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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노래-75화 (75/365)

75화. 일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떨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햇살 조각 두어 개 정도만이 떨어질 즈음에, 그들은 역시나 약속이라도 한 듯 처음 있었던 곳에서 만났다.

아비베오에서 맞이하는 제대로 된 첫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들고 있던 검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보석처럼 빛나는 이의 검은 추스르지 못한 감정을 대변하듯 거칠고 강하게 휘둘려졌고,

마주하는 초로의 남자는 그것을 길들이기 위해 한없이 부드럽고 탄력적인 모습으로 움직였다.

검으로부터 삐져나온 은빛이 곡선을 그리며 번쩍인다.

그로 인해 찢어진 바람은 넋을 잃어 그 비명조차 희미해졌지만, 두 검의 쨍함은 점점 선명해져만 갔다.

어지럽게 산개하는 불똥, 움직임에 맞추어 온몸으로부터 튀기는 땀방울.

초로의 남자는 짊어지고 있던 고통에 순간 표정을 일그러트렸지만, 그에 반발하듯 새로운 동작들을 뽐내며 상대를 압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석 같은 남자는 두 눈을 번쩍이며 그러한 압도를 잡아먹고서 역으로 새로운 검술을 내놓았다.

이에 초로의 남자는 덩달아 신이 났는지 방금까지 느껴야만 했던 고통도 잊고 금세 흥분했다.

날과 날이 붙어 미끄러지듯 떨어져 가드끼리 부딪치고, 서로의 폼멜이 손목과 손등을 짓누른다.

그마저도 부족해 서로의 어깨를 맞대며 상체를 들이밀고 빈틈을 찾는다.

누가 뒤로 갈 것인가, 누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들 몸 중의 균형은 숲조차 모르는 수수께끼와 같았고, 그에 대한 답은 둘만이 알고 있었으리라.

이윽고 초로의 남자가 틈을 노려 상체를 뒤로 물렸다.

찰나 안에 이루어진 움직임,

균형을 빼앗긴 보석 같은 남자가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체를 앞으로 쏟았다.

하지만 그 신체의 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도중에 허리가 활처럼 휘듯 꺾이며 균형을 낚아챘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의 검은 다시 은빛을 흘린다.

흘린 은빛은 바람을 질리게 만들고,

질린 바람은 바닥에 잠들어 있던 가을의 낙엽을 일으켰다.

그러는 사이 수십 번의 굉음이 두 검 사이에서 몰아쳤다.

일어난 낙엽이 다시 스르르 땅 위에 떨어져 잠들기까지 말이다.

이에 놀란 새들은 재해라도 마주친 양 짹짹거리며 도망치듯 날아간다.

나무들은 급히 웅성거리며 심부에 들이닥친 두 줄기 벼락을 보곤 몸서리치기 바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다음 날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에 다다라서야 둘은 검을 거두었다.

이날 초로의 남자는 스물두 개의 스탠스를 내놓았고,

보석 같은 남자는 두 개의 새로운 자세를 만들어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들은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제와는 달리 두 검 사이에선 숨 막히는 차분함만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눈은 서로의 몸동작을 읽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그렇게 읽은 동작들을 파훼하기 위한 움직임만을 앞세워 쉴새 없이 서로를 압박했다.

초로의 남자는 상대 검에 집요하게 들러붙어 계속해서 새로운 스탠스를 내놓았지만,

그러한 압박에 언제나 무릎을 꿇어야 했던 보석 같은 남자는 어제 익힌 동작들로 그것들을 극복해냈다.

그리고 그 극복 이후에 펼쳐진 그의 검술은,

상단, 중단, 하단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는 극악한 정교함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초로의 남자는 일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바람마저 속여내는 가공할 만한 휘두름으로 받아쳤다.

둘의 검은 어느새 고요에 물들어 있어,

도망쳤던 새들도 속아 속속들이 제자리로 모여들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슬슬,

초로의 남자는 자기 가슴 속에 파묻혀있던 고통이 격통이 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되려 미소지었다.

건너편,

찬란한 빛이 점점 거대해지는 것을 느꼈으니까.

이날,

초로의 남자는 열여덟 개의 스탠스를 내놓았고,

보석 같은 남자는 세 개의 새로운 자세를 만들어냈다.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초로의 남자는 이른 아침부터 느껴지는 고통을 달래기 위해 가져온 모드릴 절반을 태웠다.

