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운명의 노래-74화 (74/365)

74화. 일몰 (2)

알고 있다.

디안은 내게 일부러 속아주고 있다는 걸.

그가 내게 보였던 의심은 모두 다 합리적이었고 그러한 의심에 대한 내 답들은 모두 감정적이었다.

그러나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내 연기가 오히려 자백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어주었을 텐데도,

디안은 내 말을 듣기로 작정했는지 말을 아낀다.

하지만 녀석의 표정에서 알 수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디안은 콘미르에 쓰이는 향초 냄새를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세상 구경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을 놈이 이런 것까지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촙이 그에게 알려줬지 싶구나.

예전에 촙과 동행할 일이 있었을 적에 콘미르에 들렀던 적이 있었단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긴,

그곳은 너에게도 큰 도움이 되어줄 수도 있는 곳이었을 테니 촙이 그 부분을 놓쳤을 리가 없었겠지.

차라리 그가 계속해서 의심해주었다면 지금 마음이 이렇게 무겁진 않았을 거다.

아비베오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디안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격렬하게 거부할까, 통찰에 젖은 논리로 나를 찌를까.

그것도 아니면 그 은하수 같은 말들로 날 설득하려 들지도.

뭐,

일전에 내가 조언한 대로 호구와는 거리가 먼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르겠다.

물론 디안이 그런 모습을 보일 리 없겠지만 말이다.

세상이 녀석을 무자비하게 다듬었을지언정 녀석은 배시시 웃으며 그 세상을 이해하려 들 녀석이거든.

짧은 시간이지만 알 수 있다.

어찌 되었든 명색이 가족이니까.

기침에 시달리기 싫어 아셍트에서 사 온 모드릴을 태워 흡입하니 머릿속이 난잡하게 어질러지는 느낌이다.

그런 내 상태를 알아챈 벤투스는 느릿느릿 바닥에 발굽을 치대며 살금살금 거닐고 있었다.

서둘러 가라고 재촉해봤지만, 약에 취한 내 기력으론 놈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온다.

중립지역의 겨울은 유독 가혹한 추위를 자랑한다.

먼 북쪽, 차가운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바람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에 만연한 정취를 모조리 얼려버릴 만큼 자비가 없지.

나는 이번에 오는 겨울을 볼 수 있을까.

몽롱해진 정신 속, 이러한 생각에 다다르자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뒤질 때가 되니까 나도 이렇게 궁상을 떠는구나 해서.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내 얼굴에 살짝 묻어 있는 웃음기를 어떻게 또 알아챈 디안이 슬쩍 따라 웃는다.

“왜 웃어.”

“그냥요.”

“디안.”

“예.”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궁금한 거 없어?”

“있죠, 그것도 많이요.”

“그런데 어째서…,”

“답변해 주시지 않을 거잖아요.”

“해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안 해주실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디안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아비베오라는 곳으로 가면, 그곳에선 원 없이 질문할 거예요. 답변해 주지 않으신다고 해도요.”

영악한 놈.

* * *

알고 있다.

맥레인이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그의 몸에 머무르고 있는 총알은 지금도 천천히 그를 죽이고 있다.

빼낼 수 있다면 분명 살길이 열릴 수도 있겠지만,

글쎄 그것을 빼낼 만한 자를 중립지역에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맥레인은 무법자다.

어떤 과거를 살아왔는진 모르겠으나 그 과거를 등지고 무법자로서 살아가길 택했다.

보통은 과거를 반전시키기 위하여 무법자의 길을 택했을 테지만 맥레인은 보통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과거를 등지고 무법자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이유는 아마도…,

과거에서 멀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모종의 일로 도망쳐야만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셍트를 떠날 무렵,

그의 몸엔 익숙한 향초 냄새가 배여 있었다.

그건 자유를 만끽한 지 얼마 안 된 내겐 잊을 수 없는 냄새이기도 했다.

콘미르.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 장소에서 맥레인은 스스로 질문하며 답했을 거다.

어떤 대화를 했을까.

어떤 결심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

아니면 그런 결심의 본질을 자신에게 되묻고 싶어서?

요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확신을 얻고 싶어서였을 거다.

