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72화 (72/365)

72화. 재와 모루 (2)

“난 이런 물건을 기다려왔어…!”

난쟁이는 검집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은빛을 보며 자신의 수염을 쥐어뜯듯 잡았다.

그리곤 부랴부랴 책상 위에 어지럽혀진 물건들을 뒤적거리더니 알알이 겹쳐져 있는 괴상한 안경을 뒤집어쓰곤 대뜸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건 뭔가 주먹을 내지르듯 어색한 행동에 가까웠는데.

“라돈! 오색 강철 소속 수석 기술자요.”

그러니까, 지금 악수하자는 거지?

“난쟁이들은 악수를 안 해, 손 대신 맥주잔을 부딪치지. 하지만 자네는 인간이고…,”

“디안, 보다시피 인간입니다.”

난쟁이의 어휘를 흉내 내며 그의 악수에 얼른 응하자,

그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흡족한 표정으로 구불구불하고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세상에 여기서 이터누티로 벼린 검을 볼 줄은 몰랐는데!”

라돈은 뒤늦게 내 표정을 살피더니 한껏 주눅 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다시피 이곳 탄크레빌은 난쟁이 조합이 세운 마을이라 귀 큰 자들이랑은 거리가 먼 곳이니까…, 하물며 그들의 손에 벼려진 무기들은 더욱 보기 힘들지.”

순전히 대장장이로서 흥미를 느낀 거였나.

“놈들은 귀 큰 자들이 만든 무기를 봐도 허접한 물건이라며 애써 부정하지만 나는 달라! 그들의 기술력은 정말 대단하거든!”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는 조심스럽게 내 손에 들린 검을 향해 다가왔다.

이어 허락을 구하는 그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자 정말이지 흩어진 구름을 모아 잡듯 조심스럽게 자루와 날 부분에 손을 댔다.

그 이후론 더듬지도, 그렇다고 자세히 살피는 시늉도 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가는 라돈.

“깊은 숲에서 만들어진 거로군…, 하지만 깊은 숲에서 나온 검치곤 품질이 더 좋아 보여. 아마도 야금술 쪽에 장인이 개입한 물건인 것 같은데…,”

“야금이라면 금속을 정제하는 쪽을 말하는 겁니까?”

“잘 아는군! 하긴 이만한 검을 다룰 정도면 그와 관련된 지식도 상당할 게 당연한 거겠지만.”

“해서, 수리하실 수 있겠습니까?”

“말했잖나, 라돈은 무료로 해준다고.”

“중립지역에선 성립될 수 없는 이야기잖습니까.”

내 즉답에 라돈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내가 너무 흥분했었어!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라돈은 별안간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바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 잠깐! 그러니까! 음!”

“진정하시죠.”

“아니! 진정할 수 없어! 쇠 만지는 난쟁이라면 더더욱 진정할 수 없다고!”

엉뚱하고 이상하고 또 괴팍해 보이는 그가 이내 머릿속을 정리한 듯 주름 가득한 두 눈을 바짝 치켜떴다.

“그러니까 난 이터누티를 엄청나게 기다렸어!”

왜 다시 이야기의 진행이 도돌이표에 부딪히는 건데?

“라돈, 진정하고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본론을 내놓는 게 좋을 겁니다. 전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요.”

“미안! 미안하네!”

내 단호한 말에 라돈이 작고 도톰한 양손을 펼쳐 보이며 휘적거린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여 나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수리할 수 있어! 있고말고! 그러니까 이터누티로 벼려진 물건들은 특수한 방법을 거치지 않으면 수리할 수 없어!”

“그거 다행이군요.”

“하지만 보아하니 이만 조금 빠진 것 같은데 이 정도는 수리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간단히 고칠 수 있다 이 말이지!”

난쟁이도 급하면 말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구나.

“그런데 어째서 돈을 받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돈은 문제가 아니야! 엄… 그러니까!”

라돈은 백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는지 내게 손짓하며 공방 구석진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어서 책 대신 광물 덩어리들이 수납되어 있던 책장 앞에 멈춰선 그는 있는 힘껏 그것을 밀어 뒤에 숨겨진 밀실을 거리낌 없이 내게 보여주었다.

그 안엔,

형형색색의 금속들로 유려하게 빚어진 한 여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와…”

그것을 눈에 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탄성.

이런 내 감탄이 당연하다는 듯 두꺼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스러워하는 라돈.

“이건 내가 십 년에 걸쳐 만든 이데아의 형상이야.”

