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일몰
아침이 되자 맥레인은 무서운 기세로 기침을 내뱉었다.
그 기침은 분명 어제 들었던 것보다 더욱 깊어져 있었다.
어제 그에게서 부탁받아 지어온 약을 넘기고 나서야 기침은 겨우 진정되었지만, 그 잠깐의 기침에 시달린 맥레인의 얼굴은 처참하게 질려있었다.
그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해서 그런 그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나는 오늘 작정하고 그를 설득하리라 마음먹었다.
나 혼자론 버거울지 몰라도 매튜 아저씨와 함께 설득한다면 그도 생각을 달리하겠지.
그런 내 생각을 알고 있는 듯,
이른 아침부터 깨어 계셨던 매튜 아저씨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옆에서 맥레인을 잘 보조해주거라, 디안.”
그러나 매튜 아저씨의 말은 내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게 무슨…?”
“어제 디안 네가 없을 때 맥레인과 이야기를 나눴지, 보다시피 맥레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그도 치료 없이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게 먼저 말하더구나. 잠시 몸을 치료하고 오겠다고 말이야. 그러니 네가 동행해서 그를 잘 보조해주거라.”
그랬었나.
그래, 잘됐어.
일단은 치료가 우선이니까.
그런데 어찌 저 말에 매튜 아저씨 본인은 포함되어있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매튜 아저씨는요?”
“난 가족을 찾아야지, 이쯤이면 포키스 역시 흩어진 가족을 찾기 시작했을 거야. 그런 그의 수색에 박차가 가해지려면 이 몸이 눈에 뜨일 만한 곳을 골라 움직여줘야지.”
매튜 아저씨는 특유의 포근함 속에 심어진 단호함을 내게 엿보이며 말씀하셨다.
“그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그 말인즉슨 가족이 다시 모이는 건 이제 시간문제라는 거다. 그러니까 이 늙은이 걱정은 너무 안 해도 돼.”
그리곤 언제나 그렇듯, 한쪽 눈을 감으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신다.
“보다시피 별들이 날 보살피고 있으니까.”
난 그런 그의 유쾌함에 결국 웃음으로 화답해야만 했다.
“참, 디안.”
이어 매튜 아저씨는 낡고 허름한 외투를 걸치며 날 불렀다.
“맥레인은 널 매우 신뢰한단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걸 꼭 알아두거라.”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매튜 아저씨.
소용돌이를 내리치던 그때,
날 검은 잉걸불 속에서 건져 올려준 사람이 맥레인이라는 걸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이야길 매튜 아저씨께 직접 들으니,
뭔가 제대로 인정받은 기분이네.
“예, 매튜.”
* * *
“무기는 잘 수리했냐? 또 호구같이 바가지를 뒤집어쓴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내 말을 못 믿겠다는 듯, 벤투스 위에 올라탄 맥레인이 대뜸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그 닦달에 못 이겨 품에 있던 검을 빼 들어 건네자 그는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균형을 확인한다.
그러더니 살짝 콧방귀를 뀌고는,
“잘 받은 것 같군.”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그나저나 맥레인, 다음 목적지는 정한 겁니까?”
“그래,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이지.”
순례자들이 쫓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치료에 전념하려면 확실히 그런 장소가 필요하긴 할 텐데…,
“그런 곳이 있기는 합니까? 이 중립지역에?”
“응, 우린 ‘아비베오’로 갈 거다.”
“거기로 가면 정말 치료받을 수 있는 게 확실한 거죠?”
“왜 그렇게 질문이 많아?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맥레인이 스스로 생각을 바꿀 줄은 몰랐으니까요.”
일부로 날카로운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지만 그런다고 그의 의중을 떠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성가시다는 듯 눈썹을 찌푸린 맥레인의 대꾸에 내가 먼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해야만 했다.
이내 매튜가 막 헐값을 주고 산 말 두 마리를 이끌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맥레인, 가서 요양이나 실컷 하다 오라고. 눈에 뜨일만한 짓은 자제하고 말이야. 디안, 네가 잘 감시해, 알겠지?”
“디안 앞에서 절 애 취급하면 얘가 무슨 생각으로 절 대하겠습니까?”
쉽게 볼 수 없는 맥레인의 투박하고 서툰 투정.
분명 매튜 아저씨에게만 보여주는 그의 모습이리라.
그러나 매튜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 그 물음에 답한다.
“가족으로 대하겠지.”
