
내가 겪은 바로는…
모르겠다.
과거에 겪은 사람과 지금 겪고 있는 사람의 편차가 너무 심했으니까.
아무래도 그 ‘모르겠다’가 인간이 가진 어휘에 가장 걸맞은 답은 아닐까?
그렇게 정처 없이 탄크레빌을 거닐며 생각에 잠겨있다가,
문득 술에 취한 두 사람이 한 골목길에서 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뭐라도 홀린 듯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취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 너머엔 대장간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다시 걸음을 돌려 걷는데 마침 한참 어휘에 관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쯤 놓쳤던 허름한 간판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재와 모루]
한 줄기 빛만이 새어 나오는 작은 대장간.
그 안에선 망치 소리도, 그렇다고 기계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처음은 호기심,
그다음은 ‘재’라는 단어를 통해 느낀 묘한 동질감.
낡고 삐딱하게 기울어진 나무문을 당겨 열자,
끼이익.
마치 손님이 왔다는 듯 우렁차게 삐걱거리는 문.
그리고 그 안엔 춤추는 작은 벼락 조각을 담은 유리병을 조명 삼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난쟁이가 보였다.
“실례합니다.”
문소리에도 꿈쩍하지 않던 난쟁이에게 이번엔 내가 소리 내어 인기척을 냈음에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 근처로 다가가자 아직 뜨거움을 머금고 있는 화로와 그 앞에 투박한 모루가 보였다.
“이봐요.”
그의 근처에 다가가 큰 목소리를 내자,
드디어 난쟁이가.
“크어어억, 커어… 크어어억…”
자고 있었구나.
입에서 나온 침이 수염을 타고 책을 흥건히 적신 것을 보니 꿀 같은 잠에 빠진 지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
“이봐요!”
그의 귀에 대고 큰 소리를 내자 그제야 난쟁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떡 일어났다.
“흐미 썅…!”
“으악!”
화약에 뛰쳐나간 총알처럼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튀어 오른 난쟁이에 나도 제대로 놀라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말투를 내뱉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허…, 무기 수리를 맡기러 왔습니다.”
“미안하지만 저희 재와 모루에선 일반적인 물건들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럼 오히려 더 잘 됐군요.”
난쟁이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곧 그는 침에 젖은 책을 덮으며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의자에서 펄쩍 뛰어 내려왔다.
그런 그가 읽었던 책의 제목은,
…애무하는 열두 개의 강철…?
난쟁이들의 소설인가?
“봅시다, 무슨 물건인지.”
꽤 까탈스럽게 반응하는 난쟁이에게 조심스럽게 검을 내밀자 그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거인 가죽으로 만든 검집이라? 보나 마나 참으로 흔한 양품을 가지고 명품이라 호들갑 떠는 그런 물건이겠군.”
그 안에 든 내용물을 보면 아마 생각이 달라질걸.
대답 대신 검집에서 자루를 잡아 그날을 꺼내 보여주자,
그의 얼굴이 검집에서 뛰쳐나온 은빛에 젖는다.
그는,
운다?
감격한 듯한 표정으로.
“이…이터누티…!”
아니, 반한 듯한 표정으로.
잘못 왔을까?
왜 이때 그가 읽었던 책 제목이 뇌리에 스치는 건진 모르겠지만…,
“수리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난쟁이는 새삼 진지한 표정으로 즉답했다.
“이 난쟁이는 무료로 해줍니다.”
…나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