설명을 들은 내게서 모르겠단 눈치를 느낀 걸까.

그는 또다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열변을 토해냈다.

“잘 못 들었나? 이데아의 형상이라고! 용의 시대, ‘상상 문화’의 부흥을 주도했던 대기업 ‘디르픽’의 상징이자 영원한 히로인!”

“라돈, 세상에 당연한 지식 같은 건 없습니다.”

결국엔 참지 못한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몰랐다고 해서 폄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당신이 만든 이 작품은 사전 지식이 없는 저조차 그와 관련된 것을 알고 싶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에게 느낀 감상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그런 내 감상에 뭔가 새로운 것을 느꼈는지.

되려 얼굴을 붉히며,

“그…그렇지. 그런가? 과연…, 어쩐지 자네의 눈이 유독 영롱한 이유가 있었구만…, 헛, 험.”

몸 둘 바를 모르고 버릇처럼 덥수룩한 수염을 쥐고 당길 뿐이다.

세 종족을 통틀어도 구현될 수 없는,

가상의 미가 들어간 그 형상은 모든 이들이 사랑하는 이야기 속에 부합할 만한 주인공다웠다.

내가 용의 시대 적에 살았었다면 필시 어린 나이 때부터 그녀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자네의 성숙함이 날 부끄럽게 만드는구만.”

라돈은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의 끌림이야말로 창작자에게 가장 필요한 연료라는 걸 잊고 있었어.”

“그런데 눈 부분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나 봅니다?”

형형색색의 금속으로 점철된 화사한 형상 속, 허전한 잿빛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두 눈동자를 보며 묻자,

그는 이내 시원스럽게 설명을 이었다.

“이데아는 청명한 밤하늘, 달과 같은 은빛의 눈동자를 가졌지. 하지만 이곳에선 그런 눈동자에 부합하는 재료를 구할 수가 없었어. 해서 형상을 완성 시킬 수가 없었다네.”

“그녀의 눈동자에 부합하는 금속이 이터누티였군요.”

“마치 내 설명을 가벼이 거들어 주는 것 같구만, 자네의 그 말에 담긴 한 글자 한 글자가 말이야.”

“그래서 정확히 원하시는 게 뭡니까?”

“자네의 검으로부터 이터누티 한 방울을 거두어가고 싶네. 그 비워진 한 방울만큼의 균형은 내가 전보다 더 완벽하게 다듬어 줄 자신이 있어.”

87년 셀레어.

재해를 품은 그것은 용의 시대 이후를 관통하는 무시무시한 병기지만,

동시에 나라는 존재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매개로서 가장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이 병기로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한 조각으로서 보탬이 되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마땅히 검을 든 자로선 느껴볼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라도 거절할 이유가 없으리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숙고한 끝에 나온 내 대답에,

라돈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의 작업장엔 마땅히 보여야 할 불꽃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날을 다듬을 숫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그가 작업장에 가져온 것은 오래된 나무토막.

그것을 모루 위에 올려놓은 라돈은 이어 내게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터누티는 본디 나무의 수액이라네. 즉 본 성질은 액체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그래 강철의 연대기라는 책에서 그 내용을 봤던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사실 그러한 정보는 책을 통해 얼마든지 볼 수는 있지만, 그와 관련한 가공법 같은 것들은 엄격한 통제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는다네. 게다가 유통되는 이터누티의 9할은 헤르페 숲에서 독점하다시피 관리하다 보니 막상 이터누티를 접하는 자들은 이미 가공이 끝나 금속 형태가 된 것들밖에 볼 수가 없어.”

“그런데 라돈은 마치 이터누티의 가공법을 알고 계신 것 같군요?”

내 말에 라돈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적, 나와 같이 이데아를 좋아하던 귀 큰 자가 있었지. 전쟁 초기, 혼돈으로 버무려져 막 탄생한 중립지역 때나 가능했었던 타종 간의 교류는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네.”

인챈트에 얽힌 이야기만 봐도,

타종 간의 결합은 곧 그런 무시무시한 병기를 만들어내는 결과가 성립할 수가 있기에 서로가 더욱 배타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내 생각을 반영하듯,

라돈의 이어진 씁쓸한 말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어, 흐릿했던 중립지역의 모양이 얼추 잡혀가기 시작하면서 늘 그랬듯 종족 간에 벽이 생겼다네. 나는 어느새 조합에 소속된 난쟁이가 되었고, 그 귀 큰 자는 작은 숲의 구성원이 되어 더는 서로 교류할 수 없었지.”