거기서부터 나는 맥레인을 거스르길 잠시 포기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벤투스의 고삐를 잡고 끌어 어떻게든 그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가 콘미르에서 했던 결심이나 다짐은 어떻게 해.

확실하지도 않은 치료를 위해 그가 열심히 안배해 놓았던 시간을 낭비하면 어떻게 해.

그것은 결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가 생각해 둔 시간 속에 나와 대화를 나눌 그때가 다가올 때까지.

그러면서 느꼈다.

운명이란 건 너무나 쓰다는 것을.

그러면서 또 애써 부정도 해본다.

운명이란 건 어떨 땐 너무나 달아서,

혹시 아비베오라는 곳이 진짜로 그를 치료해 줄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르겠다고.

가을의 페이지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다음 페이지부터는 새롭고 춥고 차가운 이야기가 시작되겠지.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맥레인은, 우리는,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맥레인, 궁금한 게 있어요.”

“질문은 아비베오에 도착하고 나서 한다면서.”

“그냥 듣기라도 해주세요.”

“그래, 들어나 보자.”

“디펠리스 수도 간호사나 다섯 손의 연금술사들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한 소녀의 꿈속에 들어갔었던 그 날, 매튜 아저씨께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들을 열거하자 맥레인은 혀를 차며 헛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하잖아요, 혹시 모르죠. 가는 길에 비밀리에 파견된 간호사나 연금술사를 만나게 될지요.”

“비밀리에 파견되는 이유는 둘 중 하나뿐이야.”

“그게 뭔데요?”

“누군가를 낙태시켜야 하거나, 누군가를 잉태시켜야 할 때 네가 말한 그 단체들은 비밀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맥레인은 높게 뜬 구름을 잡을 듯이 하늘을 올려보며 말을 이었다.

“용의 시대가 끝난 지금 이 세상은 뿌리와 깃발이 가장 중요해. 마찬가지로 뿌리와 깃발이 주체가 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예외라는 게 있잖아요.”

“예외를 바라는 것만큼 세상을 쉽게 보는 방법도 없지.”

맥레인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뒤돌아 날 보며 작게 이죽거린다.

“아, 너라면 그런 생각도 할 만하지. 너 자체가 일단은 예외에 속해 있으니까.”

“맥레인은 정말 못됐어요.”

“그걸 이제 알았냐? 그리고, 그런 애 같은 표현은 뭐냐? 좀 더 무법자답게 표현할 줄도 알아야지 엉?”

“맥레인은 개새끼에요.”

“이런 씨…”

내 말에 순간적으로 발끈한 맥레인은 한껏 눈썹을 일그러트리다가,

갑자기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까칠한 수염이 떨릴 때까지 배를 잡고 껄껄 웃었다.

“왜 웃어요?”

“그냥.”

“맥레인.”

“왜.”

“예외조차 외면하지 말아요, 예외가 생기면 그 예외를 이용했으면 좋겠어.”

“너처럼?”

그래, 검은 재 사이에서 영겁이라는 절망을 끌어안았던 내게 유일하게 허락됐던 그 순간처럼.

“나처럼요.”

다그닥, 다그닥.

이후 영롱한 가을을 수놓는 두 말의 발굽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왔다.

* * *

추적추적 얇은 비가 형편없는 기세로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색하게 맞물려 검게 질린 구름은 금방이라도 버거움을 토해내려는 듯 위태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곧 장대비가 쏟아질 거다.

우리는 서둘러 박차를 가해 말을 재촉했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달리니 후퇴를 거듭해 인위적인 경계선이 그어진 안야 숲 일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은 안야 숲 어느 부분으로 통하는 경계선일까.

전쟁으로 그 기세가 줄어들었다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안야 숲의 규모는 상상 그 이상으로 거대했다.

숲의 읍소와 싸웠던 곳도 안야 숲이었던 것을 보면,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을 적에 중립지역은 아마 대부분 안야 숲에 덮여있지 않았을까 싶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눈앞에 보이는 이 거대한 숲도 과거에 비하면 한없이 작아졌다는 사실이 통감 되기도 하고.

그렇게 숲에 들어서자 점점 굵어지던 빗소리가 옅어져 갔다.