이윽고 매튜 아저씨를 따라 말 위에 올라탄 나는 맥레인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런 우리 둘을 뒤로한 채 고삐를 돌린 매튜 아저씨는,
“먼저 가족들을 만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서두르도록 해, 맥레인. 디안 이따 보자꾸나.”
짧게 손을 들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렇게 멀어져가는 매튜 아저씨의 뒷모습을 뒤돌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 *
탄크레빌 인근의 늪을 빠져나오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각자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을뿐더러 바람기름을 발라 이동한 덕에 발굽이 늪에 빠질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람기름을 이용한 이동은 말뿐만 아니라 안장 위 기수에게도 큰 부담이 가는 행위였다.
비질라에게 빌려보았던 책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인데 이 바람기름은 본래 돛 달린 배나 풍차를 위해 쓰는 연료란다.
그 말은 곧 발휘하는 동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일 테고 해서 이것을 말발굽에 발라 바람을 박차게 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반동이 클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반동이 큰 만큼 기동성만큼은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거친 삶을 살아가는 중립지역 무법자들이 이 방법을 애용하는 이유가 다 있는 거지.
맥레인의 말대로 바람기름을 이용한 승마는 이젠 중립지역 무법자들의 상징에 가깝기도 하고.
어쨌든, 이러한 이동이 가능했던 건 약으로 인해 기침 증상이 잠시 완화된 맥레인 덕택이었다.
난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글쎄.
그의 고집은 그가 가진 검술만큼이나 나로선 도저히 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장시간 바람을 박찬 덕에 말들도 지쳤고, 동시에 맥레인도 부쩍 힘들어 보였지만,
그에겐 당장 늪을 빠져나왔다는 것에 대한 안도가 더 커 보였다.
하긴,
늪과 안개가 뿜어내는 무거운 공기는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그 폐부가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인데.
몸 상태가 여의치 않은 맥레인은 어떻겠어.
그렇게 늪을 빠져나온 직후 맥레인은 오랜만에 여유로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아비베오로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어.”
“어디요?”
“아셍트, 탄크레빌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야. 그곳에서 내 증상에 대한 처방을 받은 뒤에 아비베오로 출발하자.”
“아비베오에서 치료하시는 것 아니었나요?”
생각해보니까.
“애초에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있기는 한 겁니까?”
따지듯 묻자 맥레인은 냉정한 표정으로 내게 몰아치듯 말을 이었다.
“아비베오는 귀 큰 자들의 구역이야. 그래서 우리 인간의 기준에선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일 수밖에 없지. 아셍트에서 처방을 받으려는 이유는 아비베오로 향하는 시간 동안 증상을 조금이라도 더 완화 시키기 위해 가는 거다. 이제 알겠냐, 디안?”
이윽고 눈썹을 찌푸리며 날 째려보던 맥레인은,
“왜,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라도 있는 거야?”
더는 내게 반문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이 물었고.
“아니에요, 맥레인. 그럼 빨리 가죠.”
난 그런 그의 물음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르겠다, 그에게 수긍을 전하는 와중에도 뭔지 모를 찝찝함이 느껴지는 건.
* * *
벌거벗은 가지.
알록달록한 낙엽을 기워입은 땅.
쓸쓸한 바람.
유독 높이 뜬 구름.
세상 식은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가을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계절에서 우러나온 진한 쓸쓸함에 동화되기라도 한 듯 나와 맥레인은 가는 길에 그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막판에 내게 모질게 굴었던 것을 후회하는지,
그는 이따금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결국 다시 입을 꾹 다물기를 반복했다.
반대로 은연중에 느껴지는 찝찝함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의심을 드러냈던 나도 벌써 몇 번째 운을 뗄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런 정처 없는 우리 둘을 맞이한 건 낡은 이정표.
쩍쩍 갈라진 팻말엔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아셍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드디어 도착했군.”
그것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 어색하게 입을 연 맥레인은 혀 안에 남아있는 떫은 무안을 털어내기 위해 서둘러 연초를 꺼내 물었다.
“어서 진료부터 받죠, 맥레인.”
아셍트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또 구성원 전원이 인간인 마을의 절반은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밭에서 자라나는 것들은,
“뭘 키우는 거죠?”
“모드롤. 엄청나게 강한 마약의 일종이지.”
전혀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맥레인의 말에 나는 생각을 고쳐야만 했다.
“마약이라곤 하나 몇몇 이들에겐 둘도 없는 명약이기도 해, 효과가 아주 괜찮은 진통제거든.”