그는 추억을 회상하듯 활짝 웃으며 모루 위에 올려놓은 나무토막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그가 내게 건네준 물건이네, ‘이터누아브르 나무’의 토막 낸 뿌리야.”

“반대로 라돈은 그에게 합금과 관련된 무언가를 건네주었겠군요.”

“자네는 참 눈치가 빠르구만.”

유추해보면,

왜 그가 그런 대단한 작품을 밀실에서 비밀스럽게 만들고 있었는지 이제야 납득이 간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구나.

세 종족 간의 약속으로 빚어진 인챈트처럼.

라돈의 열정도 인간인 나의 개입으로서 완성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란 그 사실이.

정말 시대가 만든 공식이라는 건 운명같이 모호하면서도 확연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

“그럼 작업을 시작하겠네.”

라돈은 곧이어 셀레어를 나무토막 한가운데에 박아넣었다.

“이 정도로 순수한 이터누티라면 태초의 자리로 되돌아갔을 때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할 걸세.”

그 말대로,

나무토막에 박힌 셀레어로부터 허연 연기가 연거푸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를 맞춰 반대편 나무토막에 작은 구멍을 뚫은 라돈은 정성스럽게 그 안에서 흘러나온 은빛 한 방울을 유리병 안에 담아냈다.

분명 나무토막으로부터 맺힌 그것은 액체였지만,

딸그락.

유리병 바닥에 떨어졌을 땐 단단한 금속으로 변해 있었다.

이어 토막을 모루 위에 천천히 돌리기 시작한 그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말을 잇는다.

“뿌리 토막이 박힌 검의 주형틀이 되어 줌과 동시에 액화된 검날이 손상된 이를 자연스럽게 채워 줄 거야.”

이제 라돈은 토막에 꽂힌 셀레어의 날 부분을 통째로 화구에 넣었다.

그러자 화구에 남아있던 불씨가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딱! 딱!

사정없이 갉아먹었고, 그렇게 불붙어 사그라지는 나무토막 안에서.

라돈은 셀레어의 자루를 잡아 빼 든다.

스릉-

새롭게 벼려진 날이 바람을 할퀴었다.

자루 위에 솟은 날은,

전보다 조금 더 밝은 은빛을 토해내며 나간 이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제 쇠줄을 가지고 자루와 가드를 살짝 갈아 균형을 완벽하게 조율한 라돈이,

종래에 내게 검을 건넸다.

* * *

“라돈,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

“그…, 제가 왔을 때 읽고 계셨던 책 말입니다.”

“크흠! 그건..!”

괜한 걸 물었나.

“환상이 듬뿍 들어간 소설이라고만 알아줬으면 좋겠군.”

에둘러 표현하는 라돈의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내게서 다소 오해의 소지를 느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항변을 보태는 라돈.

“그러니까, 이데아가 열두 가지 강철을 합금하는 그런 내용의 소설이야…, 뭐…, 아주 조금 외설적인 복장을 하고 작업을 하기도 하는 그런…”

“끝까지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돈. 제가 괜히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괜찮네, 난 절대 실수하지 않아. 이날만을 고대해왔으니까.”

라돈은 그렇게 막,

달군 화로에 겨우 녹인 이터누티의 빛을 이데아의 눈에 담아냈다.

그렇게 라돈의 절실한 열정은,

기어이 한 형상의 혼을 완성 시켰다.

이후 라돈과 짧고 담담한 인사를 나눈 나는 밖을 나섰다.

늦은 밤.

잿빛으로 점철되었던 탄크레빌은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니 오묘한 은빛으로 반짝였다.

마치 재와 모루에서 완성된 찬란함처럼.

* * *

“맥레인, 자네 기침이 너무 잦은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 것 맞나?”

“이곳이 탄크레빌인 걸 어쩌겠습니까.”

맥레인의 변명에 매튜는 말없이 한참이나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나저나 매튜, 슬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이곳에 더는 시간을 버릴 수는 없으니.”

“해서 말인데 매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 뭔데 그런가?”

맥레인은 제법 촉박한 표정으로 매튜에게 한참이나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긴 이야기의 끝에서 매튜는,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군, 그때쯤이면 가족들 모두가 다 모여있을 테니.”

식은 웃음과 함께 긍정적인 뉘앙스를 비추며 화답했다.

이에 안심한 듯 무거웠던 숨을 내쉰 맥레인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예상하신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마무리될 겁니다, 그이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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