정신이 녹아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이었건만, 그의 눈빛은 더없이 강렬하기만 하다.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인사하듯 검을 부딪쳤다.

오늘은 근 이틀간 펼쳐졌던 화려한 역사를 부정하려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움직이는 두 사람은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서 새들도, 나뭇잎도, 떨어져 있는 낙엽도 숨을 죽이며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으리라.

초로의 남자는 자신이 가진 정수를 내뿜었다.

그것은 셀 수 없는 무수한 검술의 복기이자, 반대로 같은 복기로 파훼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재능이었다.

춤을 추듯 발의 축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은,

누군가의 손에 뜯겨 바람을 타고 흘러내리는 꽃잎과 같아.

검의 궤적을 예상하려는 행위조차 의식의 낭비라 생각할 만큼 변칙적이었다.

검이 긁어 일으킨 바람의 부스럼은 낙엽과 가지를 베고, 이내 보석 같은 남자의 볼을 베었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보석 같은 남자의 재능 또한 너무나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이내 올라탔다.

초로의 남자가 떨어트린 꽃잎 위에.

부우웅.

부우웅.

거대한 벌의 날갯짓일까.

캉!

캉!

그 날갯짓에 떨어져 내리는 바위의 괴성이었을까.

둘 사이에 펼쳐진 파괴적인 윤무가 수백 수천 번의 박자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그 윤무가 끝이 났을 즈음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작은 햇살 조각은 이미 누군가 훔쳐 가고 없어진 뒤였다.

이날 초로의 남자는 마흔두 개의 스탠스를 내놓았고,

보석 같은 남자는 가진 자세를 세 개로 함축해내었다.

넷째 날이 밝았다.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경의를 내비쳤다.

초로의 남자는 짧은 시간이 무색하게 무궁히 만개한 재능에.

보석 같은 남자는 세월로 보강한 완성된 재능의 모습에.

그렇게 경의를 뒤로하고 그들은 다시 맞부딪쳤다.

초로의 남자는 이제 거리낌 없이 자루에 잠든 인챈트를 깨워 낡은 아밍소드를 푸른 빛으로 달구었다.

그 푸른 뜨거움에 잠들어 있던 몸속, 고요한 바람이 깨어나.

파악!

괴성을 지르며 바람을 재단했다.

검의 궤적을 따라 연장된 파괴의 사선.

그러나 보석 같은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응수했다.

자신의 몸 중에도 휘몰아치는 바람결이 있었으니까.

그의 손에 들린 귀 큰 자들의 예리한 검도 이미 푸르게 달구어져 있었다.

그런 그의 검으로부터 뛰쳐나온 바람결은 곧장 초로의 남자가 내민 바람과 충돌했다.

처음은 두 사람 모두가 일순간 바닥을 끌며 뒤로 물러날 만큼 강한 충격파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

──── !

이루 말할 수 없는 이명이 뒤따라 그들을 넘어 주위 숲을 덮친다.

경이로 덧칠된 현장의 모습은 충격과 파격이었다.

하지만 초로의 남자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듯, 푸른 연기로 너울대는 아밍소드를 고쳐잡으며 천천히 상대를 향해 다가갔다.

가진 재해로부터 갈무리한 바람,

그 바람 중에서도 결 하나까지 골라잡아 검에 실을 수 있는지 보겠다는 비장한 표정과 함께.

이윽고 아비베오는 두 검이 그려낸 재해에 흠뻑 젖어야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몰랐을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로, 날씨를 망각한 채 떠도는 구름이 재해의 냄새를 맡고 모여들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이날,

초로의 남자는 몸에 품었던 다섯 개의 거대한 바람 줄기를 내놓았고.

보석 같은 이는 세 줄기의 거대한 바람을 몸에 품었다.

다섯째 날이 밝았다.

어제의 일로 아비베오에 서식하던 짐승과 괴물 대부분이 도망쳤다.

이에 나무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반대로 떠난 괴물만큼 지친 새들이 찾아와 금방 누그러진 모습으로 가지를 흔들었다.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은 다시 검을 부딪쳤다.

두 검은 푸르게 물들어 있었지만,

어제와 같은 폭력적인 바람이 나부끼진 않았다.

어제와 달리 그들의 검엔 절제가 묻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초로의 남자가 계획한 대로였다.