맥레인,
그만큼 품고 있는 고통이 거대했습니까?
“그럼 이걸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거군요.”
“아비베오는 여기서 거리가 꽤 머니까.”
이제 맥레인은 말에서 내려 낡고 허름한 의자 하나를 골라 앉은 채 내게 손짓했다.
“난 좀 쉬고 있을 테니 네가 대신 가서 모드롤을 좀 구해와. 약제로 만들어 파는 정상적인 상인들이 대부분이니까 부담 없이 사 올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맥레인.”
그 말을 들은 나는 방금 막 타고 온 말의 고삐를 기둥에 묶고서 큰길을 가로질렀다.
* * *
디안이 저만치 멀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애써 잠재운 고통이 깨지 않게 상체를 숙이며 조심히 일어나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다.
20년.
무법자란 이름을 가지고 살아온 시간.
내 몸에 묻은 과거의 흔적들이 희미해지는 동시에,
지닌 기억만큼은 반대로 선명해지는 시간.
그러나 선명해지는 기억 가운데 유일하게 점점 더 흐릿해져만 가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내가 했던 다짐으로 말미암아 등 돌려야 했던…, 빛나는 것들.
그런데 그것들이 어느 날부터 서서히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
디안을 만나고 나서부터였을 거다.
그는 내 흐릿한 무언가를 밝힌 채 이것이 무엇이냐 질문하는 빛과 같은 존재였다.
처음은 검으로, 다음은 그를 잡아먹은 기구한 운명으로.
종래엔 젊은 시절 내가 갈망했던 재능으로.
녀석과의 동질감으로 꽁꽁 묶여버린 나는 이제 묻고자 한다.
“이게 누구야? 지금 중립지역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 시몬 바스티유의 집행자 아니야?!”
낡은 건물.
그 안에서 주름진 노인 하나가 나와 나를 반긴다.
“이몬, 잘 지냈나.”
“밤이라도 샌 건가? 얼굴에 왜 이리 달빛을 칠하고 왔어?”
“이죽거리기는, 이 얄미운 늙은이 같으니.”
서로 간에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잡고 어깨를 부딪쳐 인사를 나눈다.
아셍트는 맥레인이 무법자 인생을 살아가던 초기,
시몬의 결정으로 어느 갱단으로부터 구한 마을이다.
지금에 와선 웃긴 얘기지만, 시몬 바스티유는 의적을 표방하며 활동하는 조직이었고.
해서 악질적인 갱단을 찾아내 말끔히 청소하는 역할을 도맡아 했었지.
아셍트는 그 첫 발자국 같은 곳이었다.
물론 이곳은 내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것’을 처음 접한 곳이 여기였으니까.
“이몬, 자리는 남았나?”
“언제나 남아있지, 이 작은 마을엔 말이야.”
내 물음에 이몬은 곧장 턱을 까딱이며 건물 내부 으슥한 곳을 가리켰다.
그렇게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 나는 자연스럽게 걸친 외투를 벗고 천천히 의자에 앉아,
마주 서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맥레인, 진짜 너 못나게 늙었구나.”
거울에 비친 이 초로의 남자는 왜 이렇게 초췌해져 있는 거야.
이내,
방 내부에 스멀스멀 흐르기 시작한 특유의 향기를 품고 있는 연기.
그리고 그 연기 사이로,
날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울 속 맥레인.
“오랜만이야.”
인사를 건네니 거울 속 녀석이 같잖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됐고, 연초나 좀 피워 봐.”
참 싸가지 없는 놈이라니까.
난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품에서 연초를 꺼내 물었다.
그러자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유순한 표정으로 순순히 그 움직임을 따른다.
그러나 연초를 한 모금 들이킨 이후엔 제멋대로 움직이며 내게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린 죽어가고 있어, 지금도 천천히 확실하게.”
“알고 있어.”
“봄 닮은 햇살 아래 반년 정도 요양하면 나을지도 모르지.”
“그거 좋지 기왕이면 잘게 부서지는 파도가 있는 곳에서 하자고…, 이런 씨발, 그런 게 잘도 가능하겠다.”
내 푸념에 거울 속 내가 이어 묻는다.
“후회해?”
그 질문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거울 속 나는 정말이지 나다운 모습으로 말했다.
“그럼 끝에 가서도 그 후회가 한 점 나오지 않게 하자고.”
조금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하네.
살짝 칭얼대는 모습도 보여주지.
그럴 수 있는 거잖아.
난 거울 속 내 모습과 눈을 마주치며 짧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