녹색을 잃지 않은 나뭇잎들로 켜켜이 쌓인 숲의 지붕에선 간간이 그 틈바구니를 빠져나와 떨어진 빗물만이 점점이 보일 뿐이다.

베빌리와 함께 지냈었던 그 짧은 시간,

익숙해진 이끼 냄새에 자연스럽게 마마 오르델의 집 냄새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 속 냄새가 흩어져 사라질 때까지 맥레인은 숲 안쪽을 향했다.

이윽고 빗물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숲의 심부에 도달하고 나서야 맥레인은 벤투스를 멈춰 세웠다.

그곳은 비교적 듬성듬성 위치한 나무 사이에 펼쳐진 이끼 낀 평지.

그 위에 멈춰선 맥레인은 말없이 안장 가방에 실려있던 짐들을 풀어헤쳤다.

“맥레인?”

“왜.”

“잠시 쉬어가는 겁니까?”

“아니, 방금 목적지에 도착했어.”

“이곳이 아비베오란 말입니까?”

“그래, 안야 숲의 심부.”

황당하다기보단,

너무나 뜻밖이어서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맥레인, 그가 아셍트에서 했던 행동들을 미루어 볼 때 아비베오는 적어도 그에겐 아주 중요한 곳일 거라 생각했는데.

단지 깊은 숲이었다니.

“무슨 생각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비베오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야. 우리를 완벽히 감춰줄 만큼 깊은 숲을 지칭하는 단어일 뿐.”

맥레인은 내 표정을 보곤 쐐기를 박듯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내 물음에 맥레인은 천천히 풀어헤친 짐 속에서 낡은 아밍 소드를 집어 들며 대답했다.

“널 완성 시키기 위해서.”

* * *

“맥레인, 장난 그만 해요.”

디안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마치 지금까지 담담히 참아왔던 무언가를 놓아버린 것처럼.

“장난 같나?”

그런 그에게 오히려 몰아붙이듯 대답하자 디안은 처음으로 격앙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나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래서…?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내가 죽으면, 내 공백은 누가 채워주지?”

“당신이 살아서 계속 채워야죠!”

“그래서, 내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 남은 가족들은?”

“그 공백을 허무하게 맞이해야 하는 가족들은!”

“순례자가 어디까지 우릴 추적했는지조차 모르고, 남쪽 깃발 달린 놈들은 우리 목에 현상금까지 걸었어.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아직도 얼얼한 뒤통수를 만지며 눈에 불을 켜고 우릴 잡으려는 기업가 놈이 있지,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생사조차 몰라. 그 와중에 매튜는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가족을 찾으러 갔어.”

손가락을 치켜세운 채 디안을 찌르듯 성큼성큼 다가가 윽박지르니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 모습이 제법,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난 표독함 잔뜩 머금고 그를 향해 소리치는 것을 이어 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매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 결심을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너는 지금 칭얼거리기만 하고 있구나. 등신 같은 녀석아! 좀 냉정해 져라, 제발!”

“난 적어도 당신이 아비베오에서 남은 시간을 온전히 당신만을 위해 쓸 거라 생각했단 말이야! 호구같이 살지 말라며, 근데 왜 당신은 호구 등신처럼 행동하는 건데!”

“씨발 가족이잖아!”

“그래 가족이잖아!”

디안의 깊은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나는 뭔데, 가족 아니야? 씨발! 맥레인, 나한테 아파 죽겠다고 좀 말해 달라고. 아프니까 어떻게든 치료할 수 있게 뭐라도 해달라고 말하라고!”

“너도 알잖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그의 드넓은 두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왜 당신의 죽음을 날 위해 쓰냐고, 왜. 나는 왜 당신의 죽음을 써야만 하냐고.”

다행이다.

그 어린 나이에 모든 면에서 초연할 줄만 알았었는데.

너도 제법 나이에 걸맞게 치기를 부릴 줄 알았던, 일반적인 청년의 모습을 보일 줄도 아는구나.

하지만 그것이 끔찍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치기라는 게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다가오는 상실감에 힘없이 무너지지 마라.

나처럼은 무너지지 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가 너를 조금이나마 다듬어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