그리고 보석 같은 남자는 그런 그의 계획보다 더 체계적으로 움직여주었다.

주고받는 검과 검의 부딪침엔 이제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여유 속엔 진한 가르침이 들어섰다.

무언으로 진행되었으나,

검과 검의 쨍함이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걸 담고 있었기에 그들은 묵묵히 검을 휘두를 뿐이다.

초로의 남자는 계속해서 새로운 스탠스를 끄집어내 휘둘렀다.

그 끝이 심히 궁금해질 정도로 가짓수는 무궁무진에 가까워 보였다.

어느새 보석 같은 남자의 눈에 초로의 남자는 자신보다 더욱 찬란히 빛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절제와 여유만이 감돌던 이 날,

초로의 남자는 무려 예순 하나에 달하는 스탠스를 내놓았고,

보석 같은 남자는 함축한 세 개의 검술에 체계를 확립했다.

* * *

여섯째 날이 밝았다.

혀는 미각을 잃고, 잇몸은 힘을 잃어 단단한 걸 씹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다.

그럼에도 나는 본능에 따라 마른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약의 후유증은 참으로 지독한 것이었지만,

반대로 약을 씀으로써 내 시간을 가치 있게 써주는 녀석에게 후회를 남기지 않을 만큼 열성을 다할 수 있었다.

이제 그에게 보일 스탠스는 단 두 개뿐이고,

그 이후엔 보여줄 것도, 새로이 가르침을 줄 것도 없다.

생각해보건대,

등에 깃발이 휘날리던 때, 엿새 만에 내 가르침을 모두 소화했던 기사가 있었던가?

아마도 없었을 거다.

비록 녀석보다 인챈트의 힘을 잘 다루는 녀석들은 있었을지 몰라도 말이야.

그마저도 가문이라는 환경의 이점을 톡톡히 치렀기 때문이란 걸 생각하면.

전체적인 재능의 총량은 디안이 압도적이라 단언한다.

심지어 어제는 자기 전에 그런 생각도 해봤다.

만약 디안이 세공소가 아니라 검투사의 노예로 팔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 경악스러운 재능으로 한 제국의 묵시록을 써 내려갔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시름 놓아도 되겠어.

만개한 재능이 그가 품은 그 검고 저주스러운 것을 감쪽같이 덮어줄 테니까.

또 가진 재능이라면 충분히,

가족들을 지켜낼 수 있겠지.

내가 없어도 말이야.

이제 마지막 남은 모드릴을 피운 나는 몸을 일으켜 날 기다리고 있을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디안은 먼저 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

치기 어린 모습을 보여줬던 그는 지금 초연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새끼,

기특하게도 그런 초연함 속에 나를 향한 존중도 담아낼 줄 아는구나.

이제는 익숙하게 서로를 향해 검을 내밀었다.

맨 처음, 놈의 미숙함을 걱정하여 검에 가죽을 들렀을 때가 어제 같은데.

지금은 놈의 완숙함에 이의를 제기할 것도 없네.

곧장 발을 앞으로 내세우자,

녀석도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불과 닷새 만에 정립된 그의 검술은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처음 그의 검술은 단순히 박자를 위시하여 상대 검술을 기만하며 잡아먹는 종류일 거라 생각했지만,

겪고 보니 그 박자감은 그저 그가 억지로 익혀야만 했던 재능 중 하나였을 뿐.

진정 그가 발휘해내는 검술적 재능은,

경계의 부재.

한없이 자유로운 날개와 같이 생각의 한계가 없는 것.

오랜 세월 무인들이 쌓아 올린 병기에 대한 지식을 허무는 한 천재의 부정이자,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만이 말할 수 있는 답 아닌 답.

아,

바람결이 검과 검을 통해 비산한다.

이윽고 내가 가진 마지막 두 개의 스탠스를 내밀어 그의 비워진 마지막 조각을 채운다.

최후의 부딪침이 끝나고,

디안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검을 거두었다.

그리곤 그가 내게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심심한, 그러면서도 절절한 그의 고백에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모닥불을 끼고 밀렸던 이야기나 하자고.”

웃음기 섞인 내 말을 들은 디안은 그제야 정겨운 미소로,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날 보며 화답했다.

그것을 보면서 언젠가 내가 한 말이 불현듯 떠오르는구나.

녀석과 나는 지독한 상극이라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상극으로서 극상을 벼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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